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소년의 이야기_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입니까?_20160121

춥다. 너무 춥다. 그 어떤 게으름도 면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다. 한동안 분리수거를 하지 못했다. 몇 일 전에는 환기를 시키려는데 전 날 내린 눈이 그대로 얼었는지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바닥에 벌여놓은 것도 딱히 없는데 괜시리 방까지 지저분해 보인다. 방 안 공기에 색깔이 입혀진 것 같았다.

느즈막히 일어난 탓에 눈 뜨자마자 점심메뉴를 고민해야 했다. 마침 쌀도 떨어져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날씨도 날씨인지라 뱃 속 뜨끈하게 잔치국수를 해먹기로 했다. 사실 잔치국수는 내게 소울푸드 같은 음식이다. 우리 집에선 일요일 점심에 유독 국수를 자주 먹었는고 아빠도 국수를 참 좋아했다. 그 때문에 엄마는 주말마다 소면을 삶으신건지 아니면 아빠의 입맛이 엄마에게 길들여진건지는 알 길이 없다.

우선 파, 마늘,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 양념장을 준비한다. 요즘엔 종종 내 칼 질에 놀란다. 함께 넣어먹을 김치도 송송 썰어두고 참기름도 잊지 않는다. 냄비가 하나뿐인지라 면은 미리 삶아두어야 한다. 평소 먹던 양만큼 집어 끓는 물에 넣는다. 그러다 항상 국물이 찰랑찰랑 그릇에 넘치도록 면을 담던 엄마의 국수가 떠올라 대략 1인분 정도 남은 것마저 모두 넣어버렸다. 양이 너무 많아서 이걸 어떻게 다 먹느냐며 투덜거렸었는데(물론 그러면서 다 먹긴 했지만..) 이제는 내가 가스불 앞에 서서 당신을 따라하고 있다. 물이 넘치려하면 찬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끓여주다가 채로 받쳐 건져내고 불지 않게 얼음물에 담가 둔다.

최종 관문 육수 만들기. 그럴만한 재료가 있던가.. 부엌 구석구석을 뒤져본다. 거의 다 먹어 가루만 남은 말린 황태, 씻어서 얼려두었던 대파 뿌리, 미소된장에 넣어 먹던 가쓰오, 그리고 천하무적 멸치분말이 있었다. 언뜻보면 어벤져스 같지만 사실은 족보도 없는 육수 재료들을 전부 냄비에 때려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오래 끓여야 맛이 제대로 우러날텐데.. 생각하다가 더 끓인다 한들 딱히 나올 것도 별로 없는 재료들인지라 적당히 끓이고 후후 불어 한 숟가락 떠 먹어 본다. 없는 재료였지만 다행인건 그래도 맛이 난다는 것인데 그 맛이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맛이라는 게 사소한 불행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래도 양념장이랑 김치가 있으니까.. 먹는동안 몸뚱아리 하나는 뜨실테니까.. 왠지 오늘은 환기를.. 분리수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86년에 태어난 대한민국 보통 남자. 작년에 가출 겸 독립을 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만 하루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읽기와 쓰기. 가장 노력하는 것은 내 삶의 주인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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