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경영학] 인재를 파견했던 조선, 인재가 찾아오는 한국 : 1편

2015년 현재, 해외에서 유학중인 한국 대학생은 21만 5,000명에 달한다. 유학생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해외 대학의 학위나 연수 경험이 여전히 유리한 ‘스펙’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학 열기는 과거 조선시대에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왕들은 유능한 신하들을 명나라, 청나라에 보내 최신 문물을 접하도록 했다. 청과 명의 선진 문명을 습득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의 지식은 국가 경영에 많은 부분 활용되었다. 이달의 왕의 경영학에서는 역대 조선 왕들이 국비 유학을 보냈던 사례를 되짚어본다. 또한 현대에 들어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의 국비 유학 상황도 함께 살펴본다. 이를 통해 국외로 나가는 유학뿐 아니라,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의 유학도 빈번한 현재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왕이 아꼈던 인재, 새로운 세상을 보다

세종 – 과학 인재 장영실

조선의 4대 왕이었던 세종(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은 건국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사회적 기틀을 다지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왕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정치・정책을 뒷받침해 줄 인재가 절실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종대 과학기술의 발달을 이끈 중심에는 장영실이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다. 세종은 장영실의 손재주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장영실을 크게 쓰기로 마음먹는다.

1421년(세종 3년) 세종은 장영실을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보냈다. 세종이 그들을 중국에 유학 보낸 경위나 이유는 실록에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세종이 장영실 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만들면서 “중국의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모방해 만들라”고 지시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이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하도록 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장영실이 돌아온 1423년 세종은 그의 노비 신분을 벗겨주었다. 상의원 별좌라는 벼슬도 내리려 했지만 아버지인 태종과 신하들의 반대로 벼슬을 내리는 데에는 실패한다.

1년 간 중국 유학을 다녀온 장영실은 본격적으로 ‘과학기술전문가’로 활약하게 된다. 유학 후 장영실이 가장 먼저 손 댄 것은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의 제작이었다. 이는 중국의 물시계를 본 따 만든 것으로 자동 물시계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물시계와 비교했을 때 그 정밀함이 한층 높아져 공로를 인정받았다. 결국 이로인해 장영실은 상의원 별좌에 임명된다. 이후 장영실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432년(세종 14년) 시작된 천문관측 기구 제작 사업인 ‘의표창제(儀表創製)’사업에서 장영실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사업 착수 1년 만에 혼천의와 혼상(渾象)*, 정방안(正方案)* 등을 만들어냈다. 장영실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1433년(세종 15년)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제작에 성공했다. 1438년(세종20년)에는 더 정교한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제작에도 성공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혼천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어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물론 절기에 따라 농사일까지 알려주었다. 일명 ‘다목적 시계’인 셈이었다.

이외에도 장영실은 1434년(세종16년) 금속활자 갑인자, 1440년(세종 22년) 측우기를 제작, 정3품인 상호군까지 올랐다.

장영실의 이러한 성과의 밑바탕에는 세종의 안목과 초기의 유학이 있다. 그의 손재주와 감각이 탁월했다고는 하지만, 세종이 그의 잠재력을 알아차리지 못해 노비에 머물렀다면 이룰 수 없던 업적이었다. 또한 중국 유학이 장영실의 모든 성과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나은 업적을 이루도록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없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조선시대 사서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

* 혼상(渾象):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 별이 뜨고 지는 것,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측정

*정방안(正方案): 방위를 바로 잡아서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수평판

세조 – 문학 인재 서거정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 6년인 1461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서거정은 세종, 문종, 세조, 성종대 문신이자 학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예종, 성종까지 총 여섯 임금을 섬겼다. 서거정은 1444년(세종 26년) 문과에 급제, 1456년(세조 2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다음해에는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급제를 했다.

1460년(세조 6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서거정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사은사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이다. 수시로 보내던 임시사절 가운데 하나였지만, 왕을 대신해 감사를 전하러 떠나는 이들을 함부로 선발했을 리 없다.

