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기억 나시나요?

"스무살까지만? 이건 또 무슨 중2병 허세야."

제목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당연스레 찾아오는 스무살의 봄이 너무도 간절했던 열일곱 소녀가 있습니다.

1989년, 가수 김창완이 진행하는 라디오 '꿈과 음악 사이'에 도착한 편지 한 장

아저씨 살고 싶다는 말은 안하겠어요. 단지 조금만, 조금만 더 오래 있고 싶어요.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직 난 너무 어리잖아요, 이렇게 어린데, 조금만 더 이 세상에서 섞여 있고 싶어요.

열두살 때부터 골수암을 앓았던 열일곱 소녀 초희,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초희는 굳어가는 몸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어 평소 좋아하던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에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아저씨 전 제 앞에 놓인 셋째 언니의 등록금을 보고 울 수 밖에 없었어요. 스물 다섯의 나이에 아직도 대학교 3학년인 언니가 애써서 번 등록금을 또 내 약값으로 내놓았어요. 3년 전 막내언니가 내 수술비가 모자라서 대학을 안가고 회사에 취직해서 여태껏 약값을 대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나 미안한데, 셋째 언니가 나로 인해 벌써 3번째 휴학을 했어요.

언니들에게 난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데, 내게 주기만 하는 언니들이 고마워요. 아저씨, 이 세상에 우리 언니들만큼 착한 사람들은 없을 거예요. 오늘밤, 언니들이 잠들면 살짝 뽀뽀해주고 말할거예요. “고마워 언니” 하고

초희에겐 네 명의 언니가 있습니다. 막내의 오랜 병원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언니들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초희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 집이 부자였음 좋겠어요. 아직도 눈물이 나와요. 온 몸에 있는 물이 오늘, 전부 다 눈물로 변해버렸나봐요. 값이 너무 비싸 다시 가질 수 없을 것 같던 휠체어에 다시 앉은 기분은 고마움보단 슬픔이었어요.

부서진 휠체어 때문에 어쩜 아빠와 형부는 담배를 끊었을지도

언니들은 걸어 다녔을지도 몰라요.

아저씨, 모두들 내가 안타까운가봐요.

열두살때인가, 첫 번째 수술 받은 뒤 길어야 5년이라던 의사 선생님 말이 남의 일 같았는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지금은 사실 무서워요. 하루하루 희미하게 사는 내가 나이를 먹는게 식구들에겐 슬픈가봐요. 엄마는 매년 오늘이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인지 부엌에서 나오지 않으세요. 소리죽여 우세요. 저녁 때 빨간 엄마 눈 주위가 참 슬퍼요.

아저씨

오늘 생일이었어요.

엄지 손톱이 빠져 버렸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한줌씩 빠지는 머리카락 처럼 손톱이 스르르 빠져버렸습니다. 빠진 손톱을 보니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달 전 "초희는 자신이 죽는다는걸 느끼지?" 하고 말씀해 주시던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귓 가에서 뱅뱅 돌았습니다. 빠진 손톱은 하얀 가제 손수건에 잘싸서 일기장 껍질에 넣었습니다. 약병의 약을 모두 쏟아 다른 가제 손수건에 싸서 역시 같은 곳에 넣어 두었습니다. 빠진 손톱이 왠지. 내 생명의 한토막 같아 무심히 휴지통에 버릴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해요. 옛날에는 죽는다는 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펑펑 났지만, 지금은 조금 밖에 안나요. 아저씨 사람은 꼭 오래 살아야 좋은 것은 아니지요? 오래살진 못해도 착하게, 곱게 짧게 살아도 그렇게 서운한 건 아니지요? 아저씨 수술을 한 다음 아빠가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번 수술은 얼마 없는 희망을 잡아보기 위해서 였고, 수술을 해도 내가 건강해 질 수는 없고 단지 조금 더 아프지 않게 얼마 안남은 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저는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차츰차츰 조여 오듯 마비되는 내 몸을 보며,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늘은 기침과 밤에 오는 통증들. 이 모든 것을 나 아닌 어떤 사람이 알 수 있겠어요.

아저씨. 전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그저 단지 서운할 뿐이에요. 처음 얼마는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지만 이젠 안 그래요. 왜냐하면, 더 이상 식구들을 괴롭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에요. 아저씨 살고 싶다는 말은 안하겠어요. 단지 조금만, 조금만 더 오래 있고 싶어요.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직 난 너무 어리잖아요, 이렇게 어린데, 조금만 더 이 세상에서 섞여 있고 싶어요.

스무살 까지만 살고 싶다던 초희

늘 담담하게 초희의 편지를 읽던 김창완은 이런 글을 남깁니다.

묘한 편지다.

진통제를 먹으면서 썼다는 편지.

여기저기 약 냄새가 풍기는데 그리 역하지 않다.

풀내음이랄까?

병이 다 나으면 그리고 봄이 되면 창 넓은 까페에 데려가고 싶다.

