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29년 8개월 동안의 새벽 출근

기획시리즈 '아버지', 다섯 번째. 윤상일·윤현정 부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마주 앉아 삶을 논한 적이 있습니까? 기획시리즈 '아버지'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만납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1958년 개띠 경상도 출신 사나이. 29년 8개월 동안 반도체 공장 재직 후 정년 은퇴. 여름이면 주문진으로, 가을이면 설악산으로,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떠나는 최고의 여행플래너. 딸들이 좋아하는 연어를 싸게 먹이고픈 마음에 연어 손질을 직접 하는 남자. 청과 시장에 가면 포도, 복숭아, 감까지 네 여자의 입맛에 맞춰 과일을 박스로 사오는 남자. 하루 여행에 사진 700장은 기본으로 찍는 사진광. 바로 저의 아버지 윤상일입니다. 근래 저는 새벽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오전 4시에는 집을 나서야합니다. 아침 알람소리를 못 들을까봐 선잠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아침에 몸이 가뿐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요. 자리에 앉지 못하는 날이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반도체 공장에 일하시던 아버지는 지난 8월 말 퇴사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회사 재직기간인 29년 8개월 동안 항상 오전 4시 30분에 출근하셨습니다. 왜 아버지가 밤늦은 시각 TV를 끄라고 하셨는지, 아침밥을 꼭 챙기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이. 이 기회를 통해 알아보려 합니다.

“역지사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 학창시절 아버지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 항상 활발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학생이었던 것 같구나. 참 정직했어. 특히 초등학교 때 김향숙 선생님이 오래 기억에 남는구나. 항상 부모님 같고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돌봐주셨지. 청소를 하고 나면 잘했다고 옥수수빵을 주곤 하셨는데. 그래서 그 선생님을 잘 따라다니곤 했어. 꼭 옥수수빵 때문만은 아니었지만.(웃음) 선생님을 잘 따르는 모범학생이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겠니.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모든 일을 열심히 했지. 학창시절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안경이야. 눈이 나빠 칠판이 잘 보이지를 않았어. 그런데 그 시절은 힘들어서 안경을 맞출 돈이 없었거든. 앞자리에 가서 공부하거나 다른 친구들 판서 해놓은 것을 베끼곤 했는데. 키가 크니 뒤에 앉은 친구들의 원성이 잦았지. 그때 안경을 맞췄더라면 또 모르지.(웃음)

- 23살에 군대를 입대할 때 어떤 마음이셨어요? ▲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갔어. 거기서 탄약병으로 배치됐지. 춘천 화곡리에서 근무했어. 전문 기술을 갖고 복무해서 그런지 나름 시간이 잘 갔어. 그렇게 무사히 만기제대 할 수 있었지. 6.25때 버려진 탄이라든지 폭발물을 수거해서 치웠는데. 국민들의 안전에도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군 제대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 제대할 때가 다가오니 정말 막막하더구나. 사회에 나가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정말 무서웠지. 그래도 일단 뛰어들었다. 취직을 위해 울산 석유 화학 단지, 경영자 협회 등을 열심히 찾아 다녔지. 그러다 주조공장에 입사하게 됐어. 술의 원료가 되는 화학성분을 제조하는 곳이었지. 처음부터 주조공장에 들어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단다. 아빠 전공이 화학이잖니. 내 지식을 활용해서 술의 원료도 만들고, 그 술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의 보람도 있더구나.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 첫 발을 딛는 것은 참 어려워.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 아빠도 대기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중견기업에서도 능력을 펼치며 보람 있었다. 너도 요즘 취직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더구나. 아빠가 많이 걱정된다. 조금 눈높이를 낮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주조공장을 다닐 때 살펴보니 학력이 높으면 직급도 높더구나.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공부가 지속적으로 병행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마침 결혼할 때 엄마가 방송통신대학에 다니고 있었어. 나는 기술인이었지만 기술인도 경영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경영학과에 다시 진학했지.

- 엄마랑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 나는 연애라는 것은 해보지도 못했어. 여자 얼굴만 봐도 쑥스러워서 도망칠 정도였지. 중매를 해야만 결혼 할 것 같아서 선을 7번이나 봤어.(웃음) 갈수록 상대도 구하기 힘들었고,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었지. 그 때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엄마를 만났어. 지금 생각해보면 첫 눈에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당시 장모님이 “빨리 식을 올리자”라고 해서 결혼 할 때 까지 공원에서 딱 한 번 식사하고, 손 한 번 잡고 바로 결혼했어.

