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최종 리뷰] 과거라는 판타지가 지나고 남은 것들

<응답하라 1988>이 끝났다.

18화에서는 정환이가 첫사랑에 안녕을 고했고,

19화에서는 덕선이의 남편찾기가 마무리되었다.

20화로 가족 이야기까지 끝이 났다.

덕선이와 택이, 선우와 보라, 그리고 정봉이와 노을이는 2016년으로 넘어왔지만

정환이, 동룡이, 그리고 쌍문동 봉황당 골목은 영원히 사라졌다.

수 많은 시청자들이 <응답하라 1988>의 종영 이후 마음이 먹먹한 것은, 단순히 드라마가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이 드라마에 응답했던 시청자로서

응팔의 결말에 대한 리뷰를 마지막으로 응팔을 보내려고 한다.

응팔은 끝났지만, 남편찾기의 결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인물의 설정만 놓고 보면 남편은 처음부터 택이일 수 밖에 없었다.

택과 덕선은 응칠부터 내려오는 이우정 작가의 일관된 판타지가 그대로 투영된 커플이다.

둘째딸로 서러움이 많은 덕선이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하는 존재다. 첫 회, 88년도에 가족들 앞에서 "왜 나만 성덕선이냐고" 서럽게 우는 덕선은, 94년에도 친구들 앞에서 "나 인기 많다고! 내가 찼다고" 반복해 외친다.

그런 덕선이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도 내가 1순위인 사람일 것이다. 내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인 바둑조차 콘서트를 혼자 볼 날 위해 망설임 없이 포기하고 달려오는 사람. "미쳤냐 내가 너를 비웃게" 농담으로도 자신을 비웃을 수 없는 사람, 택이.

반면 덕선이의 가장 사랑스러운 면 역시 둘째딸이라는 설정에서 나온다. 덕선이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9화, 중국에서 택이를 살뜰하게 보필하는 에피소드와 14화, 간질 환자인 반장을 챙겨주는 에피소드다.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게 사랑을 베푸는 편안함과 따뜻한 성품.

"사람들이 다 덕선이 좋아하잖아.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어"라는 보라의 말에서처럼, 덕선이는 택이의 결핍을 채운다. 이사와서 모든 것이 낯선 소년에게 첫 만남부터 사탕을 건네는 소녀를, 두통약 없이는 잠들지도 못하는 예민한 택은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성장해 진짜 가족이 된다.

응답시리즈를 관통하는 이우정 작가의 세계관이다.

일관된 세계관, 일관된 서사. 그런데 전작들과 달리 이번 응팔에서 시청자들이 이 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번 <응답하라 1988>에서 '인물의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윤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용기를 내 자신의 마음을 전했기에,

서로가 이미 정해진 운명의 짝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결정으로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반면 택과 덕선의 운명 앞에서 의지는 무력하다. 25살이 된 택이와 덕선이는 용기를 내서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개팅을 하고 선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 택이와 덕선이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두 번의 키스였다. 친구를 위해 마음을 접으려던 택이의 의지에 반해 몽롱한 상태에서 하게 된 첫 번째 키스, 그리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함께 있게 된 호텔 방에서 급작스럽게 알게 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키스.

인간의 의지가 외부 세계와 충돌할 때 서사가 만들어진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덕선이의 '끝사랑 서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남편 찾기의 결말이 펼쳐지는 19화, 덕선이가 고뇌 끝에 자신의 결정으로 택이에게 직진하는 모습이 그려져야 했다.

그러나 이우정 작가는 이 과정을 생략한 채 우연한 상황을 통해 두 사람을 맺어주었다.

19회 동안 끌어온 남편 찾기를 이토록 성의 없게 끝내버리고 이후 기나긴 시간 갈비집을 비춘 것은, 오랜 시간 덕선이가 끝사랑을 찾기를 응원하며 택이의 사랑이 응답받기를 바랬던 시청자들에 대한 불성실이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두 인물이 '시나브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우연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진짜 가족이 된다.

