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영화계의 카이저 소제 ~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44년작 <육군>에 관하여

감독: 기노시타 케이스케

주연: 류 치슈, 다나카 기누요, 호시노 카즈마사, 토노 에이지로, 우에하라 겐, 미츠다 겐, 스기무라 하루코

촬영: 타케토미 요시오

전체 관람가 / Black & White / 87분

원제: 陸軍

* 올 해는 광복 70주년인지라,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작품을 한 번 적어보자는 생각에 끄적여 봤습니다.

.....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한국에서 그리 알려진 일본영화인이 아니다. 지금도 그리 큰 차이는 없다. 한국에서 고전기 일본 작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경우는 구로사와나 오즈 감독 정도이고,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선 구석이 많다. 여전히 감독의 대표작은 <스물네개의 눈동자>와 <나라야마 부시코> 에서 더 거론되지 않고 있다.

사실 그의 정체는 자국 일본에서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거장 감독이었다. 코미디부터 전쟁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성공적으로 구현했지만, 기본적으로 여린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여성 드라마에 강점을 가진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1943년에 로맨스 / 코미디 장르인 <꽃피는 항구>로 일본 쇼치쿠 영화사에서 데뷔했고, '영화계 동기 감독' 으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가 있다. 도호 영화사에서 유도 액션 장르인 <스가타 산시로> 로 데뷔한 그는 기노시타 게이스케와 감독 데뷔한 해, 타계한 해가 같다. 두 명감독은 영화계 생활을 하면서 각자 크나큰 좌절감을 한 번씩 겪었다. 사람이 살면서 좌절 겪지 않는 경우가 어딨겠냐만, 두 사람의 경우에는 이 바닥 생활 접을뻔 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60대 즈음 넘어섰을 때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 말하자면 인생을 아예 접으려 한거지. 그리고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청운의 꿈을 품고 감독 데뷔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영화인생 접을 뻔한 일이 생긴다. 44년작이자 네번째 감독작인 <육군> 때문이었다.

* <육군>은 배우 류 치슈와 다나카 기누요가 부부 연기를 하는 흔치 않은 조합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감독은 쇼치쿠 영화사의 고용감독으로서 1944년에 두 편의 전쟁 관련 작품들을 만들었다. <육군>은 일본 육군성의 의뢰(라고 쓰고 명령으로 읽는게 나을 듯.) 를 받아 '대동아 전쟁 3주년' 을 기념하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경우였다. 일본에 의해 서양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독립한 아시아의 국가들이 일본과 함께 자급자족이 가능한 단일체제를 만들어 평화와 공동 번영을 모색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질서인 '대동아공영' 을 수호하고자 미국, 영국과 벌이는 전쟁. 대동아 전쟁. ...그들만의 정의이자 설명이다. 어쨌든 감독은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 제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최종결과물은 육군성의 의도대로 만들어지는 척 하다 <유주얼 서스펙트> 급으로 통수를 치는 형태가 됐다.

<육군>의 상영시간은 1시간 27분이다. 그러나 국가지원작답게 몇 대에 걸쳐 7~80년간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큰 스케일을 보여준다. 작품은 1866년의 시간대에서 시작하여 전당포를 운영하는 다카키 일가 (그 다카키 일가 말고.) 의 인생사를 바라본다. 외세 침략과 국가 내부의 분란으로 한창 시끌시끌할 때, 다카키 일가는 우연한 계기로 부상당한 무사를 치료해주게 된다. 무사는 치료를 받고도 다시 전장에 나서는데, <대일본사>라는 책을 주며 이것을 소중히 여겨달라는 유언 겸 부탁을 남긴다. 어찌보면 그 때 다카키 일가의 어린 아들이었던 다카키 도모조노가 이 상황을 본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역사를 다룬 책, 그걸 맡기고 전장으로 나가는 무사의 모습에서 자국민으로서의 어떤 의식이 형성됐을지도 모를 일이지. 문제는 다카키 도모조노가 훗날 자국이 외국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던 시기에도 이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제 작품은 청일전쟁 시기, <대일본사>와 전당포 가업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된 다카키 도모조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일본이 외세의 압력으로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에 항의하러 도쿄로 홀로 갔다가, 홧병인지 모를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그는 문병 온 아들 도모히코로부터 육사에 가겠다는 다짐을 기어이 받아내고는 죽는다. 여기까지가 <육군>의 초반 20여분 분량이다. 작품이 '국책영화' 임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순간이다.

