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계 : 경계를 넘는 순간,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퍼온 글입니다 . 원본은 링크로 표시합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1067227&code=61101

정.말. 좋은 글입니다

* 저는 마지막 문단이 참 마음이 아파요. 다른 분들이 읽기엔 어떠신가요?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는다, 지독한 사랑 <색,계>

* 저는 장면을 말하지 않고서 영화 감상을 설명하는 방법 따위는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견지를 스포일러라고 보실 분들은 사뿐히 '뒤로'를 눌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뒤늦게 <색,계>를 보았습니다.

딩신은 내가 이 영화를어떻게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울었어요. 영화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저는 내내 술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영화를 보셨나요?

몸과 마음을 빼앗겨버린 한 여자가 종국에는 목적한 바를 그르치고 남자를 살려주는 이야기. 거기에 다이몬드도 한 몫했다는 것을 빠뜨릴 수 없겠지요. 안 그래요?

물론 그렇게 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눈물을 흘릴만한 영화라고는 생각지 않으시겠지요.

저는 이렇게 보았어요.

사실은 치아즈가 그 자신만의 방식, 그 자신만의 개성(色)으로 남자를 살리고자 주변의 계(戒)를 풀어냈다고 말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죽이고 끝나도록 예정되어진 대국에서, 치아즈는이(易)를 살려내고 자신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즉, 이게 그녀의 의도였다고 말이지요.

이게 설명 가능한 이야기냐구요?

물론이지요.

영화 내내 등장했던 중국마작에 대입해 이 영화를 설명해보면 명쾌해지리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마작은 원칙적으로 네 사람이 둘러앉아 벌이는 게임입니다

<색,계>라는 세계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4명으로 압축할 수 있지요 :

테이블 한 쪽에는 왕 치아즈가 앉습니다. 한쪽에는 易, 다른 한 쪽에는 광유민을 위시로 한 대학동창 애국청년단이 앉겠지요. 마지막으로 빈 자리에는 당연히 대 일본저항군조직 우 영감이 앉습니다.

어머, 놀라셨습니까? 비중도 작은 우 영감이 이 테이블에 앉다니 말이죠. 하지만 易와 그는 매우 오래된 맞수 였습니다. 1942년 상해에서 판을 벌인 것도 다름아닌 우 영감인걸요. 싸움에서 하수는 부딪혀서 상대를 제압하려 하지만, 고수는 전면전을 꺼리는 대신 다른 상대를 적에게 붙이지요. 우 영감이 바로 그랬습니다. 우 영감에게 있어 다른 참석자, 즉 치아즈와 광유민은 易를 판에 불러앉히기 위한 하나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소모품.

치아즈는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조차 버림받은 치아즈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녀는 임무가 실패하면 약을 먹고 자살하거나 내부적으로 제거되거나 사대편에게 죽임을 당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치아즈가 만약 易에게 자신이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좀 더 빨리 털어놓고 의지했더라면 어땠을까요? 확실히 영화가 끝나갈 때 즈음의 易는 진심으로 치아즈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치아즈를 지켜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랬더라면 치아즈와 易, 그 둘 모두 죽었을 겁니다.

易는 내부의 숙청 위험에서조차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항상 크나 큰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철통같이 방허했다는 점을 치아즈는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易는 치아즈가 죽은 후, 자신조차 부하인 "창"에게 감시당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집안 서재조차 수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최악입니다.

그녀를 실컷 이용했던 우 영감 말대로, 그녀가 영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만에요!

관객들은 우 영감이 치아즈의 편지를 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타들어가는 편지는 곧 그녀에게 탈출의 미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광유민은 조직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고 치아즈에게 암시하기도 했지요.

치아즈는 영국행 대신 다른 작전에 투입되거나 내부의 핵심비밀이 유출될 것을 두려워 한 저항군에게 목숨을 위협당했을 겁니다. 아니, 저항군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정부군이 저항군의 본거지 매우 깊숙한 곳 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치아즈가 易를 죽이자마자, 정부군은 저항군의 아지트를 급습하고 동료와 치아즈를 색출했을 겁니다. 그 증거로, 임무가 실패하자마자 애국청년단과 치아즈는 정부군에게 잡혀버리잖아요.

