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의 늪에서 이해관계자 건지기

반 할과 박근혜는 공통점이 많다. 힘 있는 리더라 기대를 모았고 그만큼 큰 실망을 지켜보는 자들에게 안겨준다는 점이 현재로써는 가장 돋보인다. 힘 있는 리더의 독선은 큰 위험요소를 품는다. 번역기를 돌려야 할 정도로 실체가 없는 반 할식 4-2-3-1과 박근혜식 창조경제. 힘 있는 리더를 끝까지 존중하는 입장, 포퓰리즘이나 선동을 극도로 경계하는 성향, 뚝심과 지조를 지키려는 고집 등을 지닌 원칙주의자이면서 이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이들을 보호할 명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코너에 몰린 모습도 비슷하다. 강력하지만 실체에 색깔을 덧입히기 힘든 ‘거시적 대의명분의 덫(거시의 덫)’에 빠져 ‘독선가’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탈레이랑(Ch.M. de Talleyrand, 1754~1838)이라는 프랑스 외교관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패한 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심판’하려 연 빈 회의에서 ‘5두 정치’ 프레임으로 회의를 몰아 그네 나라의 이권을 지킨 인물이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동쪽 폴란드 이권을 두고 공공연히 신경전을 벌여왔다. 나폴레옹 전쟁 후 독일 중부 색스니 땅을 두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도 다툴지 모르는 위기를 맞았다. 오스트리아는 남독의 하노버를 중심으로 지녀온 이권을 지키기 위해 북독의 프로이센을 견제하면서 자신과 함께 신성로마제국 해체 후 사실상 유럽의 ‘G2’ 중 하나인 러시아도 견제해야 하는 영국을 끌어들여야 했다. 탈레이랑은 4국의 입장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4대 강국’들 중심으로 진행됐던 회의에 의문을 제기해 ‘8국 위원회’로 가자며 대의명분을 선점한 뒤 영국-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끌어들이게 만들어 3국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러시아, 프로이센도 별수 없이 빈 회의에 참여해야 했고 ‘8국 위원회’를 빙자한 ‘5국 위원회’를 만들어 전쟁에 진 프랑스가 유럽 5강 밑으로 밀리지 않도록 이끌었다. 그는 루이 18세에게 “••• 이제 [프랑스에 대한] 연합은 영원히 와해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에서 고립되지 않으며 2대 강국[영국, 오스트리아]와 연합하고 있습니다”라 보고했다(출처: 『세계외교사』). ‘거시’를 움켜쥐고 흔든 셈이다.

