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K

연이은 영화제 일을 마치고 휴식과 여행을 겸해 제주도로 내려간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잘 도착했고, 용두암 부근에 묵고 있으며, 비가 내렸지만 재미나게 다니는 중이라고. 얼마 전에 섬에 가서 한 달 정도 있어보고 싶다면서 조언을 구하던 그니는 아직 20대다.

타향에서 한 달 간 홀로 씩씩하게 지내보려 한다는 그에게, 나는 네다섯 곳의 숙소와 그밖에 필요할 법한 몇 가지 팁을 일러주었다. 그러면서도 사실 걱정을 내려놓지는 못했는데, 이게 내 나이에 어울리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게 험해져 버렸다는 걸 가끔 실감하는 까닭이다. 워낙 똑똑하고 경우 바른 친구고 자기 앞가림이 확실한 사람이라 왠만한 일은 도움 없이도 잘 헤쳐나가겠지만 그래도 이 친구가 모험을 너무 즐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 한 자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니는, 역시, 평소대로, 또는 마치 익숙한 여행자처럼 섬에서의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었다. 지도 없이도 새로운 곳들을 두루 찾아다니고, 주위에 식당을 찾아보기 힘든 어느 여행지에서는 단체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의 지도교사로부터 여분의 주문도시락을 얻기도 했으며, 버스 기사분과 친해져 귤 한 봉지를 선물받곤 주전부리 삼아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우산이 없었는데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 동네 슈퍼에서 비옷을 사 입었다는 얘기를 듣고나니, 아 내가 노파심이 좀 많았구나 싶었다.

혼자 여행하면서 제일 힘든 점은, 다름아니라 심심함 또는 24시간 내내 이야기할 상대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일 것이다. 이후 그가 옮겨갈 곳이 게스트하우스라는 점에서 그런 부분이 상쇄될 여지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고독감이 제주도라고 해서 옅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일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로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을 K도 시나브로 알아가지 않을까.

이 땅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빡빡하니, 한 달 여 시간을 내서 어딘가를 여행하며 살아볼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의 선택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올바랐다는 걸 K가 청춘이 지난 뒤에도 그 잔영의 한 조각으로 제주에서의 시간을 소중하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전화를 끊기에 앞서, 그는 자신이 제주에 있을 때 내가 한 번 내려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 말은 내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풍경들을 새로이 불러일으켰던가. 사무실에서 단체 여행을 계획하면서 후보지로 제주를 세워놓고, 거기에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을 때도 나는 민망했던 한편 또 고마웠다. 그럼에도 내가, 업무가 아닌 개인적 이유로 제주를 찾아가는 일은 전에 썼던 것처럼 최소한 올해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제쳐놓지 못하고 있다. 더없이, 강렬히, 목마르게 섬을 찾고 싶지만, 여행으로 그러기에는 강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아프게 밟힌다.

마음에 형체가 있다면, 후배 K에게 보내고 싶다. 그와 함께 동자복, 서자복 미륵도 만나보고 곶자왈 지대에서 김밥을 먹으며, 오름의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떨어지는 담황색 노을을 바라보다, 바다를 앞에 놓고 한치회 한 접시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비우며 도란도란 수다떨 수 있도록.

그의 충만과 안전을 빈다. 거기서 내 몫까지 행복하기를.

* 제주의 이름모를 오름 중턱에서, KonicaMinolta Dynax 5D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