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잘 건네는 슈퍼카

# Intro

“집 떠나면 고생”이란 상투어는 엉뚱한 소리가 아니다. travail(영어: 고생, 고역 / 프랑스어: 일; 직업; 노동)은 travel의 어원이다. 여행의 본질은 이동이다. 이동 과정의 질은 항로와 교통수단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스포츠에 빗대는 여러 맥락이 있다. 축구로 삶을 논할 때 이동 문제를 빼기 어려울 것이

다. 이동을 방해하는 수비 전술이 진보하는 만큼 탈압박과 부분 전술이 발전해온 게 축구사의 거시적인 얼개 아닌가. 목적지는 보통 상대 골문 18야드 안이고 가장 빠른 길은 골키퍼에게서 나온다. 제대로 공을 건넬 경우 가장 뒤에 있는 그가 연 길이 제일 빠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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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지대 후벼 파기

축구는 상대적인 스포츠다. 진정 골문으로의 공 투입보다 중요한 이동은 골을 넣을 지름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다. 수비수와 미드필더 사이로 보낸 킥은 상대를 곤란케 한다.

1.

김승규가 보낸 킥은 포항 3~4선 사이를 가른다. 따르따가 포항 골대를 정면으로 바라보진 못해도 상대 선수 없는 오른쪽 측면으로 볼을 받도록 도왔다. 효율적인 역습 전개다.

2.

티톤의 슈투트가르트는 이날 맨시티를 4 대 2로 대파한다. 친선경기라 승리에 큰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우나 그의 킥 수준은 높다. 어시스트를 기록한 2선의 선수의 헤더보다, 티톤 골키퍼가 그 선수에게 공을 줄 거란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손발을 맞추는 소통 과정이 친선경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부분전술은 감독 머릿속에 기분 좋게 남았을 것이다.

3.

꼭 킥을 중앙으로 보낼 필요는 없다. 상대 3~4선 사이 공간이 정해진 공식 코스도 아니다. 상대 진형 세로 열 ‘사이’에 집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볼 받는 동료와 수비수의 1대1 경합 능력, 공 받을 동료 근처의 다른 동료 배치 등은 때로 ‘중앙 사잇길’보다 효율적이다. 좋은 예가 여기에 있다. 이 장면 뒤 애슐리 영은 동점골을 넣어 4 대 2 역전승의 물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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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공간으로 뿌리는 선물

“유럽 항해인들은 조만간 지구 전반적으로 유사한 풍향 체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략) 북위 20도와 남위 20도에서는 동쪽에서 적도 방향으로 강한 무역풍이 분다(즉 북쪽에서는 북동풍, 남쪽에서는 남동풍이 된다). 그리고 적도로부터 더 멀어져서 북위 그리고 남위 40-60도 사이에는 서풍이 분다. 15세기 중엽에 포르투갈 선원들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이런 사실들을 알아냈고 곧 남반구에서 유사한 패턴을 확인했다(『대항해시대』).”

길게 찬 킥은 튄다. 공이 바람을 등질수록 추진력이 강해진다. 공 떨어진 곳이 받는 선수 발 근처라도 한 번 튄 뒤엔 가속이 붙는다. 따라서 공격수 앞공간이 트여 수비수가 순간적으로 따라잡기 어려워진다.

바람은 자연이, 골킥은 인간이 하는 일이란 차이가 있으나 받는 선수에게 작용하는 본질은 비슷하다. 곧 이동시킨 대상에게 적용될 가속력의 원리를 미리 알고 있을수록 편하게 대처할 수 있단 점이 그렇다. 긴 킥 뒤 바운드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선수에게 이 볼은, 터치하기 어려운 짐이 아니다. 잡기만 하면 90분 내내 골치 아프게 따라붙는 수비수를 단숨에 제치게 도와주는 고마운 무역풍이다.

4.

글에서 제시한 골키퍼의 여러 운반행위 중 킥 자체의 순도(단순한 킥의 질로만 따지기 어려운 ‘상황의 산물’에 관해선 뒤에 서술할 것이다)가 가장 높은 장면이다. 접전 중인 후반 막판에 문전 앞 1대1 상황을 단숨에 공격수에게 선물해서다. 공격수는 골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쉽게 상체를 틀고, 앞공간을 공짜로 얻는다. 여지없이 슛을 때린다. 볼 받은 선수는 6월 평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골을 넣은 스탠포드 대 다니는 선수, 조던 모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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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리한 두뇌가 진짜 슈퍼카

‘돌역습’은 매력있다. 가슴팍 끝을 시원하게 툭 친다. ‘경기 상황’은 진정 묵직한 역습을 빚도록 도운다. 영리한 골키퍼는 유리한 상황을 빨리 파악한다.

5.

