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남자(1)

눈이 흩날린다. 눈송이는 꽤나 풍성하고 포근한 솜털같다. 조용하게 바람에 이리 저리 흩날리는 품이 마치 봄에 버드나무의 꽃씨가 날리는 모습이어서 전혀 추운 기색이 보이질않는다. 옅은 회색빛 세상에 그 무리만이 자유롭다는 듯 마음껏 바람에 몸을 맡겨둔 눈은, 이제는 흰머리가 꽤나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머리속에서도 한껏 자유롭게 헤엄치듯 혹은 까불듯 돌아다닌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몇 번 이나 속으로 되뇌인다. '그 때에도 그랬지...' '그 녀를 처음 만나는 날도 그랬지...'

1985년은 남자가 재수끝에 대학에 들어간 해였다. 대학 입학 선물로 현대자동차의 포니2cx라는 자가용(이 당시엔 자가용이라는 의미가 부의 한 척도였다. 전국에 차량이 100만대 조금 넘었으니까)을 받았고 그 차 덕분에 남자는 꽤나 으쓱댈 수 있었고 그 차 덕분에 남자는 어떤 의미에선 사회를 빨리 배울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대학생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당시 현실에 대한 울분도 있었고 집안의 가풍이나 의리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해야했다.즉, 데모도 해야했고 일도 해야했고 공부도 해야했다. 그런데 이 남자, 사실은 좀 웃긴 구석이 있었다. 데모를 하는 이유가 부조리와 불의에 대항하는 의미 때문이 아니고 친구인 학우들과 전경들이 서로 싸우는게 싫어서였다. 물론 선배들에게 이론 교육도 받았고 책도 제법 읽었기에 사회가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정도는 했지만 유복한 가정이라 사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었기에 체제에 대한 저항은 좀 먼 얘기이고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한쪽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고 다른 쪽은 최루탄을 쏘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현실이 싫었던거다. 그래서 데모를 할 때엔 늘 제일 앞에서 돌 던지지 말자는 선동을 하곤 했다. 아르바이트 문제도 그렇다. 남자의 부모님은 남자가 일을 안하면 학비를 주지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늘 무슨 아르바이트라도 해야했고 심지어는 학우의 등록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한적도 있다. 이 남자, 아무리 봐도 휴머니스트고 로맨티스트고 보헤미안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고 온실 속의 도련님이었거나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 프레임에 매몰돼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그 흔한 미팅을 한번도 못했다.(어쩌면 안한거다.) '내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될거야.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마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거야.' 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집안은 지방에선 유지소리를 들을만 했다. 정미소와 주유소와 쌀가게를 갖고 있었기에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오빠들과 언니들도 그녀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모두 독립했고 늦게 본 막내딸이었기에 누구나 그녀를 좋아했고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집안의 돌연변이 처럼 키크고 예쁘고 늘씬하고 그리고 응석받이였다. 그래서 돈 좀 써서 예술고등학교 무용과에 갔다. 돈 좀 썼다는 의미는 공부건 춤이건 실력이 안됐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건 그저 그녀의 허영의 한 표현이었을 뿐인거다. 대학엔 가지않았다. 굳이 대학 갈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필요한건 가질 수 있는 처지였고 1975년도의 시대에 그녀에겐 대학 입학 보다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동화 속의 공주님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 어떤 남자라도 자신이 요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녀가 좋다고 쫓아 다니던 남자들이 당시 버스로 아마도 10대는 동원해야 그 수를 다 태울 수 있었으리라. 그럴수록 그녀의 콧대는 높아질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녀를 비난할 그 무엇도 사실은 명확하지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쫓아다니던 그 어떤 남자에게도 제대로 된 눈길 조차 주질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에게 세월은 쏜살보다 더 빨리 지나갈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운명의 1985년이 되었다. 집안에선 걱정이 태산이고 그 좋다던 혼처를 다 날려버린 막내딸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천하 태평이었던 것을 보면 보통 여자는 아닌 성 싶다. '사랑은 운명이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어.분명히 느낌이 오는 사람 있을거야. 없으면...? 말지 뭐. 둘째 언니도 결혼 몇 년 만에 이혼하고 혼자 잘 살잖아. 내년 쯤엔 언니 따라 미국에나 갈까?'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85년 12월 22일 일요일. 서울엔 솜털같은 눈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경북 Y군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곧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애인은 없고 눈은 내리고 센치해져서 훌쩍 동해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할 일도 없는데 나이는 먹어가고 춥지는 않고 처연한 느낌만 주는 회색 바다를 바라보다가 비마저 내리니 그냥 우울해졌지만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은 없다. 서울에나 모처럼 다녀올까 생각했다가 크리스마스가 곧 오는데 무슨 청승이람 하고는 그녀 집안에서 운영하는 주유소에나 나가보기로 했다. 그 주유소는 경치도 좋고 외지 사람들 표정이나 옷차림도 살펴볼 수 있어서 그녀가 자주 나가보는 곳이다. 주유소 소장 또한 아가씨 오셨다며 반기는 품새가 싫지는 않았던 이유도 있었으리라. 남자는 포항 쪽으로 차를 몰았고 여자는 주유소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차에 주유를 하기 위해 들렀고 계산을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어쩌면 이쪽을 쳐다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쳐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카운터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점심 때 무렵이라 그랬을까? 아무튼 그 남자는 만원 짜리 석장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돈을 받았다. 잠깐만. 돈을 주려고 내민 손과 받으려는 손이 스쳤다. 그 남자와 그녀의 시선 또한 얽혔다. 그 순간이 시간으로 얼마나 걸렸을까? 1초? 2초? 그 남자에게 사실 물리적 시간은 그 때 만큼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남자의 눈빛에서 어떤 감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얘 좀 이상한데?'

인생,그래도 살아봐야 되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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