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이후 인쇄 기술의 발달은 종이 위에서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패러다임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타이핑으로 정형화된 예쁜 글씨체를 사용해 표현할 수 있고 인쇄도 많이 할 수 있죠.
그런데도 초등학교 교과 과정 중에는 아직 바른 정자체를 쓰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인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있지만 그래도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떨까요?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고 부끄러움이 많아 그 사람 앞에선 말도 못해서 대신 마음을 전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스마트폰의 편리한 메신저, 이메일, 채팅 등 의사를 전달할 수단은 많습니다. 그럼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 전달이 가능할까요? 문자는 불가능한 것을 글씨는 해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글씨는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 등을 나타낸다 하여 중요시 해왔습니다. 연하장, 감사편지, 연애편지를 타이핑으로 써내려갈 수 없는 법입니다.
만약 그렇게 써낸다면 받는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나에게 무성의하고 내가 받은 이건 누군가와 같이 받을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좋아도 말이 적합하지 않으면 그 마음도 같이 의심받는 경우가 비슷합니다. 말 대신 글로 전달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과거 어느 소설에선가 읽은 외교관의 이야기였습니다.
외교관은 회담에서 나라의 대표이자 국익을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언동을 조심하는 신중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른 국가의 외교관에서 안부 편지, 연하장 등을 보낼 때 상대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여 정중한 필체로 손편지를 전달했습니다.
정중하고도 깔끔한 필체의 편지를 받으면 상대 국가의 외교관도 같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외교세계의 미풍양속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방의 문화를 염두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서로 간의 마음을 교환해온 것이죠. 이 덕분에 그는 상생의 외교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문자는 불가능해도 글씨는 가능한 것. 그것은 만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데이터 몇 메가, 문자 80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컴퓨터가 써준 글도 못합니다. 내가 쓴 나만의 글씨만이 가능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