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현실도피가 아닌 인생 그 자체

1/1-2 여행 기록 1. 우아한 순간, 설레는 순간은 언제나 짧다 벼르고 벼르던 보름 간의 스페인 여행의 시작은 좋았다. 창가 자리에 앉았고 몇 달 간의 계획과 노력이 드디어 실현된 순간이었고 여행의 가장 중요한 변수라 생각되는 날씨도 체력도 다 좋았다. 새해 첫날이라 어마어마한 인파가 공항에 몰릴 것이라는 위협적 예측 보도와 달리 사람도 그렇게까지 많진 않아서 괜히 일찍 간 나는 세 시간 전에 출국 수속에 면세품 인도까지 다 마쳐 버렸다. 남은 시간 동안 일기나 쓸까 하다가 카페 베네에 빈자리를 발견,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앉았다. 어젯밤부터 짐싸고 일찍 일어나느라 고단했기에 나름 한가하고 우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거니 하며 한 모금 마신 순간, 청천벽력과도 같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 우아한 시간은 오 분도 누리지 못했고 커피는 한 모금밖에 못 마섰다. 비행기가 무려 네 시간이나 지연되었다는 아시아나 항공의 문자는 아무런 이유 설명도 없이 다소 무례하기까지 했다. 가서 항의를 해도 내 환승 시간이 최소 환승 시간인 한 시간 이십분 이상이기 때문에 어떤 조치도 취해줄 수 없다는 건조한 답변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는 4시에 바로 출발하지도 않았다. 결국 제 시간에 환승을 못할까봐 계속 맘을 졸여야 했다. 경유 장소인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열 시간의 비행 역시 만만치 않았다. 확실히 대학생 때와는 몸이 달라진 건지, 그 땐 낯설고 먼 곳으로 간다는 설렘이 더 컸던 건지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초반 몇 시간은 괜찮았지만 첫 번째 기내식을 먹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부턴 정말 딱 죽을 것 같았다. 꼬박 열두시간 가까이 가만히 앉아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게 만만치 않다. 의자에 밤새도록 앉아 밤을 새우는 셈이다. 원체 예민해서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은 안오지, 시간은 안가지, 엉덩이와 등은 너무 배긴다. 수천 미터 상공의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다. 잠깐 움직이려 해도 양 옆, 앞뒤로 콩나물 시루같이 빼곡이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번 여행 처음으로 깨달았다. 여행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현실의 더 깊숙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멀고 힘든 여정일수록, 혼자일수록 더더욱 현실의 견고한 맨얼굴에 부딪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무려 20분이나 연착했다. 따라서 내 환승시간은 그들이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최소환승시간에 육박하고 있었다. 직원이 환승지를 안내해줄 거라는 약속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내 질문에 본인들은 모르니 내려서 요청하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다행히 앞에 선 한국 사람이 자신도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해서 함께 나섰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은 든든하고 힘이 된다. 어쨌든 무사히 경유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도 역시 20-30분 늦게 출발한다. 두 번째 비행은 정말 지친다. 정신없이 자다가 귀찮고 졸리는데 기내식을 줘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그 뒤의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겨우 '견디다가' 도착. 도착 예정 시간보다 이미 오십분을 넘겼기에 밤 열두시 반의 늦은 시간이다. 2. 현실보다 더 엄혹할 수 있는 것이 여행 - 스스로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 늦은 밤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 민박(엔마드리드 한인민박)에 픽업 신청을 해두었는데 현지 유심을 끼우지 않아 연락할 방법이 없다. 여행 초반의 두 번째 악재는 이렇게 나의 첫번째 실수로부터 비롯된다. 민박 사장님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카톡이나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현지 유심을 살 수 있는 곳은 이미 문을 닫았을 것을 계산 못했다. 이렇듯 여행 전의 미흡한 준비는 현지에 갔을 때 시간과 돈이 줄줄 새는 주머니로 되돌아온다는 무서운 진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화는 로밍 신청을 안해서인지 전혀 되지 않았고 급기야 동전을 찾아 공중전화기에서 통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통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 발만 동동 구르는데 폰이 울린다. 민박 사장님의 전화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이제 살았다는 기분으로 사장님과 직원분 두 분의 차를 탄다. 이젠 홀가분하게 쉴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은 출발 후 몇 분 뒤 지옥으로 곤두박질친다. 타국의 여행지에 가면 누구나 조금씩 어리버리해지는데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바보가 되기 시작한 것 같다. 카드 두 장과 115유로(한화로 15만원 정도)이 든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지갑이 없다.