왠지 요즘은 하루하루 뭔지 모를 끈이 제목을 졸라오는것 같이 답답해요. 거울을 봐도 나 아닌 딴 사람이 서있어요. 난 그애가 누군지 몰라요. 나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몸짓을 따라 해요. 소름이 끼쳐요. 그 거울속의 모습이 바로 저였어요. 하얗다 못해 파란 얼굴 퀭하니 큰 두 눈 붉은색이 거의 없는 하얗게 부르튼 입술. 깡 마른 몸. 빗질만 해도 한줌씩 빠지는 머리카락. 난 싫어요. 이런 모습이 내가 정말로 싫어요. 거울을 깨버리고 싶었어요. 온 집안의 거울을 모조리 다 깨버리고 싶었어요. 아니. 차라리 내 눈이 안보였음 좋겠어요.

아저씨, 미칠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번씩 다치고 싶어요. 난 죽어 가고 있는게 싫어요. 지금 난 피어나야 하는 나이 라는데... 난 100살까지 살고 싶단 말이에요. 불공평해요. 난 처음부터 엉망이었어요. 그리고, 끝도 이렇게 엉망이 되어가고 있어요. 난 착했다고는 할수 없어도, 나쁘지도 않았어요.

아저씨, 미안해요, 아저씨한테 짜증아닌 짜증을 낸거 같아요. 하지만 아저씨 나 이런 얘기를 아저씨 한테 밖에 할수가 없어요. 식구들 한테는 정말로 할수 없어요. 내가 이런걸 알면 엄만 또 우실거에요. 왜 내가 이런지 모르겠어요. 신경이 날카로워 있어서 그런가 봐요. 이러면 안된다는것 희야도 잘 알아요. 다신 안 그럴거에요. 피곤해요 예전보다 더 쉽게 피곤해져요. 힘이 드는 생활이지만. 너무 오래 병에 끌려다녀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지만.

아저씨. 그래도 난 날 미워하지 말아야 겠죠?

하지만 초희의 몸은 편지를 쓰기 힘들 정도로 점점 나빠집니다.

아저씨. 만약 제가 세상의 사랑을 반 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세모난 유리병에 꼭꽉 눌러 담아서 아저씨께 보내고 싶어요. 색칠을 해서 보내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 사랑은 조금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아저씨께 보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조금밖에 없는 사랑을 아저씨께 보내고 나면 전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

아저씨.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아저씨께도 제가 가진 사랑을 나눠드릴께요. 지금 열심히 사랑을 저금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하며, 사랑을 나눠주고 싶어했던 소녀

하나, 위 그림은 '꿈과 음악 사이'에서 사는 아기 천사예요.

둘, 편지 다 쓴 뒤 읽어 봤는데 난 참 버릇없는 애예요. 항상 첫 인사를 빼먹거든요. 다음부턴 꼭 쓸게요.

초희는 끝내 스무살이 되지 못하고 열여덟살이 되던 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초희가 그린 아기 천사 그림처럼 그녀도 예쁜 천사가 되었겠죠?

민초희

우울 할땐

우울할땐 노래를 해요.

가사가 틀려도 괜찮고, 음이 틀려도 괜찮아요.

목이 쉬도록 노래를 해도 기분이 우울할땐

그림을 그려요.

아기 공룡 둘리. 꼬마 강시. 쫄고 있는 스누피.

스케치북 하나에 가득차도록 그림을 그려도 우울할땐

그 땐

울어버려요

울고, 울고 또 울고 나면 조금은 우울한게 없어지지요.

그다음은 잠을 자요

잠을 자면 꿈을 꾸고

꿈을 꾸면 나는 걸울수도 있고, 머리가 많이 빠지지도 않은

평범한 열일곱살의 여자아이에요.

꿈에서 깨면,

잠에서 깨어나면,

현실.

다리는 굳어져 있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켤코 평범하지 않은 여자아이에요.

다시 우울해져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민초희

기도

하늘이시여, 아버지시여

여기 보잘것없이 꺼져가는 생명하나 당신께 바칩니다.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그러나, 착하게 살려 노력했던 소녀 하나가 당신께 천천히 생명을 바칩니다.

아쉽다고 말하기엔 꽉찬것 같고, 꽉찼다고 하기엔 너무 모자란 듯한 내 열일곱해

아버지시여

그 열일곱해를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한번도 내 것이라 느껴보지 못한 내 삶을 주인인 당신께 드립니다.

아버지시여.

어릴적 엄마 품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당신의 모습이 전 아름답다 느꼈습니다.

나도 당신에게 속할 수 있는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그런 나의 생명을 영원히 당신에게 바칩니다.

난, 서럽지 않습니다.

단지 영원을 위해 영혼을 들이마신 것 뿐입니다.

아버지시여. 내 열일곱해 고스란히 당신에게 바치니

내 몫일지도 모를 남는 생이 있다면

천진한 어린 양들에게 고루 뿌려 주소서.

문득 어릴적 읽었던 책이 떠올라 카드를 썼습니다. 이제 막 피어날 어린 나이부터 병마와 싸우느라 힘들었을텐데 슬퍼할 가족들을 먼저 생각한 착한 소녀.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숭고한 10대 소녀의 마음이 어느덧 어른이 된 저를 반성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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