*

한국 축구 저널리즘에서 칼럼의 범람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문제 제기는 변죽만 울리는 소음처럼 들린다. 무분별한 ‘거시 움켜쥐기’ 시도가 미끄덩하고 비누 때가 번지는 본질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행정, 경영 등을 뺀 경기 내적 주제를 다룬 대부분 칼럼은 리뷰 포맷에 쏠려있고, 이는 대부분 거시 분석(Macroscope Analysis)을 다룬다. 경기 전 벌어진 감독과 선수에 관한 이런저런 이슈, 경기 내적으로는 측면과 최전방, 3선 등 경기장 곳곳의 일을 전방위적으로 다루고(가독성을 희생하고도 경기 곳곳을 다루는 건 서사적 상보기사식 기사작성법을 칼럼에서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반 몇 분, 후반 몇 분식 시간 순서대로의 나열 말이다), 경기 뒤 벌어질 이슈나 코멘트, 그에 대한 각종 반응을 예측한다(그러나 대안이나 반론 제시는 드물고 여론으로 수세에 몰린 취재원 입장과 제3자 입장을 고려한 (언론의 기본인) ‘트라이앵글 보도’ 수준은 기대하기 어려운데 칼럼 분량은 늘 길다. 이로써 대안과 반론, 표적과 제3자의 코멘트를 포함한 긴 글을 쓸 역량을 갖춘 자의 긴 글조차 독자에게 ‘긴 글’이라는 이유로 읽힐 확률이 낮아지며 채널과 이름을 점령한 변죽을 울리는 자들은 소음을 더욱 키워 몸값을 높인다. 좀 더 나아가자면 ‘축구 저널리즘’ 영역은 ‘시사보도’나 음악, 영화 같은 장르의 칼럼, 출판계의 서평보다 통찰력이 약한 매체처럼 보이게 만들며 이는 축구경기 객단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축구라는 영역의 가치 절하 현상으로 이어진다. 토요일 밤 강남 옥타곤, 누구의 내한 공연, 무슨 작가의 베스트셀러, ‘절찬 상영 중’이라 사방천지에 광고지가 붙은 영화와 축구경기의 가치를 사람들이 은연중에 생각하는 ‘가치’의 측면에서 솔직하게 비교해보자. 축구인 스스로 자신을 속여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부터 아주 미시적인 장면 분석으로 ‘거시의 덫에 갇힌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의 초상’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보여주기만 할 것이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요즘 보기 드문 공격수와 수비수의 ‘1대1 백병전(일기토)’ 중 백미로 꼽을 만한 ‘샤치리 - 블린트의 16초 대전’을 “샤치리, 샤치리, HOLY 샤치리” 프레임으로 덮어버린 중계진과 포털 하이라이트(HL)제작자의 행동을 여섯 장면으로 다뤄보려 한다. 꽤 흥미로운 주제일 거라 믿는다.

# 실수를 만회해 단순 경합상태로 몰고 간 수비수

사실상 스토크가 맨유를 가두어 패던 10여 분이었다. 경기 전 양 팀 분위기는 주지의 사실이며 분위기가 나쁜 팀 감독 모습을 마음껏 팔아 제껴온 언론의 보도 방침에도 우리는 익숙하다.

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uCategory=wfootball&category=epl&listType=game&date=20151226&gameId=201512261003833672&teamCode=&playerId=&keyword=&id=169806&page=2

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epl/175400/175470

제시할 장면으로 검증해보겠다.

GIF

사진 바로 앞 1초 동안 벌어진 건 평범한 인사이드 패스였기 때문에 생략했다. 즉 샤치리가 갑자기 방향 전환을 한 거다. 샤치리보다 느린 블린트는 이에 속았고 중심까지 잃었다. 반사적으로 블린트는 팔을 썼다. 친선 동네 축구가 아닌 세계인이 주목하는 프로 리그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여기서 블린트와 샤치리의 싸움은 ‘이미 뻗은 팔을 반칙의 선을 넘지 않고 얼마나 잘 써먹느냐(샤치리 입장에선 반칙을 유도하느냐)’에 달렸다. 반칙 안 하면 블린트가 이긴 거란 얘기다. 블린트는 반칙 판결을 피하고 ‘볼 따낼 확률이 5대5’인 단순 경합 상황으로 모는 데 성공했다.

GIF

# 욕심부리다 볼 다시 뺏겨 복선 제공한 수비수

‘팔 효과’로 블린트는 자기보다 빠른 공격수가 등을 지도록 유도했다. 반칙해야 할 명분은 첫 장면보다 더욱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섯째 장면까지 경합을 이은 샤치리의 드리블링은 대단했고, “무게 중심”을 언급하는 중계진의 발언은 이 맥락에선 옳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상황까지 몰고 간 블린트 얘기는 전혀 없었단 점일 뿐이다.

샤치리는 의도대로 원활히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공을 띄우기까지 했다(상대 수비수에게 시간을 허용했단 말이다). 블린트의 자신감은 과했다. 볼을 스로인 라인 밖으로 차내지 않고 완전히 샤치리로부터 빼앗아 팀 사기도 끌어올릴 심산으로 보인다. 샤치리는 블린트가 발바닥을 내민 공을 다시 빼앗아 볼 소유권을 지킨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샤치리는 에레라, 스몰링이 박스 안에 서 있을 시간을 허용했다. 다른 스토크 공격수의 침투를 정찰하는 여유를 보이는 에레라를 보라.