구견서 교수가 지은 <일본영화와 시대성> 이란 책에는 국책 영화의 정의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지 않고 적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절대 '전쟁의 비극'을 논하지 않는 영화.'

<육군>은 제목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이 모두 육군에 자원입대 하길 바라는 작품이다. 은연 중에 당시 중국을 적으로 삼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사실 작품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 보다는 그냥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이 모든 풍경은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무척 기괴하다. 아버지는 병문안 온 아들에게 일왕의 동상 앞에서 절을 하고 오는 게 순서 아니냐며 윽박지른다. 아버지는 죽어가는데, 아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일왕의 동상을 향해 절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일본에서 익숙하게 만들어 졌던 국책 영화들이었다.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고 애꿏은 국민들을 사지로 내보내고 있는 최악의 범죄를 시작부터 끝까지 외면하는 것 말이다. <육군>은 이 지점까지는 분명 일반적인 '일본의 국책영화' 의 탈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후부터 작품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사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애국심을 열심히 설파했다만, 중일전쟁 부분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쟁 시퀀스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 이상하긴 했다. 주인공의 자리도 도모조노의 아들인 도모히코에게로 넘어간다. 그런데 작품은 도모히코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황군의 교육을 받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등의 전개를 아예 생략시킨다. 대신 그가 참전 중에 부상을 입어 전군이 귀향할 때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잘 된 일이라는 동료의 위료를 받지만, 거기서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퇴원하고 돌아온 후 작품은 도모히코를 중심으로, 그가 전당포를 닫고 매일매일 '애국의 정신' 으로 아내인 와카와 아들 신타로를 챙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군인 이전에 혹시 그 때 참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 일종의 컴플렉스처럼 작용하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도모히코는 전쟁과 국가에 관하여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일단 화부터 내고, 이런 태도때문에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육군>은 '전시' 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일상의 삶과 당연히 부조화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만약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삶의 태도로 체화한 사람이라면, 부조화의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다. 도모히코의 퇴원을 기점으로 작품은 참전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 대신 가족 드라마의 색채가 점점 더 많이 가미된다.

그러다 작품에서 굉장히 이상하게 여겨지는 시퀀스가 불현듯 툭 튀어나오온다. 시간이 흐르고 도모히코는 사쿠라기라는 사람과 친해져 그와 함께 동업을 한다. 두 사람의 아들들도 성장하여 입대를 하는데, 사쿠라기의 아들이 먼저 중국 상하이의 전장에 나가게 된다. 왜 전장에 나가지 못했냐며 자신의 아들에게 꾸중하는 도모히코와 해맑게 아들의 입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쿠라기. 그런데 어느 날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쿠라기는 상하이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다가 아들의 생사여부를 알게 된다. 작품은 이 때 사쿠라기의 표정이 웃음에서 절망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시퀀스는 무척 이상하다. 시종일관 등장인물들이 전국 애국심 자랑을 하는 국책영화에서 불안이 드리워지는 순간을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얼굴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진 뒤에야 다음 쇼트로 넘어간다. 넘어간 쇼트에서는 다시 국책영화의 색깔을 찾는다. 사쿠라기는 상대방에게 애국이 우선인데 자식 걱정을 하고 있느냐는 꾸중을 듣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도모히코가 사쿠라기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그와 대화를 나눈다. 사쿠라기는 마침내 웃음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 한다.