즉, 어떤 각본에서도 그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어요.

그리고 치아즈, 치아즈의 동료들, 그리고 치아즈가 사랑한 易마저 죽고나면 이 대국은 명백히 우 영감의 승리로 종료되었을 겁니다.

그녀가 이런 결말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치아즈는 매우 총명한 여성입니다. 기억력이 좋아 우 영감의 모든 지시를 그 자리에서 외웠고,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계략을 짜는데 결코 서툴지 않습니다. "극장을 가는 것을 좋아해요"라는 말로 상대를 유인하는 여자. "나는 어두운 곳을 싫어하오"라는 평범한 말에서 상대의 의중을 읽어내는 여자.

그녀가 매번 마작판에서 졌던 이유를 기억하십니까? 서툴러서 진 게 아닙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 집중할 수가 없다고 했지요.

마작은 상대방이 버린 패를 머리 속에 기억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명민한 치아즈라면 틀림없이 모든 작은 단서를 조합해 현실을 분명히 인식했을 겁니다.

그래도 좋았을지 몰라요.

치아즈는 별로 살고싶은 욕망이 없었을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2차 세계대전 시절의 뿌리 깊은 세기말적 허무함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지만 그런 치아즈에게도 자신이 죽고 易마저 죽는 것, 이것은 참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 영감의 승리가 명확관화한 마지막 순간, 이 대국의 승기를 뒤엎어 버립니다.

예정대로 그녀는 죽되, 당연히 죽었어야 할 易는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치아즈에게는 만족할만한 승리였지요.

애초에 치아즈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易가 떠난 거리를 표표히 걸어나와 어디로도 도망치지도 않고 "퍼거슨 가로 가달라"고 태연하게 주문하는 그녀는 정말 삶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전 인생을 망쳐버린 대학동기들과 지옥에 가는 것은 더더욱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저는 준비해 온 알약을 삼키지 않고 끝까지 동료들의 최후를 지켜보던 그녀의 한(恨)에 몸서리쳤습니다. (그녀가 동료들이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알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인력거를 타고 퍼거슨 가로 돌아가는 장면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거기서 동료들을 떠올렸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증오했을까.

겉으로는 고작 딱 한 번, "왜 3년전에는 네가 하지 않았어?"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지만, 정말 얼마나 그들을 경멸했을까. 그들을 무저갱의 아가리 앞에 일렬로 앉혀놓고도 한 점의 후회도 하지 않는 그녀는 오뉴월 서리를 내리고도 모자라 세상을 얼려버릴 만큼 싸늘했지요.

다시 한번, 그녀의 계를 마작에 대입해 볼까요?

마작판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상대가 먼저 완성패를 만들지 못하도록 다른 사람의 조합을 방해하는 동시에 자신이 패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정 상대만을 생각해서 작전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대국을 하는 모든 상대를 견제해야 하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수는 절대로 고수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의외로 마작은 공평하게도, 가진 것이 모두를 좌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패를 바탕으로 완전히 살릴 수 있을지, 그렇지 않으면 절반 만이라도 살리 ㄹ수 있을지, 또는 전혀 살리지 못하는지는 승부에서 어떻게 대처한느 가의 문제이며, 통찰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패라도 살리지 못하는 게 마작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력, 추리력, 판단력, 결단력을 동원해 모든 것을 걸고 임하는 사람은 초심일지라도 고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리고 치아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易를 살리도록 자신의 패를 완성했습니다.

저는 그런 치아즈의 마음을 易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易는 이미 몇 번, 미인계로 접근해 온 전문요원들을 살해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빚어진 섹스에 대한 두려움이, 치아즈와의 첫번째 정사에서도 표출되지요). 그런 그가 치아즈를 그들과 같이 치부해버리기는 커녕, 치아즈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살리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는 모습이야말로, 易가 치아즈의 진심을 이해했다는 방증아닐까요.