여섯 장면의 승패를 쪼개 몇 대 몇이니 샤치리와 블린트 중 누가 이겼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건 웃기지만 두 번째 장면까지는 분명 블린트 의도대로 흘러갔다. 블린트로서는 볼을 뺏지 못한 것이 유일한 결점이었다. 그러나 샤치리의 놀라운 선전으로 볼을 빼앗으려 했던 그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욕심이 된다.

GIF

# 놀라운 턴 하고도 박스 밖으로 밀린 공격수

거듭 말하지만 샤치리의 개인 능력에 프레임을 맞추면 이 백병전에 임한 그는 놀라운 퍼포머(Performer)다. 특히 두 번째 장면 직후 등을 지자마자 반댓발(왼발)을 써 대각선으로 볼 방향을 꺾는 판단은 놀랍다. 블린트는 두 번째 장면에서 무리하게 공을 빼앗으려 했던 걸 후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블린트는 샤치리가 등을 지게 했고, 중계진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말처럼 “샤치리 무게 중심이 아무리 낮고 딴딴”하대도 그는 속절없이 박스 바깥으로 밀렸다. 비유하자면 전투에서 져 전선을 뒤로 빼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때 한국 중계진은 샤치리의 스킬에 감탄만 하고 있었다.

GIF

# 공격수의 결단으로 10초 전보다 나아진 상황에서 2라운드 돌입

현재까지의 네 장면 곳곳에서 샤치리는 턴을 시도했다. 네 번째 장면의 턴에서 샤치리의 과단성이 가장 돋보인다. 블린트의 무게 중심을 완전히 빼앗았다. 이종격투기에 빗대면 지속적인 로우킥으로 상대의 무브먼트를 고갈시켜 승률을 한껏 끌어올린 판세와 비슷하다.

두 번째 장면에서 등을 지고, 세 번째 씬에서 스로인 라인까지 밀렸던 사정을 고려하면 샤치리의 경합 승률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이 턴을 하면서 샤치리도 중심을 잃어 왼발로 그대로 내달리진 못했다.

첫 번째 장면보다 더 구석에 몰린 상황에서 2라운드가 시작됐다. 그러나 샤치리 입장에선 첫 번째 장면보다 블린트를 멀리 떼놓는 데 성공했다. 두 성과의 경중을 굳이 따지면 샤치리가 얻은 후자가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인다.

GIF

# 블린트는 에레라를 못 보고 에레라는 샤치리를 포위하지 못하고

지난 13초 동안 영리하게 수비한 블린트에게 좀 박한 말이지만 다섯 번째 장면에서 그는 장님(blind)이 됐다. 그는 지원 온 에레라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블린트가 훈련과 감으로 에레라의 위치를 파악하고도 샤치리의 크로스를 차단하려 발을 뻗었다면 사실상 에레라의 지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여기서 블린트는 네 번째 장면 막판에 첫 번째 장면에서처럼 샤치리에게 바싹 달라붙지 못한 대가를 치렀다. 바싹 붙어 있었다면 샤치리는 크로스를 올릴 듯한 동작을 취할 수 없었을 테고 블린트가 발을 뻗기 위해 하체 중심을 희생하는 수를 범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블린트는 샤치리에게 속아 에레라가 샤치리 뒤를 둘러쌀 공간을 제공하지 못했다. 드렇다고 샤치리에게 바싹 붙지도 못했다.

국지전에서 연패했던 샤치리가 드디어 전쟁에서 이길 기회를 맞았다.

