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배움은 일단 눈을 트이게 한 후, 그 다음엔 몸을 삼가게 만든다. 차후의 단계까지는 나는 알지 못하나 아마도 그 주변을 변화시키면서 작은 공동체 같은 걸 이루는 데 나아가지 않겠나 싶다. 장일순의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를 읽었다. 책 속의 글들은 대개 강연이고, 일부가 인터뷰인 현장 글모음이라서 이른바 '글맛'이 적다. 말과 글은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데, 이 책에서 장일순은 '글'이 아니라 '말'을 통해 자신이 평생 살아온 바를 전달한다. 거기에 예리한 문장이나 변증의 논리 같은 건 없으나 들어보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말들로 쉽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있는 섭리를 간명하게 갈파하는 데가 있다. 한 지역(원주)에서 평생을 살면서 지역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운동을 일치시켜 온 사람만이 가지는 진솔함도 보인다. 이 책이, 책으로서 큰 울림을 가지기는 어렵겠다 싶지만 이것이 본래 말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으로, 아주 생생히 전달되지 않았겠나 싶다.웬델 베리를 읽거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를 읽거나 이번처럼 장일순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들의 철학적 바탕에는 기독교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 종종 거슬릴 때가 있다. 생명의 연관성, 전지구적 유기성을 설명하면서 하느님-은혜-우주 이런 식의 직선적 세계관을 당연한 것으로 끼워넣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중 장일순의 글이 가장 기독교적인 냄새가 적었다. 그는 자주 동학과 불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겹쳐 바라본다. 그것은 장일순의 삶이 역사와 한 가지라는 것, 근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펼쳐져 왔는가를 더불어 살펴왔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만이 옳다거나, 제일 옳다거나 하지 않고 모자람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며, 함께 행복해지려는사람들만이 가지는 아주 특별한 장점, 너그러움이 아닌가 한다. 한살림은, 다른 생협과는 다르게 설탕이나 커피를 '공정무역'해 들여놓지 않는다. 아예 취급(판매)하지 않는다. 한살림은 그것을 '기호품', 그러니까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사치품'이라고 여긴다. 커피는 차로 설탕은 물엿이나 꿀로 대체한다. 수입해야 하는 물건은 매장에서 구할 수 없다. 예전엔 근해에서 많이 잡혔으나 이제는 그저 러시아에서만 잡히는 명태를 매장에서 판매하는 게 옳으냐 아니냐를 두고 한살림은 조합원들과 3년을 토론했다. 어쩌면 별 것도 아니라 할 수 있는 안건을 가지고 이렇게 살펴보고 저렇게 살펴보고 다시 또 놓친 것은 없는지 의견을 구하는 한살림의 자세는 긍정을 넘어 탄복할만 하다. 도시에서 살면서 부딪히는 아주 1차적인 질문; 더 안전한 것,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친환경 식품을 찾을 것인가? 에 대해 한살림의 대답은 다른 친환경 단체보다 훨씬 더 래디컬하다.그 근본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장일순과 한살림에 대해 알게 될 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 많다. 그는 또한 다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운동이란 이데올로기인가, 공동체인가? 싸운다는 것은 투쟁의 전방에 서는 것인가, 일상을 전장으로 바꾸는 일인가? 책읽기란 목적인가, 수단인가? 그가 뿌린 한 알이 내 안에서도 싹을 틔우기를 원한다. 쉽게 산다는 건 되는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이렇게나 잘 통용되도록 사는 일이리라.

"열다섯에 돌아가신 형의 상여에 할아버지가 흙바닥에서 넙죽 절을 하셔. 그러니까 '노제'지 그래서, '할아버지, 왜 손주에게 절을 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네 형이 이 세상에서는 내 손자였지만 이젠 세상을 달리 해 할아버지보다 앞서 가신 분이야. 그래서 잘 가시라고 말했다.' 당시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내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더군."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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