“위기는 곧 기회”란 말은 값싼 상투어가 아니다. ‘위기’의 ‘기(機 · 틀 기)’ 자는 ‘기회’의 그것(機)에 똑같이 쓰는 말이다. 말장난일 수는 있어도 터무니없지는 않다. 전남은 홈팀 인천에 이 말의 속뜻을 깨우쳐준다. 빨리 킥을 시도한 김병지의 의도는 나무랄 데 없으나 코스는 차선을 취한다(최선은 좌측면이었다). 판단 실수를 하지만, 전남 선수 두 명과 인천 선수 한 명 삼각형 사이에 정확히 볼을 보낸 기술은 놀랍다. 이후 전남이 무난히 골을 넣는다.

6.

모나코의 수바시치다. 8강 1차전 중반부에 원정에서 0 대 0으로 비기고 있다. 수세에 몰리다 적진으로 파고드는 카라스코가 보인다. 기회 하나하나가 아까워 빨리 공을 줘야 한다. 그런데 킥에 폴로 스루 쓸 시간과 빗나갈 위험 가능성을 재는 건 뇌로 판단한 뒤에야 가능하다. 판단하지 않고 무심코 볼을 차면 패스성공률은 낮아질 것이다. 그는 어려운 판단을 해낸다. 던지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강해 보인다. 성급하지 않은 판단이 슛 기회를 더 빠르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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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크 관리가 우선일 땐 후방 빌드업

후방 빌드업은 분명 길을 돌아가는 행동이다. 단단한 종아리와 담력을 갖춘 골키퍼라면 냅다 길게 찰 수 있는 볼을 후방에 묶어둬서다. 그런데도 후방에 ‘짧은 뜬공’을 날리는 이유는 뜬공은 숏패스보다 빠르면서(혹은 땅볼 패스를 하기 어려운 상황을 탈압박하도록 도우면서) 긴 킥보다 성공률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뺏긴 볼을 다시 찾으려면 동료 10명이 바쁘게 뛰어다녀도 분을 넘길 때가 많다. 그 1분을 생각해보면 후방 빌드업은 경제적인 행위다.

7.

단판 결승에서 선취골을 넣은 팀 골키퍼가 상대 공격수의 압박을 대비하는 건 당연하다. 그냥 볼을 안 뺏기는 차원이 아니라 편히 숏패스 하기 어려운 상황의 대안도 고려해두어야 한다. 슈테겐은 좌측면을 봉쇄한 상대를 의식해 전방 미들 써드(경기장을 세로로 삼등분했을 때 중앙 지역)로 볼을 급히 차내지 않는다. 볼 소유권보다 중요한 배짱 싸움에서 지지 않은 것이다.

8.

패스 선택권이 다양해진 이 장면을 보자. 3선 중앙의 부스케츠, 우측면의 알베스에게 패스할 수 있다. 그러나 피를로, 포그바보다 동료와 더 멀리 떨어진 마르키시오 쪽이 덜 위험하다는 걸 슈테겐은 안다(부스케츠와 피를로의 거리도 멀어 보인다. 하지만 중앙으로 볼을 주면 부스케츠는 상대 골문 쪽으로 등을 돌려야 할 것이다. 설령 부스케츠가 자기 골대 쪽을 바라본 채 마스체라노나 슈테겐에게 백패스를 해도 이는 상대가 수비진을 정돈할 시간만 주는 꼴이 될 것이다).

# Finishing

“중앙타(centerline rudder)의 설치는 비유하자면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앞으로 나아가는 향방을 조절하는 키의 구실을 한다(두산백과))가 완성된 것과 같다, 『대항해시대』.”

15세기 서유럽 사람들은 북유럽 코그(cog) 선 속 지혜를 배웠다. 배 가장자리에만 놓여있던 노를 중앙에 설치(에탕보 키 · gouvernail d’etambot)해 조종성을 개선했다. 지붕 위에 판재를 겹쳐 방수 효과를 키웠다. 이슬람계로부터 배운 삼각범(파도가 자주 치는 지역에서 돛의 방향을 신속히 바꾸는 데 유리함)까지 합친 세 요소로 카라벨 선을 개발했다. 배는 ‘이베리아의 보석’이라 불리며 대서양과 인도양 항해를 도왔다(“이 배는 북유럽과 남유럽의 결혼에서 잉태된 딸, 『대항해시대』.”). 배 중앙부에서 꼭대기까지 샅샅이 뒤져 기술 개발을 한 거다.

경기장 상하좌우 돌아가는 사정을 점검하기 가장 쉬운 선수는 골키퍼다. 골키퍼는, 건넬 볼의 길이와 강도, 코스를 자유롭게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주지하듯 현대 축구 분석 키워드는 온통 ‘상대 골문까지 이동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쏠려 있다. 똑똑한 골키퍼가 건넨 볼은 빠르다.

볼 운반능력이 좋은 골키퍼는 역설적으로 최후방에서 사기(使氣) 진작의 첨병이 될 가능성도 크다. 축구는 인간이 하는 상대적인 종목이고, 인생을 논할 때 자주 쓰일 만큼 불확실한 파도다. 불확실한 상대성을 띠는 세상일 중 사기가 중요하지 않은 건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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