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하루키의 탄생

소설가는 현실을 그려내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것 말고 다른 현실성 있는 거대한 대안이 전멸한 이 시대의 제일 대표적인 작가 하루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작품이랑 실제 인생이 서로 아다리가 은근히 잘 맞아 떨어진다.

하루키가 최근 텔레그래프와 리터러리허브닷컴에 기고한 글을 보면 1978년 4월의 어느 날, 대낮에 야구장 외야석에 자리 깔고 맥주 한 잔 빨면서 야구 경기 보고 있는데 갑자기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근자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고 함.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하루키의 스타일이 플롯의 결말이나 인물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보류하는 챈들러와 도끼 성님을 즐겨 읽었던 하루키 본인의 취향 탓도 있겠지만 얘기 들어 보면 그가 삶에서 겪은 실제 체험 중에 그런 사건들이 진짜 많았던 것 같다. 재즈바 운영할 때 길바닥에서 마침 딱 필요했던 금액의 돈을 우연히 주웠다는 것도 그중 하나고.

하긴 스쳐 지나가면서 그냥 잊어 넘기느라 기억에 남지 않아서 그렇지 원래 삶에선 논리적인 전개보다 공교로운 사건들이 더 많지 않던가. 하루키 소설에는 체험성이라는 게 무지 중요한데 고가도로 비상 탈출 계단으로 나오니 시공간이 바뀌고 달이 두 개 뜨는 걸 목격하고 등등 그런데 그런 체험-증언의 문학적 순간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진지를 빨면 아예 상황 전체가 우스꽝스러워진다. 인생이라는 게 남이 살아 줄 수도 없는 거고 삶이라는 것도 원래 각자가 겪는(느끼는) 만큼까지만 삶인 거라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다루는 문학에서의 리얼리티라는 기준은 객관적으로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둥둥 떠다니는 거라능.

가령 폴 오스터는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숲 속에 놀러 갔다가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걸 목격한 기억의 영향으로 자신의 작품에서 무엇이 현실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근데 그거 가지고서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시비를 털면 이건 뭐 그냥 현피 신청 아닌가. 어린 시절의 폴 오스터를 덮쳤던 살벌한 죽음의 무작위성이 당시 그에게 부려 놓은 게 트라우마든 뭐든 간에 중요한 사실은 작가마다 리얼리티의 경계가 뒤틀린 지점들이 있고 그건 걍 말로 설명이 안 되는(설명할 필요도 없는) '체험'인 경우가 많다.

어릴 때는 하루키든 오스터든(가장 중요한 체호프도 포함해서) 처음 읽고 교훈 없는 이야기랑 애매하게 열려 있는 결말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삶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데. 이젠 그런 우연하고 돌발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에 조금씩 공감이 가고 리얼하다고도 느껴진다. 인생의 계획이랍시고 기껏 세워 봤자 1년도 못 가 비틀리는 건 이젠 익숙하고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떠나간 사랑 앞에 그 아픔이 납득은커녕 실감도 나지 않아 눈물도 안 나던 기억을 수 천 번 머릿속에 돌려 보면 그냥 이 현실에 대한 어떤 파악이나 설명 같은 것들을 완전히 포기해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무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허에 벌벌 떠는 인간이란 종족은 그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짓밟는 무뚝뚝한 세상의 가치중립성을 견디지 못하고 매사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원래 이 세계라는 건 먼지 같은 인간들의 만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살아가는 닝겐들은 저마다의 확신으로 각자의 삶을 밀어붙이니 그 결과는 당연히 번번이 기대와 어긋날 수밖에 없고, 세상에 대한 환멸로만 빠지지 않아도 다행일 정도로 잔인하게 무관심한 이 세상의 매커니즘과 그 필연적으로 불리한 게임판 위에서 모든 인간은 결국 반복적인 실패 기계들이다. 피츠제럴드를 애정하고 미국의 재즈 시대를 동경하는 하루키도 체호프를 자주 언급하는 건 그런 연관성에서다. (레이먼드 카버와 체호프로 이어지는 기계적인 문학 계보도를 봐도 하루키가 체호프랑 애초에 무관하진 않다.)

하루키의 최고작이라 의심치 않는 『1Q84』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풍부하게 암시하듯, 살다 보니 어쩌다 지금이 되는 거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끝에서 내가 무엇을 찾았느냐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만큼 변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콩가루가 펄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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