그럼 치아즈는 언제 易를 살릴 결심을 했을까요? 저는 의외로 그녀가 진심으로 이 결정을 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을거라고 추측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易와의 정사나 다이아몬드 때문에 易를 도망치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랬다면 그녀는 훨씬 더 전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야 합니다. 보석상에 易와 함께 가기 전에.

아마 그녀는 易에게 계속해서 끌리되, 易때문에 자신의 임무까지 그르칠 생각은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易의 애정을 확신하면서도 편지를 조사하고, 易와 함께 보석상에 가면서도 옷깃에 알약을 숨겨간 것은, 최후까지도 치아즈가 易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목적의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말했다시피, 사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살아야 할 궁극의 목적 따위, 없잖아요.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이 易를 살릴 결심을 했을까요?

그건 그녀의 마음이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100% 완전하게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켜줄게"라는 易의 말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말입니다. 그녀는 그 전, 최후의 최후까지도 易를 완전히 믿지 않았어요.

그녀가 그를 얼마나 경계하면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계략속으로 끌어들였는지는, 가령 첫번째와 두 번째 섹스에서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변태적일 정도로 가학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易와의 첫 정사 후, 홀로 남은 그녀는 조용히 웃습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易를 이미 그 순간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웃기는 커녕 배반감에 몸을 떨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치아즈는 미소짓지요.

왜?

그건 易가 여인을 묶어두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치아즈가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제 易의 첫번째 경계를 안전하게 넘음으로써, 易가 다음번에는 그녀를 좀 더 믿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한발 한 발 易의 마음 속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합니다. 다음 번, 그녀가 "홍콩으로 떠난다"고 운을 떼자 평소라면 그런 수에 속아 넘어갈 리 없는 易는 그녀의 패를 덥썩, 잡아 뭅니다. 떠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치아즈의 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무너지는 경계.

이제 그는 완전히 그녀의 영역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치아즈의 말대로 履의 경계가 무너지자 마찬가지로 치아즈의 경계도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정사장면에서, 바로 곁에 있는 총을 쏠지 말지를 갈등하며 애증의 눈물을 흘리는 치아즈의 모습은 긴장감의 절정을 이룹니다.

심장으로 파고 들어온 뱀,

뱀을 죽여버리기 위해 총을 쏘면 자신도 죽어버리겠지요.

그럼에도 그녀는 위악적으로,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易를 의심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치아즌 일본조계지에서 易에게 "당신이 나를 왜 여기로 불렀는지 알아요. 당신의 창녀 노릇을 하라는 거지요"라고 말했드시, 易가 값비싼 보석반지를 끼워주는 이유도 "반지로 자신을 예속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을겁니다.

보석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허탈감과 동시에 치욕이 스쳐지나간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 직후 6캐럿의 다이아몬드에서는 그 눈빛이 탐욕으로 바뀌었지만.

영악한 그녀는 易에게 "왜 반지를 사주는지" 묻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알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易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나는 보석에는 관심 없소. 다만 그걸 낀 당신의 손이 보고싶었던 거요."라는.

이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그녀는, 그 다음말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100%로 차오르는 순간.

마음의 둑이 터져 경계를 넘는 순간.

그 순간을 잡아내는 이안 감독의 연출은 탁월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진실에 역시 당황해서 도망가는 易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치아즈를 그저 노리개 취급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易가 당황하면 당황할 수록, 미친듯이 뛰면 뛸 수록 그는 그만큼 치아즈를 믿고 있었다는 소리가 되니까요.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대체 왜 치아즈는 그렇게까지 끌리는 마음을 애써 부정해가며 易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가.

저는 그 동인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치아즈는 애국심이니 혁명사상이니 하는, 전체주의적이기까지 한 집단논리에서 매우 거리가 있는 인물이거든요.

동료들 중에서 맹목적인 대중논리에 희생되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치아즈가 유일했을 겁니다.

광유민에게는 죽은 형이있었고,

치아즈의 동성친구에게는 광유민이 있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시대가 요구하는 애국심을 가장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경멸당하지 않을까, 시대 조류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매국노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장난같은 애국놀이도 끝나갈 때 즈음에는 급기야 엉뚱한 동향사람을 죽이고도 "일제의 개를 처단했다"라 외치는 비극을 낳았죠.

