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영

김훈이 2003년 발간한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고 있다. 이 책의 페르소나는 그 전에 나왔던 내가 꼽는 김훈 최고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의 페르소나와 반쯤 동일하다. <자전거 여행> 1편이 2000년에 나왔으므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 <밥벌이...>가 <자전거...>의 확장판이었음 했던 것인데 아쉽게도 <밥벌이...>는 김훈의 이전 직업인 '기자'로서의 페르소나가 절반쯤 드리워져 있다. 개인적으로 기자로서의 김훈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사실 소설가로서의 김훈도 부러 읽지 않는 까닭에 몸을 바퀴로 삼아 길을 제 안의 궤적으로 삼아가는 그의 지역에세이만을 오직 편애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밥벌이...>에 대한 독후감은 좀 아쉬운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벌이...>에 수록된 첫 번 째 산문은 <자전거...>의 산문과 같은 무늬를 띠고 있다. 늙은이(여기서 '늙은이'는 노인의 다른 말일뿐, 폄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니다)답게, 문장 중에 한문투가 왕왕 섞여있는 그의 글들은 바로 그 한문 단어들 때문에 읽는 속도를 시나브로 떨어뜨리도록 만든다. 김훈의 문장에서 한문 단어들은 하루키의 문장에서 영어 단어들의 역할과 정확히 대응하는데, 다른 낱말들과 섞이지 않고 문장에 방점 효과를 주며 특유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비장미와 부드럽게 어울린다. 그가 쓰는 한문 단어들은 일견 생경하면서도 그 생경함의 힘으로 자신의 문장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개념어들을 함부러 가져다 쓰는 교수들의 논문투에 반발하면서도 그의 문장에 반발할 수 없는 건 그의 진솔함과 더불어 그같은 김훈만의 특질에 있을 것이었다.

의미를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아름다운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룩한다. <밥벌이...>에서 그가 적는 문장이 종종 잠언과 비슷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장은 그가 높은 데서가 아니라 동등한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잠언의 비릿함과 설교의 젠체함을 뿌리친다. 그가 이룩한 세계는 사실 낡은 세계, 사라진 것들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없었던 세계에 대한 판타지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것에 대한 김훈의 헛헛한 집착만은 아주 리얼한 데가 있어 읽는 동안 그 환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의 세계관을 긍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문장만은 긍정한다. 그는 읽어볼만한 우파, 성실하고 진솔하며 비교적 합리적인 우파에 속한다.

작가를 반만 긍정하면서, 그의 책들을 찾아읽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그는 내게 새로운 여행이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왕복 5시간 여의 버스 탑승 시간은 보통 두 권의 책을 읽도록 허용되지만 김훈의 경우에는 한 권이면 족하다. 그의 책은 끈질기게 독자를 환기하고 그의 문장 속에 독자의 삶과 세상의 풍경을 겹쳐보도록 유혹한다. 그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주 책에서 시선을 돌리고는 바깥(바깥의 풍경과 내 안의 바깥)을 응시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책은 그만의 문장이면서 또한 세상과 독자를 하나로 꿰뚫는 문이기도 하다. 그 경지란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차원이다.

한숨을 쉬며, 그의 글을 읽는다. 앞으로도 김훈의 문장을 읽는 일은, 한숨을 동반하지 아니할 수 없는 체험이리라. 그러나 한숨 쉬기를 멈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그의 산문집을 만나고 싶다. 쓴다는 것은 특별한 창조가 아니라, 그저 삶의 내밀한 반영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반영은 어쩌면 이렇게나 저리도록 아름다운가. ====================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는 선율과 박자 위에,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빚어낸다. 그가 빚어내는 세계는 연약하고 정처없는 것이어서, 음들은 태어나는 순간에 시간 속에서 소멸한다. 하나의 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음이 태어나 그 뒤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시 소멸한다.(중략)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악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중략)

소리를 내지 않고, 단지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도 인간에게 안겨서 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그 운명만으로도 아름답다. 서울 국립국악원의 국악기 박물관에 가면 이처럼 아름다운 악기들을 하루 종일 볼 수 있다. 이미 연주법이 전승되지 않는 현악기들도 있다. 당비파가 그러하다. 악기는 전하지만, 그 연주법이 전하지 않아서, 악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안기지 못하고 더 이상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런 악기들도 그 속에 소리의 잠재태와 소리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한 죽은 악기는 아니다. 악기는 살아서, 기나긴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17~18쪽 발췌, 2010, 생각의나무

아주 천천히, 그 누군가를 잊어버릴만큼 느리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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