작품에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사쿠라기의 절망적인 표정, 바로 뒤이어 방문한 도모히코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쇼트 간의 감정선은 전혀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것이다. 작품이 이야기와 정서의 통일성과 자연스러움을 생각했다면 사쿠라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롱 테이크를 없애거나 줄이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러나 <육군>은 부자연스러움을 각오하고 이어지지 않는 감정선을 그대로 본편에 이야기 순서대로 배치해 놓았다. 작품은 본편 자체의 완성도에 영향을 받을지라도, 자식이 죽었는데 당연히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절망이 먼저 묘사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어떻게 보면 애국심이 꼭 가족과 개인의 행복만을 압도하고 있지 않다는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다. 갑자기 불편한 감정의 균열이 커다랗게 잠시 얼굴을 슥 들이밀고는 사라진다. 마치 충격효과처럼 말이다.

이제 <육군>을 감상하는 경험은 결코 행복하거나 뿌듯하지 않다. 작품이 후반을 향해 갈수록 국가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는 사람들을 보며 위대하다고 느끼거나, 본받고 싶다는 열망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되려 염려와 의문만 가중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신타로마저 전장에 나가게 된다. 당시의 국책영화들은 이럴 때 최선을 다해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육군> 역시 전쟁에 참전하는 아들을 향해 자랑스럽다며 떳떳하게 전사하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저런 가족끼리 전사 운운하고 있을 때, 하필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를 안마해주고 있는 중이다.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더이상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를텐데 저런 말이 나올까. 작품은 이런 대사를 하고 난 뒤 한없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망의 다음날 아침이 된다. 작품은 주로 대부분 아버지인 도모히코를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 마지막 10분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인 와카의 시선이 주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신타로는 일찌감치 군부대의 행렬에 합류한 상태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러 나가있다. 와카는 나가서 행렬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가지 않는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마음이 바뀌어 행렬을 구경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카메라는 그 때까지도 보존되어 있던 <대일본사> 책을 비춰주고, 와카는 혼자 텅 빈 거리를 다급하게 달려간다.

<육군>의 마지막 10분은 사실 이렇게 끄적여서 다룬다는 것이 애초에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끄적여서 풀어야 하는 것이 현재 리뷰를 끄적대는 내가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결말부만큼은 영상으로 보는게 가장 좋지 않겠나 싶다.

작품의 마지막 시퀀스는 사실 육군성에서 굉장히 신경을 쓴 결과물이었다. 자신들이 의뢰를 했으니 관여를 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서도. 그들은 마지막에 삽입된 음악도 직접 골랐으며, 심지어 여기서 등장하는 군부대의 행렬은 실제의 것을 찍었다. 당연하게도 이 날 카메라에 찍힌 병사들 대부분은 전장에서 전사했다. 작품은 촬영 당시 최대한의 환호를 담아 전송하는 결말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묘사는 아들은 웃으며 사지로 나가고, 어머니는 애써 웃어 보려 하지만 결국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 작품 내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는 끼어들 틈이 없다. 당장 사지로 나가는 아들을 잡아 이끌어 집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들이 자초한 선택도 있지만, 당시의 국가적 시스템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을테니까. 와카는 그렇게 지금, 여태껏 애쓰며 만들어온 가족이라는 세상이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예감하고 있다.

시사회를 통해 작품을 본 육군성은 '나약하기 그지 없는 감독이 만든 부적합한 작품' 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전쟁 기념하라고 만들었는데 이걸 보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냐고! (이 작품을 감상했을 당시의 일본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참 궁금해진다.) 어찌어찌 통과되어 결국 상영은 했다만, 결국 감독은 1945년까지 계속 육군 정보국의 감시를 받으며, 영화 활동을 강제 금지 당하는 수난을 당한다. 촬영준비 중이었던 차기작 제작 역시 취소됐다. 다음 해 8월, 일본은 두 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패전한 뒤에야 감독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 때 일본의 침략지배를 받고 있었던 국가들도 모두 해방의 기쁨을 맛봤음은 물론이다. 자주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국 역시 그랬다.

* 결말부에서 보여주는 다나카 기누요의 '혼 빠진 연기' 는 가히 압권이다.

문득 생각해본다.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정치사상적으로다가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가졌다고 여길 수 있을까? 최소한 이 작품에서 그런 모습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소신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현실을 이야기 하는데 무리가 없음을 관객에게 증명해주고 있다.

