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다음은 돈에 '타락'하는 여자라...

토마스 만의 단편을 읽고... 토마스 만은 민족주의자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성, 국민성 탓일까? 토마스 만은 독일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친다. 물론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사실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은 포크너에 비하면 값싸게 느껴진다. 사심이 많이 들어간 연설이다. 현재까지는 소설 자체도 그다지 경이롭지 못하다. 오히려 평이한 것 같은데... 토마스 만의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 결론은 죽음. <키작은 프리데만 씨>는 절망으로, <행복에의 의지>는 성취와 기쁨으로.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삶의 일부라고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등장인물의 죽음은 편의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결말의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라는 것, 이로써 토마스 만의 작품이 통속적이며 쉽게 씌여진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아니라면 애매모호한 열린 결말을 싫어하는 작가라는 것... 이런 것들이 보인다. 그 유명한 <토니오 크뢰거>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어 봐야 이 사람, 토마스 만을 알 수 있을 터이다.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의 대표 단편이다. 포크너의 소설을 읽고 난 뒤라서 그랬을까? 진부하다는 느낌,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와의 대화는 길고 지루하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를 통해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한 소설에서 이런 장황한 대화가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더구나 단편에서... 단지 자신의 고뇌를 주인공을 빌려 호소하는 것 밖에 다름 아니다. 고향에 잠시 들린 토니오가 사기꾼으로 몰리는 장면은 뜸금없다. 읽고난 감상은 이야기는 없고 작가 자신만 있다는 것. 내가 <토니오 크뢰거>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옮긴이는 말한다. 소설 하나하나가 곱씹어볼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소설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이건 소설의 형식을 차용한 에세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야기가 부재한 소설은 알맹이 떨어진 깍정이에 불과하다. 이야기를 통한 간접적 문제제기가 소설의 매력일 터인데, 주인공인 화자가 그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파고든다. 거기에 독자의 공간은 없다. 주인공에게 끌려갈 뿐... 노벨상 수상 작가를 내가 어줍잖게 평하게 되다니... 단편의 느낌은... 대부분 넋두리다. 삶이 평탄치 않은 가난한 무명 소설가의 예술이라는 고뇌의 탈을 쓴 넋두리. <베니치아에서의 죽음>을 끝까지 보기 전까지 또 판단 보류. 하지만 자서전 같은 이 소설들을 보고 있어야 하나? 그의 소설의 소재가 너무 협소하다. 죽음과 예술가, 그것도 글을 쓰는 작가. 소재의 선택이 이렇게까지 진부할 수가 있을까? 번역문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도 없었다. 번역문의 잘못도 있는 듯하고, 미루어 짐작하건데 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의 죽음으로 끝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그리스 신화를 가져다 쓴 뭐 그냥 그런 작품이다. 휴~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서 많은 사상과 문학적 성취를 끌어낼 수 있겠다. 허나 그건 만들어진 것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역시 이야기는 부재하고 작가의 에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주제는 어린 소년에 대한 노인의 동경이라 할 수 있으나 개연성은 떨어지는, 독자에게 '왜, 하필?'이라는 의문만을 던지는... 이 사람의 장편, <마의 산>을 읽어야 이 사람을 제대로 알려나? 번역이 문제인가? 아니면 <마의 산> 출간 후에 받은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부덴부로크가의 사람들>만이 언급되어 당황했다는데, 그것을 읽어야 할까? 노벨상 수상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단편까지 출판된 것이 잘못인 듯하다. 이 책에 실린 토마스 만의 단편들은 쓰지 말아야 할 견본을 뒤적이는 차원으로 인내하며 보았다. 시로코와 바포레토는 기억하고 가야지. 시로코는 지중해지역으로 부는 온난습윤한 바람인데 모래와 먼지를 몰고 오기도 한다니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가 느꼈을 불쾌함을 알겠다. 바포레토는 베네치아와 리도를 오가는 수상 택시란다. 여러 사람이 타는 곤돌라 보다야 쾌적하겠다. 그래서 아센바흐가 곤돌라가 아닌 바포레토를 타고 가려한 모양이다. <타락>에는 출처도 없는 말이 등장한다. '그녀의 유쾌한 웃음에는 마치 뚱뚱보 아빠가 앞쪽 관객석을 향해 막(?)모저풍의 익살을 선보이는 듯한 연극적인 냄새가 약간 풍겼지만, 그조차도 황홀했어...' - 막모저풍? 막 모저풍? 이 말이 뭐지? 웨이트리스를 '급사'라고 번역을 했다. 왠지 어색하고 저급해 보인다. 다른 용어가 없을까? 이 소설은 액자소설이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단순해서 명확한 소설. 사랑과 성을 소재로 한 그나마 이야기가 존재하는 잘 읽히는 소설이다. '오늘은 사랑으로 타락한다면, 내일은 돈으로 타락할 수 있는 게 여자'라고 그럴까? 그렇다면 남자는? '남자는 명예와 권력으로 타락하고, 다음은 성으로 타락하는 즉물적 양심의 소유자'가 아닐지... 독일인들의 생활상이 언뜻 보인다. 그들은 남의 집을 방문하면 30분이 기본인가 보다. 1시간을 넘기면 큰 실례로 아는 것 같다. 일단 소설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레르헨베르크 산책로에서 벌어지는 연작 같은 이야기 세 편, 모두가 결론이 죽음이다. 물론 <어릿광대>는 생각의 죽음이지만... 소설이 대체로 비관적이고, 음울하고, 냉소적이고, 회의적이다. 12편의 소설 중에 7편이 결말이 죽음이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죽음이 소재이고, 등장인물도 제한적이고. 내용은 신세 한탄에 에세이 수준,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오자도 몇 군데. 명성에 부족한 단편집이어서 대단히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1920년대, 그 시대 속 독일을 이해하지 못해서였을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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