서거정은 북경에서 안남국(베트남)의 사신 양곡을 만났다. 서거정이 근체시 한 율을 지어주자, 양곡이 화답했다. 그러자 서거정은 곧 연달아 10편의 시를 지어 응답했다. 이에 양곡은 “참으로 천하의 기재다”라고 감탄했다 한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명나라의 관리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다수의 국가문학사업에 기여했다. 1469년 경국대전 찬수(纂修)*, 1476년 삼국사절요 편찬, 1478년 동문선 130권 편찬, 1480년 역대연표 찬진(撰進)*,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 찬진, 1485년 동국통감 57권 완성, 1486년 필원잡기 저술 등으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서거정은 여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차례 명나라를 왕래했다. 1452년(문조 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은사로 갈 때에는 종사관으로 수양대군을 수행했다. 서거정의 능력을 아꼈던 왕들은 그가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사신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왕의 배려로 명의 사신들과 왕래했던 그의 행보는 타국으로의 이동이 많지 않았던 시절, 그에게 큰 문학적 자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문과중시(文科重試): 10년에 한 번씩 문·무 당하관을 위하여 설치된 중시

* 문신정시(文臣庭試): 임금의 특명으로 당상관 이하 문신이 임시로 응했던 과거. 선발 인원을 정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합격시켰음

* 찬수(纂修): 글이나 자료 따위를 모아 정리함. 또는 그렇게 하여 책으로 만듦

*찬진(撰進):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

정조 – 실학의 대표주자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대 실학의 대표 주자였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는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문물교류의 물꼬를 튼 인물들이다. 박지원은 그가 지은 ‘열하일기’로 잘 알려져 있다. 박지원은 1765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 이후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1780년 팔촌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進賀)* 사절 정사로 북경을 갈 때 박명원을 수행한 뒤 열하일기를 써냈다. 열하일기는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돼 청황제의 피서지인 열하,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월 20일까지의 여행기록이다.

박지원이 청을 자원해 다녀오게 된 이유는 홍대용 때문이었다. 박지원은 홍대용과 자주 토론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홍대용이 들려주는 청나라의 산업, 과학,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청나라를 다녀온 박지원은 1786년(정조 10년) 50세에 음서로 관리가 된다. 그는 1805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을 저술했다. 또한 청의 문명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사상’을 설파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정조는 출사(出仕)하여 관료로서 정치에 입문하지 못한 연암 박지원과 직접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중이 컸던 노론성향의 박지원 가문과 그와 학문적 성향이 같았던 연암학파들, 그가 지은 열하일기의 사회적 영향 등으로 박지원의 존재를 관심 있게 주시하였다.

또 다른 정조 대 인물인 박제가는 박지원의 제자다. 정조는 즉위 직후 규장각을 설치해 젊은 학자들을 유치했는데 박제가 또한 이 때 합류했다.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을 출간해 명나라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1778년에는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하기도 한다. 3개월 여의 여행 기간 동안 박제가는 많은 청나라 학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때의 경험은 ‘북학의’라는 대논문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국가 정책과 제도를 비판하고 능력에 따른 관리 등용제, 생산・소비의 중요성, 국제무역의 활성화 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박지원과 박제가를 비롯 홍대용 등 북학파들의 주장은 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데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함은 물론 상공업을 장려하고, 신분적 차별을 철폐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현실 개혁 사상의 바탕에는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했던 왕 정조의 포용력이 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청나라를 장기간 방문하며 새로운 문물과 삶의 양식에 눈을 뜬 인재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정조가 사망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 일파를 숙청하고,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는 실학파들 또한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북학파들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정치・경제・사회 등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했지만 기득권층의 벽을 넘지 못했다.

* 진하(進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

* 체제공: 영·정조때 문신

+) 2편보기https://www.vingle.net/posts/1324093

+) 정조의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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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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