딸을 보며 시작한 인생 2막

장 잘 보는 남자

- 아버지가 매주 사오는 과일과 생선 정말 맛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청과시장‧수산시장에서 장 잘 보는, 생활의 지혜로 가득 찬 남자가 제 이상형인데요. 아버지의 도매시장 장보기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면?

▲ 과일은 문래동 뒤편에 있는 도매상가가 참 싸고 질도 좋단다. 특히 길 입구 소매집을 지나서 안으로 쭈욱 들어가면 있는 집들이 도매집인데 그 집들의 과일이 정말 좋지. 문래동에 청과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아침 출근을 하면서였다. 당시에 83번을 타고 새벽 5시 10분까지 청과시장 근처에 와서 셔틀버스를 갈아타야 했거든. 그런데 길 건너편을 보니 화물차에 과일박스를 싣고 있는 거야. 내가 과일을 사러 왔다고 하니 장사꾼인줄 알고 몇 박스 하실거냐고 묻더구나. 그때 내가 한 박스라고 하면 허탈한 듯 피식 웃곤 했지. 그래도 그 새벽에 과일 사러 오는 사람이 나 뿐이니 도매가로 싸게 줬지. 그러면 그 박스를 들고 다시 2시간씩 집으로 돌아가곤 했단다. 너희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겠니?(웃음) 사람이 돈을 많이 못 벌면 부지런이라도 해야지. 참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귤을 살 때는 박자가 맛있는데. 요즘은 박자보다 더 좋은 귤이 많더구나. 5번, 6번 같은 숫자는 귤의 크기를 말하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귤의 다이수를 알아놓았다가 고려해서 사면 좋지.

- 수산시장도 설명해 주세요.

▲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곳은 한 번 오는 손님인 줄 알고 바가지 씌우는 곳도 있었어. 그런데 계속 가다보니 누가 좋은 물건을 싸게 주고, 누가 나쁜 물건을 비싸게 주는지 알겠더구나. 그 이후로는 바가지 씌우는 곳은 가지 않았지. 인생도 그런 것 같다. 한 번 갈 때야 그 사람이 바가지 씌우는지 아닌지 몰라서 갔지만 그 사실을 알고는 거길 또 가겠니?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익만 따지고 정이 없지. 하지만 ‘이 사람이 또 봐야할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대하면 마음부터가 달라지거든. 여러 번 보고 살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주위에 사람이 남고 인생사는 재미가 있을거야.

-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취미 ‘사진’이란?

▲ 사진을 순간적으로 촬영 하다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찍을 수 있는 것 같아. 특히 큰 카메라를 매고 다닐 때면 사람들이 나를 사진기자로 보고 사진을 부탁해 오더라고. 관광지 같은 곳에 가면 다른 사람들 사진 찍어주는 것이 참 좋더구나. 그 사람의 마음을 찍는 다고나 할까? 또 사진은 그 사람의 일대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록물 같은 것 같아. 그래서 다른 것은 못해줘도 꼭 너희 생일만은 안 놓치려고 해. 파티도 하고 사진도 꼬박꼬박 찍어서 남겨 놓는 거지. 그리고 나중에 내가 늙어서 너희한테 다 증거자료로 청구할 거다.(웃음)

오늘도 저는 새벽 출근을 합니다. 이제 두 달차. 일도 손에 익고 많이 적응 됐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제게 “가족들을 위해 29년 8개월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아버지는 인터뷰를 준비하시며 굉장히 쑥스러워하셨습니다. 본인의 인생이 내세울 것이 없다고 하시며. 그런 것들은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만 하는 거라고 말이죠. 신문 1면에 나는 유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네이버 인명사전에 치면 나올 만큼 사회적 성공도 아니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29년 8개월간 본인의 능력 안에서 딸 셋을 잘 키워낸, 그리고 여전히 키우고 계신 ‘멋진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도 아버지를 본받아 열심히 뛰어봅니다.

피플트리.10000-13 윤현정 기자단 hyunjung8909@naver.com http://www.peopletre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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