그래서 이 둘의 사랑은 동화처럼 아름다울지언정 완벽한 판타지로 남는다.

덕선이와 택이 운명에 의해 맺어졌다면, 보라와 선우는 자신의 의지로 서로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선우와 보라는 비슷한 상황만이 끝없이 반복될 뿐인 응팔에서 유일하게 성장을 이뤄내는 인물들이다.

어머니의 재혼을 통한 선우의 성장은 무성에게 그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전달하면서 완결된다.

아버지와 보라의 어색한 관계는 결혼식이 끝난 후 동일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완전히 해소된다.

이처럼 결혼은 두 사람 서사의 완성이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뚜렷이 나타내기도 한다.

선우와 보라의 성장 역시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전교 1등에 학생회장인 선우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고, 서울대생이었던 보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사법고시를 공부해 검사가 된다. 민주화를 향했던 보라의 열정, 열아홉 소년 선우의 꿈은 가족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설 곳이 없다.

그래서 선우와 보라가 넘어야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상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자신의 의지로 그 위기를 넘었기에, <응답하라 1988>에서 단 하나 제대로 된 서사가 있다면 선우와 보라의 이야기를 꼽고 싶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완결된 서사는 선우와 보라가 2016년의 현재로 올 수 있었던 이유다.

단, 그 현재는 가족으로만 이루어진 판타지 월드다.

<응답하라 1997>의 시원이는 방송작가가 되어 출연자에게 시달리고, 성재는 만년 대리다.

<응답하라 1994>의 나정이와 쓰레기는 이사를 했고, 윤진이와 삼천포는 빚을 갚느라 고생이며, 빙그레는 새롭게 병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이 보여주는 2016년 현재에는 현실은 사라지고 가족만이 존재한다. 택이와 덕선이의 오늘날 고민은 나오지 않으며,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관계성을 반복할 뿐이다. 선우와 보라 역시 남편 혹은 아내로서만 기능한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모습일지언정, 노을이 역시 덕선이의 가족이기에 현재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가네 가족이 아닌데도 현재에 생사가 확인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 정봉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백종원이 된 정봉이는 응팔이 그리는 2016년이라는 판타지 월드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2016년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매개채다. 그러나 오늘날, 덕후였다가 최고의 외식사업가로 등극한 집밥 봉선생은 가족만으로 이루어진 응팔월드보다 더한 신화적인 인물일 뿐이다.

덕선이와 택이의 예쁜 사랑에 미소지을 수 있었고,

보라와 선우의 성장을 응원할 수 있었으며,

정봉이를 아낄 수 있었지만,

내가 그들이 될 수는 없었다.

2016년의 진짜 현실에서 가족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응팔의 현재씬은 마지막까지 그 세계가 완전한 판타지임을 확인시킬 뿐이다.

한편, 현재로 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내가 될 수 있었던, 혹은 나의 것일 수 있었던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년, 김정환.

마지막까지 정환이는 18살의 소년 그대로였다.

19화와 20화, 정환은 택이에게 덕선이를 잡으라고 하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며, 선우에게 차가 고장났다고 거짓말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여준다. 속 깊은 둘째 아들. 항상 주변 사람들을 신경쓰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없는.

"사랑했다"가 아닌 "사랑해"라고 말한 정환이의 고백은 현재진행형이고, 이후 마음을 정리하는 모습조차 보여지지 않는다. 새로운 어떤 인연을 만나는 장면도 없었으며, 2016년 현재에 그는 어디에도 없다.

응사의 칠봉이도 응칠의 윤태웅도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우리와 같은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의 정환에게는 어딘가에서 다른 누구를 만나 잘 살고 있을거라는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작가와 감독은 철저하게 김정환을 과거에 박제해 버렸다.

그리고 홀로 1988년에 남겨진 정환이는,

아직도 그렇게 한 소녀를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 너."

