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작은 균열이 초래한 생의 파탄 : 엠마뉴엘 카레르, <콧수염> 열린책들

인생은 정말 우연의 산물일까? 일생을 통해 구축해 온 자기정체성이란 다만 이미지메이킹에 따른 혼자만의 착란일 것인가? 소설 '콧수염'은 작가가 밝혔듯,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간 한 번도 베지 않고 조심스레 길러온 콧수염을 아내를 놀라게 하기 위한 이벤트의 제물로 깎아버린 주인공은, 그뒤로 삶이 크게 뒤틀린다. 감탄과 경악을 기대했던 그의 ’콧수염깎기’는 궁극적으로 그의 삶을 깎아버린다. ’당신에겐 원래 콧수염이 없었어’ 라고 울며 소리치는 아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는 직장 동료들,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존재의 증거들. 주인공이 들었던 면도칼은 수염에서 시작하여 그의 목숨으로 향한다. 정체성의 혼란은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고 해외로 도피하게 만들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곳에서도 그를 편안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엠마뉴엘 카레르 소설의 미덕은 <겨울아이>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뛰어난 구성의 직조에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장엄한 대미를 향해 한걸음씩, 조명을 조금씩 밝히면서 끝으로 다가가는 그의 글솜씨는 그가 소설에 있어 얼마나 잔혹한 장인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절대로 모든 것을 다 얘기해 주지 않는다. 영화의 미장센 기법처럼,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과 상황, 소도구들을 통하여 진실-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나 그 누구도 피할 수는 없는-에 접근하게 만든다. 그는 현실을 신뢰하지 않는 작가이다. 일상이 만드는 모든 관계, 상대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확신 따위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거기서 일어나는 작은 균열이 얼마나 쉽게 생을 파탄시킬 수 있는지 경고한다. 소설이란 비극의 게임이며, 그 게임 속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늘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카레르가 생각하는 현대인의 자기초상인 것이다; 미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 루카치는 그의 저작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레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떠밀려 가는 것이 소설이며 현대인의 인생’ 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실패의 확인이란 의미에서 엠마뉴엘 카레는 루카치의 제자이며, 세르반테스의 새로운 분파이기도 하다. 비극을 희극적으로 묘파하는 것, 묘사와 기법으로 같은 결과에 새로운 옷을 입혀 모호함과 당황스러움을 촉발한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그의 또다른 소설 <겨울아이>만큼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지는 않다. 중간중간 편집광적인 묘사와 독백이 결말을 예감하는 독자들에게 지루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50여 페이지를 넘기 시작하면 이 소설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읽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은 짧은 문장으로 쓰여진 만큼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과 추리를 유발시킨다. 인생은 우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우연은 대개 불행으로 치다를 때 아주 필연적 으로 작용한다. 적어도 엠마뉴엘 카레르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파탄은 하찮은 터럭 하나를 잘못 다루는 것에서부터도 시작될 수 있다고.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일상, 관계, 정체성 모두가 가짜라는 뜻이 된다. 본래 가치를 교환가치로 설정함으로써 시작된 이 비극적인 현대사회, 그 치명적인 함정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가? <콧수염>은 줄 것이다. 당신이 부정하면서도 살짝 훔쳐보고 싶은 그 공포를.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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