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민화를 같이 배우는 친구를 만났다. 월요일마다 차를 얻어 타고 민화교실에 가는데, 타자마자 친구가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정환이가 낫겠어. "

"어?"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훅 들어가는 것은 아줌마들의 신기한 공통점이다.

"아니, 선우는 홀어머니에 시누가 너무 어리고, 무엇보다 엄마랑 사이가 너무 좋아. 사이 너무 좋은 부자간에 며느리가 들어가면 얼마나 고달픈지 알지. 게다가 시누가 너무 어려. 여섯살짜리 시누를 언제 키워. 대학공부까지 다 시키고, 시집까지 며느리가 보내야 하잖아. 아무리 남편이 사근사근 해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다 귀찮아 지는 거야. "

"저기요, 댁이 시집가는 거 아니시잖아요."

"근데, 정환이 아빠랑 덕선이랑 '반갑구만,반갑구만' 하는거 봤지. 그런 시아버지 자리가 있어 없어. 덕선이 엄청 이뻐하잖아.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랬어. 딱이야 딱. 라미란 봤지. 사람이 아쌀하고, 게다가 어려운 시절 살아봐서 이해심도 깊어. 그런 시어머니는 절대 며느리 안 괴롭힐 스타일이야. 여러모로 정환이가 낫겠어."

"너 심하게 진지하다."

"어떡해~~. 선우랑 연결되면 짱나서."

미안하지만 정환이와 선우와 덕선이는 내 친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덕선이가 선우랑 결혼을 하건 말건, 정환이와 결혼을 하건 말건 내 친구의 인생에 그들은 눈꼽만큼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말하기도 민망한 그들은 지금 인기리에 방영중인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미래가 없는 주인공들의 미래를 고민하느라고, 주말에 한 드라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월요일 댓바람부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성토하고 앉았다. 그러나, 친구의 고민은 그 다음주에 싱겁게 해결되어 버렸다. 드라마는 선우를 덕선이의 언니 보라와 연결시켜 버렸다. 하지만 덕선의 앞에 택이라는, 연봉이 1억인 프로바둑기사 미소년을 등장시켰으니, 이제 친구의 고민의 결은 달라졌다. 다음주에 차를 타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좀 글찮아?."

"뭐가?"

"프로기사는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가 많으니까. 일찍 죽으면 어떡해. 과부는 좀 글찮아?"

이정도 오지랖이면, 뭐 세계최강이라고 해도 할말 없다. 난 니가 니 결혼을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시방 니가 이렇게 살진 않을 거라며 면박을 주었다. 그녀는 수긍했다. 아줌마가 되면 오지랖이 이상하게 넓어진다. 바바리맨을 보고도 옛날에는 보자마자 울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던 처녀들이, 아줌마가 되면 그 바바리맨이 어릴 때 얼마나 상처를 받아서 그러겠냐며 측은해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언니는 식당에서 앞접시를 달라고 할 때마다 망설였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신의 이모님이 미국의 어떤 식당주방에서 설겆이를 하시는데, 그 놈의 앞접시 좀 고만 달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앞접시 달라는 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이모님이 지금 이 식당에서 노려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지랖 넓은 언니는 한국식당 주방의 또 다른 이모님의 수고를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치킨을 시켜먹을 땐 꼭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한다. IT 업계에서 물러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끝판에 하는 일이 치킨집이더라며, 그 사람들이 자기모습 같아서 차마 카드 수수료를 물릴 수 없다는 얘기를 한다. 이 정도는 아주 귀여운 축에 속하는 오지랖이지만, 오지랖이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극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나가는 할머니가 애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와 왜 애기한테 양말을 안 신겼냐며 아이의 발을 주물럭주물럭 한다. 민망해진 애기엄마는 내 새끼한테 양말을 신기던 맨발로 다니던 뭔 상관이냐며, 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한 할머니에 대한 성토 대회가 온라인상에서 벌어진다. (난 실제로 그런 할머니에 대해 짜증난다는 댓글이 수십 개 달린 카카오스토리를 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떨지 말아야 할 오지랖을 떨었다는 이유로 혐오대상이 된다. 섣부른 판단으로 졸지에 무식한 엄마가 된 아기엄마는 억울했을 것이다. 애기가 방금까지 더워서 발광을 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토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열이 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할머니는 오로지 시려워 보이는 아기의 발만이 측은했던 것이다. 그래서 앞뒤 안보고 돌진하여 그저 아이의 측은한 발을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만이 앞선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 이성보다 먼저 감정이 차오르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이제 난 오로지 완고한 이성만이 남아서 정이고 뭐고 없는 노인을 보는 것보다는 오지랖이 넓다고 구박을 받더라도 돌진하여 정을 표현하는 할머니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 물론 그 오지랖은 대부분 너무 가거나, 방향을 잃거나, 뜬금포이거나, 혹은 허황되긴 하지만 말이다.

오지랖이라는 단어 앞에서 난 복잡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다. 최근 나도 모르게 오지랖이 한 뼘은 넓어진 나이로 진입한 느낌이 든다. 남이 무슨 행동을 하건, 어떻게 살건 별반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은 꽤 낯설다. 이건 내가 39살에서 40살로 진입하기 전에 겪었던 정체성의 혼돈에 버금가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같은 것이다. 각자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철저한 선긋기를 하던 내가 왜, 뜬금포 오지랖을 떠는 자리로 옮기게 된 걸까? 되짚어 보니, 두 가지의 확연한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상하게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상하게 눈물이 흔해지더라는 것이다. 나이가 드니, 사람이라는 게 각자의 고유성을 확보한 독자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보편성을 가진 비슷비슷한 존재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또한 인생이란 혼자서만 돋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 잘된다고 잘사는 것이 아니고, 남이 못되고 사회가 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굴러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남의 아픔이 남의 아픔만은 아니고, 내새끼도 남의 새끼도 모두 귀하다는 것을, 생각이 아니라 심성으로 느끼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눈물이 많아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눈물이 많아져서 더 남들에게 관심이 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하야, 눈물많고 피아가 불분명해져 버린 아줌마들은 아무데서나 아이의 발을 주무르고, 아무데서나 남의 인생에 간섭하고, 아무데서나 눈물 바람을 하는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고 눈치가 없고, 본론으로 훅 들어가는 것이 짜증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누구나 늙어갈 수 밖에 없다는 대전제가 주는 어쩔 수 없음이다. 그것은 늙으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검버섯이 피고, 다리에 류마티즘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지랖은 대부분 '측은지심'에서 출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측은지심'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본성이라고 하셨다. 나이가 들어 분별이 흐려져 오지랖을 떠는 할머니를 보더라도 그 본성이 '측은지심'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준다면, 그 오지랖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아줌마로 진입하고 있는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인간의 본성 중 제일 근본, '측은지심'만은 부디 잃지 않고 죽기를 바랄 뿐이다.

짧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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