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 인터뷰] 행궁에는 그녀가 산다, 거침없이 예술적으로

미지공방전 #1 - 작가 '현지윤' 인터뷰

작년 3월 하순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상고머리를 틀고는 “저는 드로잉쇼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분이 쌓이고 있던 어느 날에 갑자기 그녀는 “나 영화를 만들고 있어”라고 했고 나중에는 그 영화의 상영회에 초대했다. 그녀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다가 “여행에서 그린 그림으로 드로잉북을 만들었으니 사달라”는 글이 뜬금없이 올라오곤 했다. 오랜만에 점심 약속을 잡고 만나면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프린팅한 에코백을 깜짝 선물로 줬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담아서. 지난 6월에는 인사동의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자신의 다큐 영화와 그림이 걸린 첫 개인전을 열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독립영화의 배우로 분했고 지금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현지윤.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부인’의 감독이자 인도를 여행하며 드로잉한 것을 직접 책으로 엮어낸 작가이자 수원 화성 행궁에 위치한 ‘코뿔소 스튜디오’의 주인장이다.

화성행궁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예술을 하기 위해 공간을 꾸린 사람들이 많다. 개인 작업실을 얻기 위해 서울 곳곳을 다녀 봤지만 마음에 차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꼭 서울일 필요가 있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하기에 비싸기도 했지만 여전히 내 작품의 주인공이 가족인데 그들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내 마음을 끄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좀 더 집요하게 관찰해 이전 작업들에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음 작품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인 이곳에 코뿔소 스튜디오 간판을 올렸다. 덕분에 집밥을 꼬박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근데 공방들 만큼 점집도 많이 보인다

사실 내 스튜디오는 점성촌에 위치해 있어 공방들 보다 점집이 주변에 훨씬 많다. 옆집에는 고운 무당언니가 살고 있다. 19살 짜리 박수 무당도 이웃이고 더 어린 소녀 무당도 산다고 한다. 엄마가 스튜디오 주변을 보고는 “이런 곳에 살 수 있겠니” 라며 걱정하길래 “내 사주가 무당보다 세다”고 대답했다. 정말 사주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참 편하게 느껴진다. 사방팔방 욕을 하시며 거리를 돌아다니시는 분도 있다. 캐릭터가 강한 분들이 많아서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가끔 무섭기도 하다.

왜 스튜디오 이름이 ‘코뿔소’인가?

아빠가 어렸을 때 생일 선물로 주신 코뿔소 인형이 모티브다. 당시 아빠가 내 생일에 술에 취하셔서 늦게 들어오셨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까칠한 턱수염으로 내 볼을 비비던 그 촉감과 술냄새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허리춤에는 코뿔소 인형을 끼고 오셨는데, 연보라색과 노란색이 섞여 촌스러웠고 뿔이 굉장히 모나 보였다. 그 인형을 그렇게 잊었다. 스물 한 살 되던 해에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3년 뒤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먼지를 뒤집어 쓴 코뿔소 인형을 발견했는데,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 중에는 유일했다. 묘하게 정이 갔다. 아빠 대신 날 지켜주는 것도 같고.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정말 뚝심 있게 세상을 잘 헤쳐나가고 싶었다. 아, 그리고 동물원을 방문했다가 코뿔소가 맹수 우리에 있는 것을 보았다. 맹수 무리에서 함께 공존하다니 정말 멋있지 않은가. 거기서 이름을 ‘코뿔소’로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말하니 다소 끼워 맞추기인 것 같은데 진짜다.

작품에 가족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함께 살고 있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이모할머니, 나의 할머니들이 주인공이시다. 직접 그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전달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부인’이 2014년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단편영화 경쟁부문에 오르기도 했다.(‘사부인’은 지난 5월 제 20회 인디포럼 신작전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보다시피 지금도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너무 가족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아직은 가족, 특히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내 안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계속 가족 이야기만 할 생각은 없다. 아직 다음 주제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외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스스로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외할머니는 "나는 너래면, 아주 그냥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겄다. 너래면, 날씬한 몸매에 비행기 타구 돌아다니고 싶다. 여기서 살지두 않아. 위험하지만 않으면 세계각국 다 돌아 댕기고 좋지" 라고 말하시는 분이다. 나에게 ‘패기’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작년만 해도 내 활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시곤 했는데 지금은 몸이 안 좋아지셔서 잠을 많이 주무신다. 할머니들의 1년이 나의 1년과 같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요즘 할머니 껌딱지처럼 지내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엄마와 인도 여행 중 그린 드로잉을 엮은 책도 인상적이었다.

20대 초반에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일이 잦았다. 여행 떠나기 전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때였다. 일상 속에서 상실감을 안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엄마와 훌쩍 떠나게 되었다.

왜 인도였는가?

인도의 갠지스강을 보고 싶었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싶었다. 고민이 많을수록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확장시키는 편인데, 편하고 안락한 여행보다는 고생하는 배낭여행을 택했다. 이런 방식의 여행에 엄마께서 동의해 주셔서 가능했던 여행이다. 갠지스강에 가서 많이 울고 와야지 하고 갔는데, 갠지스강에 도착하기도 전에 울었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배낭을 매고 엄마를 이끌고 다니는데, 어느 순간 엄마 손을 잡을 힘도 없어졌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내가 아프거나 힘들어지면 엄마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두렵고 외로웠다. 인도 여행하는 동안 이동거리가 길다 보니 혼자 생각할 시간도 많아졌다. 야간기차를 타고, 버스도 타고 그 시간 동안 내 생각과 의식의 흐름대로 무언가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나 일기, 기록을 강박적으로 하는 편인데 여행하면서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드로잉북은 이 기록들을 누군가와 공유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서 독립출판을 하게 되었다.

드로잉북 인도편을 2쇄까지 찍었다. 다른 나라 시리즈 제작 계획은 있는가?

아마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기록을 꾸준히 남기겠지만 당장 계획은 없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다음 전시회도 기대된다.

6월에 첫 개인전 '사부인'을 6일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정말 전시회를 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약 300여명의 관람객들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외로움’, 위로에 대한 ‘갈증’ 이었다. 어떤 70대 할머니 관객께서는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달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이 한마디가 아직도 묵직하게 남아있다. 전시회는 영화 작업과 또 다른 매력이 있어서 언젠가 또 진행할 것이다. 그때 꼭 초대하겠다.

내년이면 서른 살이다. 30대는 어떠할 것 같은가?

청개구리 같은 20대를 보냈다. 20대를 돌아 보면 어른들 말을 안 듣길 잘한 것 같다. 물론 어른들 말씀이 대부분 맞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실패하더라도 후회나 미련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알게 되었다. 서른 살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앞으로도 꾸준히 무언가에 도전하고 배울 것 같다. 일상은 지금처럼 흐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과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30대에는 좀 더 단단하고, 유연하고, 지혜로워지길 바란다.

미지공방전 아티스트 인터뷰의 첫 주자였다. 한마디 남겨달라.

우리 모두 더 두둑한 배짱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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