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이 우수한 동물, 인간

미국의 1950년대는 배신의 시대였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국의 공산 분자 색출은 소련과의 냉전 대립 속에서 발생한 자연스런 불안의 징후였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무나 마녀로 몰아가는 정치적 수단으로 오용되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가치 노선을 공유하던 동지 간에, 혹은 이웃이나 가족 사이에서도 근거 없이 서로를 공산주의자라 매도하고 밀고하는 배신이 횡행했다. (이때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로 찰리 채플린이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주인공 아이라 린골드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공산주의자다. 사회 곳곳의 노동 현장과 도시 밑바닥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펼치던 아이라는 당시 성우이자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이브 프레임과 결혼한다.

프롤레타리아적 기질의 공산주의 투사와 전형적인 부르주아 숙녀의 결혼이라니, 역시나 아이라-이브 부부의 집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콩가루가 날린다. 긴 시간 서로 울고불고 싸우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브가 아이라의 공산주의적 활동과 정보를 짜깁기해 대필로 완성한 책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출판되면서 막장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그 파국을 촉발하는 결정적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아이라는 그의 아내인 이브 말고 평소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주는 매춘부 ‘헬기’와 친하게 지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인 아이라는 평소에 그녀에게도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게 부를 빼앗아야 한다"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설명해 주곤 했는데, 이 단순무식한 헬기가 그걸 자기 식대로 받아들여 돈 많은 이브의 물건을 절도하다가 걸린 것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아이라-이브 부부의 파경에 뒤이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배신과 배신이 작품 결말 직전까지 빠르게 전개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 가장 멀리 떨어진 양 극단의 두 끄트머리가 서로 통한다는 말은 사실 모순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존재이기에, 사람들이 얽힌 이 세계에서는 극과 극이 실제로 통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굳이 프로이트의 초기 정신분석학 연구를 들춰보지 않아도 사촌의 토지 구입 소식에 배가 아파 본 경험을 통해 질투와 선망이 양가감정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첫 장을 펼쳐보지 않아도 끔찍이 아끼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살인 충동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무엇인가(혹은 누군가)가 제일 진지할 때 오히려 가장 우스꽝스러워지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거부감 없이 목격하며 살아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만큼 위대하고 진지하면서도, 또 동시에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것도 없다. 공산주의자 아이라는 평생을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며 살았지만, 그 숭고한 사상은 한 매춘부의 오독(誤讀)때문에 운명의 장난이라는 카운터 펀치로 돌아와 그를 회생 불가능한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닥친 1950년대라는 특수한 시공간적 배경을 살펴보면, 아이라의 인생에서 배신의 원흉은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삶을 배신의 지뢰밭으로 깔아 놓은 장본인은 '극과 극이 통하는'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숭고하고 영롱할 줄만 알았던 이데올로기가 한 순간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돌변해 자신의 삶을 짓밟아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이 소설에서 배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주인공 아이라 인생의 비극적 끝맺음을 가지고 시대 탓만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냥 "원래 사람 사는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말이 비록 자조적으로 들릴지라도, 아이라의 인생에서나 실제 우리의 삶에서나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의 이 작품은 일방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부작용만을 부각시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필립 로스는 아이라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자본의 탐욕과 거짓 술수가 승리한 '살아남은 미국'의 역겨운 치부를 매우 직설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종종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없어서는 안 될' 이데올로기의 존재 가치에 무게를 싣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액자소설의 프레임 바깥의 화자이자 아이라의 형인 머리 린골드의 입을 통해 결말에서 하나둘씩 튀어 나오는 여러 숨겨진 진실들은, 꼭 이데올로기라는 대의명분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살고 결국은 그 갖가지 망상들이 야기하는 배신의 망치로 두들겨 맞는 게 사람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준다.

역시 필립 로스의 문장은 믿음직하다. 독자의 마음에 물결을 좀 만들 법한 총알들을 주머니에 쟁여 놓고 타이밍 맞춰서 한두 개씩 흘리는 게 아니라, “나는 글을 쓸 테니 읽는 너희들은 알아서 주워섬겨라"라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듯 문장들이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간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에브리맨』과 『울분』에 이어 필립 로스와의 3번째 만남이었다. 그의 소설이 언제나 그랬듯 거의 모든 페이지에 묻어 있는 깊은 통찰들은 잔잔하면서 단단하다. 그것에 살을 붙인 문장들을 받아 적는 게 행복하다. 죽음을 변주해 삶을 그려 나가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지혜와 나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곤 한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읽고 이젠 확신이 든다. 시간을 재료로 지혜를 머금는 인간은, 노년이 우수한 동물이다.

콩가루가 펄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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