반면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온 생을 걸고 易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다 바친 치아즈에게는 어떤 표면적인 동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야 광유민이 좋아서 친구 따라 극단에 들어갔지요. 하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막 부인으로 변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이유가 단지 그 동기로 설명이 되나요?

저는 그녀가 상해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극장에 가기를 멈추지 앟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 동기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집념과 연기에 대한 사랑. 맞아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을 때도 그녀가 혼자 눈물을 훔쳤던 곳은 극장이었고, 처음 연기의 희열을 맛본 것도 극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살던 시대는, 치아즈가 단지 연기만 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지요. 영화 ㅊ초반 , 치아즈 친구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올린다면 생각해볼게"라고 하자 광유민이 그런 부르주아 연극을 누가봐 라며 매몰차게 거절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인형의 집>이 근대 여성해방 운동의 신호탄 같은 작품임을 생각할 때, 그 대사는 예술도, 여성도, 시대논리에 가차없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암시하지요. 광유민의 위험한 발언대로 시대는 치아즈라는 한 여성의 연기에 대한 꿈을 박탈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한 여성으로서의 가장 개인적인 삶-즉 성적인 영역-까지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공연을 올려도 사상극이 아니면 외면하는 시대에서, 그녀는 막부인을 연기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락된 공연임을 인지했을 겁니다. 아마도 이 같은 예술에 대한 사랑이 , 언제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녀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고 열망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고, 그녀의 눈에서 "두려움"을 없앴던 것이 아닐까요.

또 치아즈의 이런 점을 꿰뚫어 본 易는 바로 그 점을 사랑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치아즈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易는 두 번, 두려움에 관해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애국이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어서 좋다고 말한 것이 첫 번째. 易는 치아즈가 속한 세계에서 그녀가 매우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4년 뒤, 易는 일본조계지 환락가에서 다시 한 번 치아즈에게 말합니다. 일본인들은 패전의 기미가 두려워서 저런 째지는 노래르 ㄹ들으며 자신을 위안하고 있노라고 치으자그 자신의 동료들에게 속하지 않은 것 만큼이나 易는 자신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본의 정세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는 일본이나 괴뢰정부에 기댈 게 없다고 생각하기 일신의 영달만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된 사람이니까요.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를 걷는 두 사람. 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치아즈의 화답에 눈물 흘리는 易는 알았겠지요. 그 둘이 독같은 경계인이라는 것을. 개인의 삶이 전체에게 위협당한다는 사실, 그것이 실은 易 자신에게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실로 둘은 고난 속에 처해있다는 것을.

그 둘이 서로 소통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라 일본조계지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중국땅이 아닌 일본자치구역에서야 그들은 중국인임에도 이방인이었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중국인이라는 핏줄로 환원할 수 있었지요.

치아즈는 그러니까, 죽는 순간까지도 易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을 감시하는 부하 앞에서 치아즈의 죽음을 명령할 수 밖에 없는 易를

가장 먼저 가택부터 수색당하는,

사실은 정말로 속수무책인 易를.

너무나 치아즈가 그리워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을 방을 다시 한번 들어와 오래오래 앉아있는 易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번 종이 울리는 동안 마치 자신이 열발의 총을 맞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는 易는 앞으로 얼마나 회한하며 살게 될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이 영화가 194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가슴속으로 뛰쳐들어오는 소리를, 우리의 지나간 사랑을 일깨우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가올 때는 거부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먼저 왔던 사람들은 저 멀리로 떠나가 버리는데, 나는 계속 진탕같은 사바세계를 허우적거리며 살려고 애쓰고, 다가온 사랑도 내던져 버리며 혼자 살아보겠다고 전전긍긍하다가,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다가,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사랑에 무너지고, 너무 뒤늦게 마음을 열고, 그리고 떠나가고 나서야 사랑이었다고, 그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깨닫게 되는 그는 -또 우리는, 그리하여, 사랑도 죽여버리고 독하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오래오래, 살아낼 겁니다, 살아 남을 겁니다. 결코 지워버리지 못하며

참,

이 영화를 본 뒤 술이 마시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던가요?

정말,

지독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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