"좋아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신원호 감독은 후반부 모든 회차의 퀄리티가 급격히 떨어지는 가운데

골목에서의 엇갈림, 액션영화를 방불케 하는 자동차 씬, 1화부터 시작되는 플래시백까지,

영혼을 갈아넣은 연출로 18화를 통째로 정환이에게 헌정했고

이우정 작가는 남편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역대급 고백 대사를 주었다.

이토록 공들인 인물이 현재로 올 수 없었다는 것은

제작진의 단호한 의지이자 응팔 세계관의 표현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과거에만 존재한다는.

<건축학개론>의 승민은 첫사랑과 재회하며 찌질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그리고 극복한다. 과거에 대한 성찰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제작진은 미화를 택했다.

그래서 김정환, 혹은 김정환이었던 수많은 이들의 첫사랑은 이해받고 공감받았을지언정

ize 강명석 편집장의 말에서처럼 "현재로 오는 출구는 없다".

동룡아 어딨니? 내 목소리 들리니?

현재로 올 수 없었던 것은 정환이 뿐만이 아니다.

한 반에 꼭 한 명씩은 있을 것 같은 친구, 동룡이 역시 증발해버렸다.

5인방 중 유일하게 러브라인의 바깥에 서 있던 동룡이는 우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94년의 덕선이는, 택이는, 정환이는, 그리고 선우는, 그들의 부모조차 얼굴 보기 힘든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친구들이 떠난 봉황당 골목을 동룡이는 홀로 지켰다.

18화에서 만취한 동룡이는, 이렇게 함께 있으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한다. 5인방과의 영화 약속을 기대하는 것은 동룡이 뿐, 친구들에게는 이제 다른 것들이 더 우선이다.

누구보다 친구들이 소중했던 동룡이.

공부는 못했지만 춤을 좋아했던, 형과 함께 고깃집을 운영하던 동룡이.

'나'일 수 있었던, 혹은 '내 친구'일 수 있었던 동룡이는

쌍문동 5인방의 우정과 함께 영원히 과거에 남겨졌다.

쌍문동의 이웃들 역시 2016년의 현재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응팔의 마지막회, 우리 눈에 펼쳐진 것은 모두가 떠나 폐허가 된 쌍문동이었다.

차례로 쌍문동을 떠난 이웃들의 생사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골목은 부서지고, 그들이 살았던 곳은 그렇게 텅 빈 채 남겨진다.

실제 2016년 쌍문동 그 골목은 아파트가 들어섰든 집이 팔렸든 다른 누군가의 삶의 터전일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집요하게 스러져가는 골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덕선이의 눈물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막을 내린다.

<백년의 고독>의 마콘도처럼, 1988년의 쌍문동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그렇게 사라졌다.

현대씬에서 부모님을 포함해 거의 모든 주요인물들이 등장해 하하호호하는 응칠, 응사와는 대조적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쓰이는 오늘, 제작진이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었을까 변명을 해주고 싶지만. 꼭 이렇게 잔인하게 소중한 모든 것들이 '환상' 혹은 '과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못박아야 했을까.

폐허가 된 쌍문동을 통해, 현재로 올 수 없었던 정환이와 동룡이와 이웃들을 통해, 과거로 회귀해 눈물을 흘리는 덕선이를 통해 드라마는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설레는 첫사랑도

소중한 친구도

따뜻한 이웃도

정겨운 골목도

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지금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그 시절이 그리운 건, 그 골목이 그리운 건, 단지 지금보다 젊은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곳에 아빠의 청춘이, 엄마의 청춘이, 친구들의 청춘이, 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한 데 모아놓을 수 없는 그 젊은 풍경들에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에,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에 뒤늦은 인사를 고한다. 안녕. 나의 청춘. 굿바이 쌍문동"

<응답하라 1988>은 삶에 대한 찬가가 아니라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는 구슬픈 연가였다.

과거라는 환상이 지나간 마음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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