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보니 지갑에서 동전을 꺼낸 뒤 공중 전화 위에 두고온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두 분에게 사정 설명을 하니 되돌아가봐주긴 하겠지만 거의 포기하라고 한다. 여기는 있는 지갑도 빼가는 곳이라 흘리고 간 지갑을 있는 돈 그대로 찾기는 힘들 것이니 카드 정지나 시키라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몇 년 만에 기도가 나온다. 제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헐레벌떡 뛰어가니 공항 직원들이 퇴근을 준비하고 있다. 민박 사장님이 상황 설명을 하니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들어가서 찾으란다. 두리번거리는데 직원 책상 위에 내 지갑이 떡하니 있다!! 열어보니 고스란히 다 들어 있다. 승객 중 누군가가 갔다줬다고 한다. 사장님이 지갑을 고스란히 찾은 건 몇 년 만에 처음 본다고, 마지막 비행기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고 신기해하신다. 그리고 스페인에선 이래서 못다닌다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충고하신다. 사장님과 직원분께 거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약간의 사례금을 드렸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고 이분들 덕분에 살았다. 이때부터 나는 여행은 현실 도피가 결코 아닐 뿐 아니라 현실보다 더 엄혹하고 냉정할 수 있음을 깨닫고 혼자 이역만리에 있다는 사실의 고단함과 서러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누구도 옆에서 나를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나마 한인민박이라 지갑도 찾을 수 있었고 다음날 따뜻한 한식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3. 인생과 여행은 닮은 꼴 - 둘 다 변수의 연속!! 여행 초반의 악재는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마드리드 솔 광장의 보다폰 매장의 유심칩이 동난 것이다. 솔드아웃이라며 다른 데 가보란다. 유심이 없음은 정보 검색도 구글맵도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망연자실해서 두리번거리는데 오렌지 매장이 너무도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허겁지겁 들어서니 이미 길게 늘어선(대부분이 한국인인) 줄이 보이고 직원이 30-40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세상에나...ㅜㅜ 방법이 없으니 기다렸다. 유심을 겨우 받고 톨레도에 가면 오전 일정은 다 날아간다. 원래라면 톨레도에 가 있어야 할 시간을 길에서 낭비하게 되었다. 언젠가 지금은 변수가 생겨서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안 그럴 거란 친구에게 인생은 변수의 연속이니 지금 있는 변수가 앞으론 없을 거란 생각은 버리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변수의 연속이고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유심을 사기 위해 멍하니 서서 기다리는데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려온다. 가족, 혹은 친구, 연인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떠는 소리이다.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일정이 꼬여 속상한데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 난 굳이 이 먼 타국에 혼자서 겁도 없이 온 걸까. 외로울 줄, 힘들 줄 몰랐던가. 그리고 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독립적이고 강하고 주체적인 현대 여성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야 알게된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그저 평범하고 허점 많고 마음 약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저그런 여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나보다. 나는 새해 첫날 이 먼 곳까지 와서야 스스로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 첫날을 1월 1일 금요일로 잡은 것 자체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 사람들에게도 휴일의 연속이니 말이다. 결국 새해가 시작하자마자 훌쩍 떠서 여행지에서 낭만적인 새해를 보내고 싶다 생각한 안일한 생각에 젖은 나만 몰랐을 뿐 초반의 악재는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초반의 악재로(심지어 모든 유심이 다 팔리고 한달짜리 29.5유로짜리 밖에 없다 해서 기존 예상한 10유로보다 세 배나 지출했다) 찌뿌드드한 흐린 회색빛의 마드리드의 하늘은 내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심각하게 여행온 것을, 그것도 혼자온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몇 년, 아니 거의 십 년 만에 나를 가리고 있던 몇 겹의 가면이 벗겨지고 나는 스스로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다시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날 것 그대로의 생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볼 드물고도 비싼 기회를 얻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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