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가 '퀴어'하지 않은 시대를 기대하며

[뉴스에이드 = 안이슬 기자]'캐롤'의 누적관객이 30만 명을 돌파했다. 다양성영화 중 꽤 성공적인 수치다.숫자도 놀랍지만 더 유의미한 반응이 있었다. 관객들이 '캐롤'을 웰메이드 멜로영화로 받아들였다는 것과 언론이 '캐롤'의 흥행을 두고 '흥행퀴어'가 아닌 '아트버스터'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는 것. 단어 하나의 차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무언가가 주류문화로 스며들 때 몇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개념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이를 수용하며, 어느샌가 '특이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 이를 퀴어에 적용해보자면 액션영화에서 거칠게 주먹을 날리는 주인공이 게이라고 해도 '왜?'라고 의문을 품지 않게 되는 정도가 되겠다. 21세기가 도래한지 무려 16년이 지나 '캐롤'이 흥행하고 '대세는 백합'이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지금, 우리 대중문화 속 퀴어는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 관객은 변했다

동성애 그 자체가 핸디캡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있었다. 2002년 '로드무비'가 개봉했을 때, 신문 리뷰에는 대부분 '남자와 남자의 사랑', '동성애를 다룬 문제작' 등의 멘트가 따라 붙었다. '왕의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던 2006년에도 꽤 많은 기사에서 '동성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라는 글귀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왕의 남자' 이후로 10년이 지났다. 시네필과 20대~30대 젊은 여성 관객들을 중심으로 '성적취향'의 장벽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변해가는 사랑의 감정과 한 여인의 성장을 섬세하게 다룬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고,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덴마크 화가의 실화를 다룬 '대니쉬 걸'이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해외 작품 만이 아니라 국내 영화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 '도희야' 속 주인공 영남(배두나 분)은 레즈비언이지만 관객들은 이 작품을 '동성애 영화'로 인식하지 않는다. 성적취향이 주인공의 캐릭터를 이루는 것들 중 하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보는 이들은 이에 대해 '파격'이라며 요란 떨지 않는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최소한 이제 극의 화자들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차이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관객들은 소수자가 겪는 사회문제를 넘어 한 개인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퀴어의 소재가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문제'에서 더 확장되면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석탄광산노동자들과 성소수자들의 아름다운 연대를 그린 영화 '프라이드'와 구류 후 출소해 바람난 애인과 그 상대에게 한 방 먹이려는 트랜스젠더의 하루를 담은 '탠저린'처럼 말이다.

여전히 성소수자들이 등장하는 많은 시나리오들이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기대를 거는 건 최소한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인 '하이힐'이 메이저 배급사를 통해 개봉하고(비록 흥행은 아쉬웠지만),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아가씨'가 제작될 수 있는 분위기는 형성됐다는 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캐롤', '대니쉬 걸',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등 수작들로 열린 관객들의 마음을 저격할 한국 작품이 근시일 내에 등장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 주류와 변방의 온도차

TV는 보수적인 매체다. 돈을 내고 내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영화에 비해 접근성이 좋은 매체이다보니 '보편성'을 강조한다. SBS '인생은 아름다워'를 본 일부 학부모들이 "드라마 보고 내 아들 게이되어 에이즈에 걸리면 책임질 것이냐"며 신문 광고를 냈던 것이 불과 6년 전일이니 말 다했다. 태섭(송창의 분)과 경수(이상우 분)의 이야기는 가족들이 동성애자인 아들과 그 연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으며 호평을 받았고, 그해 연기대상 시상식 베스트커플상 후보에도 오를만큼 인기를 얻었음에도 긍정적 반응은 논란에 가려지곤 한다.

여전히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단막극을 통해 주로 다뤄지고, 그나마도 시청자들의 항의와 더불어 '자체 검열'을 거친다.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다룬 단막극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 방송됐을 때 KBS는 한차례 난리를 겪었다. MBC 단막극 '형영당 일기'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 반 동성애 단체들이 항의를 했던 것도 겨우 1년 4개월 전의 얘기다. (MBC '오로라 공주'는 논외로 하겠다. 게이와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의 구분조차 모호한 이상한 설정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방송사들이 시청자 항의로 움츠린 사이 케이블 방송사와 종합편성채널은 보다 적극적으로 퀴어 코드를 차용했다. tvN의 '우와한 녀'는 아들의 남자 가정교사와 눈 맞은 앵커를 주인공으로 삼았고(설정은 이러했으나 반전이 숨어있었다), Mnet '더 러버'의 타쿠야(타쿠야 분), 준재(이재준 분) 커플은 그저 브로맨스로 끝날 줄 알았던 시청자들의 예상을 깨고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결말을 내놓았다. JTBC '선암여고 탐정단'은 김수현 작가마저 포기해야했던 동성 키스신을 방송했다. 방통위는 이 신을 두고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한편에서는 방통위 결정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케이블 채널보다 조금 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웹드라마는 조금 더 과감하게 나섰다. '대세는 백합'을 보라.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백합물'은 여성 동성애 로맨스물을 칭하는 단어다) 그 짧은 분량 안에 키스신이 수 차례 등장하고 조금 더 진한 애정신도 등장한다. 작품의 톤은 날아갈 듯 가볍지만, 그럼 또 어떤가. 대놓고 '이건 백합물이야'를 전제로 깔고 가는 작품인데! '대세는 백합'의 총 조회수는 287만 건이다(15개 클립). 빅뱅의 탑과 우에노 주리가 주연을 맡은 '스크릿 메세지'가 220만 건(39개 클립)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 인기가 실감날 것이다.

#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게이보다는 레즈비언이, 레즈비언보다는 트랜스젠더가 상대적 약자로 규정된다(미국에서는 여기에 인종까지 더해진다). 문화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남성 동성애를 다룬 작품에 비해 여성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 현저히 적고, 트랜스젠더를 다룬 작품은 더더욱 찾기 힘든것이 현실이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다.

현실이 이러할 지언정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여성 정치인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지금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이는 특별한 것이었다. 주말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등장할 것이라고 20년 전 누군들 생각했을까. '퀴어'를 퀴어(queer 기묘한, 괴상한)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는 분명히 온다.

장벽을 무너트리려거든 누군가는 계속해서 부딪쳐야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움직이면 이는 조금 더 빨라진다. 새로운 시도가 있을 때 마다 논란은 계속 될 것이고, 점점 그 목소리는 작아질 것이다. 미디어 사업을 주도한다고 믿는 이들은 선택해야한다. 안락한 '꼰대'로 머물러있을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말이다.

사진=영화 '캐롤', '대니쉬걸', '프라이드' 스틸, SBS '인생은 아름다워' 현장스틸, '대세는 백합' 포스터

안이슬기자 drunken07@news-a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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