GIF

# 상대에게 내준 프리킥은 에레라의 태클 실력 때문만이었을까

결말은 보는 그대로다. 에레라의 태클은 형편없었다. 에레라만의 잘못일까? 여섯 번째 장면까지 몰고 온 샤치리의 볼 키핑(이 부분은 중계진이 잘 지적했고, 포털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제대로 짚었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볼을 뺏으려다 재경합 기회를 상대에게 내주고 동료 에레라를 보지 못했던 블린트 판단력의 공(功)과 과(過), 에레라의 미숙한 태클이 합쳐진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경기가 끝난 뒤 여러 각도로 이 장면을 숙고한 나와 생중계에 임한 중계진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입만 벌리고 “샤치리의 균형 감각과 방향 전환을 보세요”라며 감탄만 하거나 허벅지 굵기 운운하는 낡은 드립으로 현대 축구에서 보기 드문 ‘16초 백병전’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낸 건 분명 아쉽다(이런 장면이 매주 펼쳐진다는 점에선 이들도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고, 더 큰 원죄는 이런 잘못을 전혀 지적하지 못하는 채널을 점령한 자들과 이런 잘못을 지적할 역량이 있음에도 채널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다).

포털 HL 제작자의 통찰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들도 나처럼 경기가 끝난 지 한참 뒤에 저작물을 만드는지라 상황 파악을 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음에도 중계진보다 못한 통찰력으로 자극적인 어그로나 끄는 제목 정도밖에 끌지 못해서이다. 믿을만한 단체에서 헤드 뽑는 교육을 받고, 직접 뽑아본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글이 꽤 길어 독자로서는 어리둥절해 할지 모를 서•결론에 제시한 ‘거시의 덫’과 두 채널 관계자와의 개연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은 ‘공격 근본주의’라는 ‘거시의 덫’에 빠져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에 실패해왔다. 경기를 90분 내내 지켜본 독자라도 ‘공격 근본주의’에 빠진 포털의 HL을 통해 경기를 곱씹는 사람들은 그들의 프레임에 갇혀 씬 속 등장인물 양자의 공과 과를 제대로 헤아리기 어려워진다. 경기를 보지 못하고 포털 HL만 본 독자는… 진실을 왜곡 당해 자기가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알 권리를 잃는다. 알 권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려워진다. 당연히 양질의 콘텐츠로 담론과 의제(Agenda)를 제시해 저널리즘의 수준을 높일 기회는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고 내일은 완전히 잊힌다. 나 같은 잉여가 이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게이트 키퍼(Gate keeper)라는 언론 용어가 있다. 수많은 뉴스 중 반드시 다뤄야 할 공익적 의제(Agenda)를 정보 전달자가 먼저 골라낸 뒤에 지면에 내보내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의제를 골라내는 자는 당연히 거시의 덫에 빠지는 애송이여선 안 된다.

나는 ‘고발과 고자질의 차이’라는 구절에 관심이 많다.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가능성도 적은 부정적 사건을 상정해 고발할 구실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어뷰징, 천민자본주의, 음모론 같은 단어가 그런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기 좋은’ 장면을, 두루뭉술하지만 수용자에게 묘한 포만감을 주는 거시적 대의명분으로 포장한 뒤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연성 뉴스를 쏟아내는 보도 행태도 어뷰징 못지않은 기만행위다.

‘수비’와 ‘공격 전환’ 단계를 빠뜨리고 ‘공격(침투 • Penetration), 스루패스, 문전 근처에서의 오프 더 볼 등)’과 ‘수비 전환(역습 등)’에 대부분의 지면을 쏟는 거시 분석은 그런 기만행위와 비슷하다. 독자들은 경기가 끝난 뒤 비장하게 “조직력”, “압박”, “수비” 운운하는 인터뷰 코멘트와 거시 리뷰 칼럼에 익숙해지면서도 막상 생중계 중에 ‘그쪽’ 멘트보다는 “침투”, “탈압박”, “2선”, “반댓발 윙어”, “슈팅”, “돌파” 같은 단어를 더 자주 접한다.

