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소년의 이야기_커피를 마시고 part.1_20160303

매일 아침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조금은 달라직 시작. 직장을 그만두고 자취를 막 시작했을 때는 달라붙는 게으름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아침부터 요란을 떨곤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낙오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던 때였다. 6개월 전 일이다.

침대 곁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켠다. 음악을 걸고 지난밤 보지 못한 예능과 드라마를 한두 편 내려받는다. 요즘엔 시그널이 그렇게 재밌다. 여기까지 마치면 그제야 뭉그적거리며 이불 속을 빠져나와 싱크대로 향한다. 밀린 설거짓거리가 있다면 해치우고 얼마 전 알라딘에서 받은 배트맨 머그잔과 함께 돌아온다. 커피콩 한 스푼 반을 그라인더에 갈아 프렌치 프레스에 옮겨 담고 물을 천천히 떨어뜨려 붓는다. 4분. 기다리는 동안, 너무 커서 그대로 토스터에 넣으면 2/3 정도 밖에 들어가지 않는 식빵 한 장을 반으로 잘라 굽는다. 하나는 피넛버터, 다른 하나는 오렌지 마멜리이드를 펴 바른 노릇한 반쪽짜리 빵 두 장,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예전과 조금은 달라진 내 방의 아침 풍경에서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커피일 것이다. 지금은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커피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계기는 졸업 후 친구의 권유로 산 더치커피 추출기구였다. 경제적으로 큰 부담도 아니고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취미라고 생각해서 야심 차게 구입한 그 기구는 지금 서울 부모님 댁 내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있다. 설렘 속에서 이뤄진 첫 만남에 비해 초라했던 이별에는 이유가 있었다.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쩜 이렇게 사람이랑 똑같은지…. 그라인더에 원두를 가는 일은 우아하기보단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중노동이었다. 속았구나…. TV 속에서 미소를 한껏 머금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라인더 핸들을 돌리던 공유는 '존나구라'임이 밝혀졌다. 그때, 기대만큼 아름답지 못했던 현실의 벽에 부딪힌 나의 눈에 띈 새로운 아이템이 있었으니….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프렌치 프레스이다

이놈은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우선 원두를 굵은 소금 정도의 크기로 넉넉하게 갈아야 하기 때문에 핸들을 몇 바퀴만 휙휙 돌려도 금세 끝이 난다(이건 정말 엄청난 장점이다. 난 요즘 순전히 콩 가는 게 힘들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카 포트를 사지 않고 있다). 만드는 것도 거의 하루 온종일 걸리는 더치와는 달리 3~4분이면 충분하다. 그동안 스멀스멀 올라와 은은하게 퍼지는 향도, 맛도 기가 막히다. 물론 그중 가장 맘에 드는 건…. 하워드 슐츠가 매일 아침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도구라는 사실…. 어때? 있어 보이지?? 약간의 허세는 삶에 작은 재미를 더하는 법이다. 너무 뭐라 하진 말자.

커피에서 허세를 뺄 수 있을까? 요즘은 가격을 많이 따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커피야말로 이미지를 파는 대표적인 상품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있어 보임'!! 쓴 커피를 마실수록 뭔가 더 세련된 거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각 나라에서 재배되는 원두들의 특장점까지 줄줄 읊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나도 그랬다. 시럽 없이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그제야 어른인 것 같았다. 그 쓰디쓴, 차디찬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게 된 것처럼. 그랬던 내가 이제는 에스프레소도 홀짝홀짝 잘만 마신다. 그런데 친구들은 내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웃는다. 왜 웃지? 나는 모른다. 모를란다.

지금은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며 커피를 마시진 않는다. 아무도 봐주지도, 묻지도 않지만 마신다. 방구석에서. 몰래. 나 혼자. 언제부터였을까. 커피믹스의 단맛에 길든 내 입에 마냥 쓰기만 하던 것이 상큼함, 달콤함, 쌉싸름함, 가벼움, 풍부함, 묵직함…. 이런 단어들로 다가온 날이. 예전보다 나는 훨씬 다양한 향을 느끼고 더욱더 커피를 즐기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품종의 향이 어떻고 특색은 어떻고 하는 건 모른다. 다만 이런저런 원두와 커피를 겪어가며 '아…. 이건 어떻구나', '이건 이게 좋구나….'하고 느낄 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선호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여기 커피 맛 좋다'라는 말을 하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다.

86년에 태어난 대한민국 보통 남자. 작년에 가출 겸 독립을 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만 하루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읽기와 쓰기. 가장 노력하는 것은 내 삶의 주인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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