타임리스 타임

“공부 많이 했어?”

다음 주는 중간고사 기간이다. 대학교에 와서 치른 첫 시험의 긴장감에야 비길 수 있겠느냐만, 아직 1학년이라 그런지 코앞에 닥친 시험은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했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가까워진 탓에 유진과 선영은 펼쳐 놓았던 책이며 노트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란히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리 지키고 앉아 있기는 했는데, 아직까지 시험 범위 제대로 한 번 훑어보지도 못했어.”

“그냥 경은이 족보나 사서 대충 때울까.”

선영이 기운 빠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좀 비싸서 그렇지 본전 제대로 뽑는다던데.”

“한 과목에 십만 원씩 받는다는 그거? 난 그런 거 돈 주고 사는 애들 이해를 못 하겠더라. 그거만 믿고 있다가 거기서 문제 안 나오면 완전 망하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진짜 장난 아니래.”

선영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큰 비밀 이야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보통 선배들이 주는 족보라는 게 문제 정도나 찍어주는 거지 답은 알아서 정리해야 되잖아. 근데 경은이 족보는 모범 답안까지 다 붙어 있어서 그것만 달달 외워서 쓰면 그냥 게임 끝이래. 왜 이번 학기 민법총칙 교수 죽어도 A 안 주는 걸로 진짜 유명하잖아. 그런데 지난 학기 기말에 A가 우리 분반에서만 자그마치 다섯 명이 나왔대. 근데 그게 다 경은이 족보 가지고 공부한 애들이라잖아.”

“그래?”

유진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선영을 보았다.

“그 족보가 그렇게 용하단 말이야?”

“신기하지?”

선영은 입을 삐죽거렸다.

“혜림이도 말이야. 걔 1학기 기말고사 직전에 남친이랑 깨져서 울고불고 하느라고 공부 진짜 하나도 안 하고 있다가 속는 셈치고 그 족보 사 가지고 그것만 달달 외웠대. 그런데 이번 학기 전액 장학금이잖아.”

“와.”

유진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게 있다니 어째 헛짓거리 하고 있는 기분인데.”

“오죽하면 걔 교수 누구누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있잖아. 그래서 뒷구멍으로 시험문제 미리 빼오는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한두 과목도 아니고 전 과목 다 그렇게 완벽한 족보를 갖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에이, 걔가 그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경은이 오히려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아냐? 난 처음에 경은이 우리랑 동갑이래서 깜짝 놀랐는데. 한 3수는 한 줄 알았지.”

“경은이 담배 피우잖아.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봤어. 피부 상하는 데 담배만 한 것도 없잖아.”

선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경은이 걔 그런 거 말고라도 정말 소문 안 좋긴 하더라. 그렇게 족보 장사해서 돈 꽤 버나 보던데 그거 가지고 툭하면 명품이나 사러 다니고 그런대. 뭐 들리는 말로는 고등학교 때 진짜 닭이었는데 뭘 어떻게 했는지 수능 점수가 완전 대박 나서 우리 과 들어온 거래. 커닝이라도 했나?”

“말도 안 돼.”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경은이 우리 과 톱이잖아. 장학금도 늘 받고. 그런 애가 고등학교 때 닭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그렇다니깐.”

선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엄청난 족보를 다 갖고 있으니까 본인 성적도 좋겠지. 근데 진짜 어떻게 그렇게 잘 맞히는 거지? 시험에 뭐 나올지 미리 알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선영은 버스를 타야 해서 다른 길로 가고, 유진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혼자 지하철역으로 내려왔다. 도대체 왜 도서관의 좌석은 늘 그렇게 부족하게 만들어놓은 건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 한 글자 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려면 도서관 개장 시간인 아홉 시보다 최소한 한 시간 이상 일찍 나가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생활이 벌써 일주일 이상 계속되고 있었던 탓인지 오늘따라 몹시 피곤했다.

“아, 피곤해.”

유진은 핏발이 선 눈으로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다음 순간 찔끔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다행히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진은 자꾸만 한옆으로 비어져 나오는 교재들이며 노트들을 추슬러 다시 안아 들었다. 고장이라도 난 건지 양쪽으로 열어 젖혀둔 스크린 도어 너머로 시커먼 먼지가 낀 역 표시판이 보였다.

“이번이 막차 아닌가?”

유진은 일부러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막차라는 것은 늘 비좁게 마련이지만, 중간고사 준비 기간인 요 며칠은 혼잡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승강장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지하철역이라.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유진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어이.”

순간 등 뒤에서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다가 유진은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허름한 차림의 후줄근한 사내 하나가 낡은 벙거지를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눌러쓴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비가 없어. 차비 좀 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 한동안 몸을 씻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섰다. 행색만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예.”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사내는 돈을 받기는커녕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유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천 원?”

사내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 이년아.”

“예…… 예?”

“애들 사 먹는 과자 한 봉지 값도 안 되잖아, 씨발.”

유진은 그만 공포에 질렸다.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위에는 직원이나 공익요원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 순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죄,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

“어, 얼마나 더 드리면.”

“시끄러.”

그러나 사내는 대답 대신 거칠게 달려들어 유진의 옆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팔을 내저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안아 들었던 교재며 노트 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부모 잘 만나서 속 편하게 학교나 처다니는 팔자 좋은 년.”

“자, 잘못했어요. 제발…….”

“아가리 닥쳐, 개년아.”

억센 손이 그녀의 가슴팍 한복판을 거칠게 떠다밀었다. 휘어 잡힌 머리채 쪽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선로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차가운 선로 위로 널브러진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떨어질 때 선로 어디에 부딪혔는지 골반 쪽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유진은 악을 쓰며 승강장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사내는 승강장 위에 버티고 서서 뭉툭한 신발 끝으로 승강장 끝머리를 간신히 붙잡은 그녀의 손을 사정없이 밟아 짓이겼다. 그 뒤로 부질없이 입을 벌린 스크린 도어의 검은 그림자가 참으로 황망하게 비쳤다.

“뒈져, 씨발년아. 너같이 세상 무섭고 더러운 줄 모르는 것들은 다 뒈져야 돼.”

그 까닭 없는 적의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멀리서 지하철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지하철의 헤드라이트가 비치고 있었다. 유진은 더욱 필사적으로 승강장에 매달렸지만 이미 놀라움에 굳어버린 팔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누구라도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귀를 찢는 마찰음이 들렸다. 기관사가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의 속도는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매달린 유진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한 번 내더니 천천히 저편으로 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유진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무런 의미 없는 비명일 뿐이었다. 그 비명 소리는 텅 빈 승강장 속을 공허하게 흩어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하철은 무서운 속도로 선로 위를 달려 지하철 역 구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유진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온몸의 신경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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