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마음이 바쁘니 시집을 읽는 게 힘겨워진다. 가장 얇은 부피이나 도저히 빨리 읽어낼 수 없는 책, 시집들. 산문에 다가가는 시절은 속도에 짓눌리는 한 때이기도 하다. 머리가 아닌 몸 안에 넣고 오래 되씹을 수 있는 여유는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박남준 하동에서 구례 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비바람 눈보라 치면 공치는 날이다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 휴게실이 있지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재첩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눈덩이 같던 빚도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빌어먹을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쓴 그 여자는 아저씨를 졸라 간이 휴게소 아래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 가게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반짝이는 반짝이 옷 너울너울 인형 같은 공주 옷을 파는 옷 가게 그녀에게서 사온 옷을 안고 잠을 청하면 푸른 섬진강 물이 은빛 모래톱 찰랑찰랑 간질이는 소리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나는 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구례에서 하동 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 가게 그녀가 웃고 있다 박남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2010년 10월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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