<육군>은 국책영화의 탈을 쓰고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작품은 국책의 세뇌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정신을, 혹은 가족 간의 역사와 유대관계를 어디까지 파탄낼 수 있을지를 다루기 위해 국책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한다. 덕분에 작품은 <의지의 승리>의 길을 피해가고, 국가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하고 질문을 한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국가 속 국민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작품은 아무리 국가가 전쟁을 강요했다고 할지라도 자식이 사지로 나가 죽는 걸 좋아하는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인간적인 믿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광기에 물들어 가족애마저 잃어가는 그 때의 자국을 진정으로 염려하고 있다. 그것도 일본이 패전 선언하기 1년 전인 1944년. 일본이 일왕을 대표로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서 자국과 침략한 국가들을 향해 마지막 발광을 하던 그 엄혹한 시대에 말이다. 이런 걱정을 하고도 무사할 리가 없지...

* 비정상적이었던 시대에 대해 '최소한의 의심' 이 없이 영화를 만들면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악명높은 나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인 <의지의 승리> 같은 작품들이 나오게 되는 법이다. (덕분에 <의지의 승리>는 공포 장르로서 대하면 최고의 걸작이 된다.)

마지막으로, <육군>을 복기하면서 문득 한국의 현 정부는 일제강점기, 혹은 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되돌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그래. 올 해는 무려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광복 70주년' 이 아니던가. 서울 청계천에서는 광복절 대신 '건국절 기념식' 이 열렸다. 독립운동가들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지 오래고, 그 후손들은 셋방살이와 들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번들거리는 얼굴을 드러내며 떵떵거리고 산다. 현 대통령의 여동생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대해 '하지 않는게 패륜' 이라며, 일본에게 위안부 만행 관련 사과를 요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도 덧붙인다. 사지로 끌려가 비참한 성적 추행을 당했던 딸들을 위로하는 소녀상 주변에는 어버이 연합이 버린 쓰레기와 잿더미만이 남아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대통령의 축사는 '정부수립 67주년' 대신 '건국 67주년' 을 운운하는 발언이 담겨져 있었다.

'일본 육군성이 후원한 대동아 전쟁 3주년 기념 영화' 인 <육군>을 보고 난 후에 현재 한국의 과거인식과 현실을 생각해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함이 느껴졌다. 그 처참함은...현재의 한국 정부가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1940년대 당시에 자국과 세상을 바라봤던 태도보다 훨씬 못한 방식으로 과거를 대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p.s.

1) 만약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감독 활동이 금지되지 않았다면, 차기작은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역시 일본 육군성의 후원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엎어졌지만 만약 만들어 졌다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가미카제 영화가 당시에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사실 이전에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에서 <육군> 같은 작품이 한 편 더 나왔었다. 바로 가메이 후미오, 미키 시게루 감독의 <싸우는 군대> 라는 37년작 다큐멘터리다. (<전투병> 이라고도 불린다.) 역시 육군성이 프로파간다 용으로 써먹으려고 두 감독에게 전선에 나가서 찍어보라고 의뢰한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가서 전쟁을 치루고 녹초가 된 병사들의 모습을 열심히 찍어댔다. 그리고 일본군 찍으라고 준 카메라로 당시 그들을 피하기 위해 피난 가던 중국의 농민들을 찍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일본군이 물러난 뒤 다시 돌아와 토지를 새로 경작하는 모습을 더 관심있게 담았다. 가메이 후미오와 미키 시게루는 일본군이 아무리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농민들은 거기서 재건을 해낸다는 사실에 더 흥미를 느낀 것이다.

결국 가메이 후미오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이 시작될 때 쯤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당시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체포된 사람이었고, 장수돌침대 워너비 하듯 별을 달았다. 1년간 큰집 살이를 했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싸우는 군대>는 가메이 후미오가 육군성으로부터 세번째로 의뢰받아 찍은 작품이었다. 근데 감독은 그 전에 의뢰받았던 <상하이>와 <북경> 이란 다큐멘터리도 <싸우는 군대>와 비슷한 스타일로 만든 바 있다.

...결론은 당시 일본 육군성이 멍청했다는 얘기다. 츤데레는 절대 아닌 거 같은데, 그들 '덕분에' 괜찮은 작품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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