2차 콘텐츠(주로 포털의 HL이나 리뷰 기사)에서 왜 우리는 시간적 순서의 서사적 상보(전반 몇 분, 후반 몇 분…)와 ‘공격’과 ‘수비 전환’ 위주로 편집된 클립만 보아야 하나(슛, 패스, 코너킥, 프리킥, 또 슛, 슛, 슛, 슛, 가끔 수비수가 허우적대며 자빠지는 모습). 그럼 “현대 축구의 흐름”이라 불리는 “공간 좁히기”, “조직적, 유기적 플레이”, “압박” 같은 내용을 다룬 클립은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대부분 무보수로) 3차 가공을 한 콘텐츠를 따로 시간 내어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그 주제를 다룬 3차 콘텐츠는 대부분 ‘미시 콘텐츠’이고, 그 클립 속에 녹인 아마추어의 글은 ‘거대 담론(거시적 담론)’을 다루기엔 기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내가 제시한 샤치리-블린트 공방전은 그런 촌극의 전형적인 예다. 왜 두 가지 프레임을 라이브로 다룰 기회를 한 가지 프레임으로 쪼개 전해 정보 전달자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릴까. 생방송이라 급박해서? 한국 중계진을 위해 덧붙이면 세계 각국 중계진도 “Unbelievable, Shaqiri’s balance.”를 외칠 듯하다. 중계방송과 현장 인력(선수, 코치, 감독 등)의 수준은 당장 서유럽축구를 따라잡기 어렵지만, 저널리즘은 그렇지 않다. 미시 분석으로 거시 칼럼의 실체를 분명히 한 뒤 이 포맷을 수출할 수도 있다.

게이트키퍼 없는 한국 축구 저널리즘은 시청자들도 ‘공격 근본주의자’로 만든다. 꼭 한국 언론만의 잘못은 아니다. 라디오까지 안 가도 최소한 TV가 축구를 점령한 1960년대 후반 이래 세계 전역의 저널리즘이 저질러 온 실수다

나도 골을 좋아한다. 현실 속 나는 동료가 골을 넣을 때까지 아무리 나보다 빠른 공격수가 내 뒤통수를 기분 나쁘게 후벼 파대도 참고 막는 수비수다. 골 소중한 거 잘 알고 슛 한 번 해보려고 어이없는 똥볼을 차고도 동료의 비판을 받기는 싫어하는 한낱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공격 근본주의’에 빠진 게이트키퍼 없는 저널리즘, 고발 없는 고자질 더미가 우리 머릿속에 밈(meme • 문화 복제자 혹은 문화 유전자, 과학자 리차드 도킨스가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40년 전쯤 제시한 개념, 쉽게 말해 특정 문화적 개념이 당신 머릿속에서 번식한다는 뜻)을 심고 있는 현상을 세월아 네월아 하며 좌시할 수는 없다. 왜 사업가는 구조조정을 하고 정치인은 혁신안을 만들고 학자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려 연구하고 예술가는 전에 없던 창조물을 만들려 하는데 저널리즘은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나. 해왔다면 그네들 분야보다 성과가 더뎌 많은 이들의 뇌가 짓무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수비, 압박 등 미시 분석은 공격자와 수비자 중 (대부분의 경우 특정 국면) 하나만 다루는 ‘거시의 덫’에서 저널리즘을 건져 줄 포맷이고, 천민자본주의식 어뷰징 거시 칼럼보다 솔직한 자본주의를 구현해 수많은 축구팬들을 ‘공격 근본주의’로부터 건져내어 줄 묘약이다. 이는 세계 어디서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사업자나 경영자 입장에서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의제일 것이다. 아주 세속적이지만 말이다.

거시의 덫에서 빠져나온 공급자는 ‘고자질쟁이’가 아닌 ‘게이트 키퍼’가 될 것이고, 꼼꼼한 검증을 거친 내용을 제공받은 수용자는 ‘똑똑해지는 듯한 기분을 배달받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똑똑해질’ 것이다.

Follow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