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

제목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한강의 기적’은 전쟁폐허에서 50년 만에 아시아의 강국으로 일어난 전례 없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일컫고, 다른 하나는 최근 맨부커상 수상으로 들썩한 ‘한강’ 소설가의 기적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같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며, 유사한 ‘부작용’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강 소설가의 수상 소식은 축하할 일이지만, 연신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꼴이 마치 충분한 정치철학을 얻지 못한 채 고도의 성장을 해버린 우리나라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문학계의 이슈들은 평소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다가 ‘권위 있는 상’ 하나가 마치 온 국민의 가장 중요한 일로 갑자기 포장된 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아사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문인들이 있는 환경에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성과주의’다. 성과가 있다면 똥통도 마다하지 않는 근성으로 힘겨운 일을 해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함께 안게 되었다. 성과가 없는 모든 것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성과만능주의’를 낳은 것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대개 근대화 과정이 짧고 고도성장을 이룬 국가들이라면 이러한 경향이 짙다. 이런 경향이 문학계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묻는다면 몹시 상관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한해 주요 신문사와 공인된 계간문학잡지의 신인상 등단으로 등단하는 인원은 5급 국가고시 인원보다도 적다. 하물며 심사평에 언급되는 2등, 3등은 등단자와 수준이 비슷하거나 어떤 아쉬운 이유로 탈락되었어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기가 막힌 사례중 하나는 수차례 같은 신문사에서 심사평에 들었던(3위안에 들었던) 이가 결국은 ‘작가’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때 문단에서 2위, 3위에게도 등단 기회를 줘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기도 했으나, 문단의 권위와 순수성을 위해 이를 희생한다는 보수적 측면이 더 크게 작동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되지 못한 이들이 뭔가 글감을 얻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가 레옹을 향해 말했듯이 그야말로 “사랑이 아니면 죽음”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어렵사리 신춘이나 문예지로 등단의 기회를 얻은 작가라도, ‘글 바구니’를 얻지 못해 변변찮은 생활을 영위하다 작품 활동을 못하고 아예 작가생활을 포기한 채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평론가로 빠지는 일이 많다. 그토록 치열한 사유와 고뇌를 통해 신춘문예에서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그야말로 혜성처럼 사라지는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문학계에 만연한 ‘성과주의’의 단연 최고봉은 ‘신경숙 사태’였다. 굴지의 문학가를 일으키기 위해 작가의 표절도 전문가를 투입해 방어하려는 시도는 참담하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대 문학권력에 좌지우지되는 평단에서 함부로 소신 발언을 할 수 없는 영향을 고려하면 이 폐해가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현 문단의 모럴해저드는 응모된 작품을 훔치는 막장 수준에 치달았으며, 성공한 문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의 별이 뜨기 위해 수없이 많이 파괴된 별들에 대한 관심 따위는 없다. 실패했으니 그냥 알아서하라는 식이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갈급하고 있는 성과주의식 사회도 정작 이에 대해 미미한 관심을 보여준다. 마약중독자도 이를 구제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이 있는데, 젊은 문인들에게 이런 안전망 따위는 이미 개밥으로 준지 오래다. 일전에 성석제 작가의 강연회에 찾아갔다가 나는 섬뜩한 광경에 놀랐다. 수많은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성석제 작가는 '아사(餓死:굶어죽다)'를 운운하며 문학적 꿈을 마구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나라를 빼앗긴 충신이 제 손으로 가족의 목을 치는 비탄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일 시스템이 미워서다. 아마 나였어도 만일 진지하게 문학의 꿈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 문학계만의 문제는 아니고, 사회 전반에 전염병처럼 퍼져있다. 오히려 문학계는 체육계에 비하면 사정이 양호한 편이다. 세계최고기록을 가진 선수들을 파벌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히려 공격하는 다양한 체육협회들은 성과주의의 새로운 변종인 ‘변태성과주의’에 물들어 있을 지경이다. 이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암흑 그 자체다. 성과주의의 폐해가 낳은 대표적 사례는 ‘국민 먹튀’라는 오명을 쓴 우주인 이소연씨다. 한국인 최초로 우주인이 되었으나 그녀는 몇 년간 강연을 전전하다 끝내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표면만 보면 혈세로 스펙을 쌓아 개인의 이익을 취한 것 같지만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물론 그렇다고 이소연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인을 쏘아 보냈다는 성과 하나를 이룬 뒤에 항우연은 이 우주인을 활용할 어떤 체계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우주인이 되어 돌아왔는데 졸지에 애물단지가 된 이소연은 딱히 활용방도가 없자 강연만 다니게 되었다. 거의 3일 중에 2일은 강연이었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이었다고 한다. 연예인으로 치면 데뷔는 했는데 음반은 내지 않고 자기 노래도 없이 행사만 뛴 것이다. 사례가 다른 곳으로 많이 튀었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의 속성처럼 성과주의는 중간을 낳지 않는다. 어떤 경제든 중산층이 빈곤하면 경제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데, 특히 슈퍼경영자와 환원 없는 슈퍼상속자들에 의한 ‘돈맥경화’의 지속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처럼 1등이 되지 못한 ‘그에 준하는’ 능력자들은 폐인이 되어 마땅히 능력을 사용할 곳도 없이 방치 된다. 현재 선진국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의 분할, ‘워크-셰어링’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를 변종시켜 노동자를 더 확실히 굴종시키는 용도로 쓰지만, 이것의 본질은 왕을 위한 봉건주의적 사회구조를 해체하며 모두가 잘사는 사회주의적 발상을 가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중간’이 잘 활용될 수 있는 안전망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두 가지 양상을 필요로 하는데, 규모의 증가와 그 규모 안에서의 양보다. 예컨대 1리터의 물을 100명이 나눠먹는다고 할 때, 모든 이가 이를 균등하게 나눠 먹지는 못한다. 다만 1리터를 10리터로 늘리면 100명이 균등하게 이를 누리지 못해도 어쨌든 1리터일 때 보단 많이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물이 10리터가 되었음에도 가장 최상위 층이 비례해서 더 많이(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취하게 되면 차라리 1리터일 때보다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인의가 있는 올바른 철학을 가진 사회라면 규모를 키우면서도 그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를 재분배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긴 이야기의 요는, 문단 최고의 영예를 안은 한 사람에 집중할 뿐만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서 사장되어가는 문학의 문제점과 수없이 져가는 별들을 살펴보는 넓은 안목도 함께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사회 영역에서 밝은 별 하나를 위해 죽어간 모든 이들을 보듬는, 그들을 생각하는 태도를 한 번쯤 견지해보자는 말이다.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그러나 높아진 문단의 위상만큼, 과연 우리 문단이 이러한 자격을 가질 만큼 올바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냉철하게 살펴볼 일이다. 성공의 미주를 얻고 싶다면, 성공에만 집착하지 말고 미주를 얻는 그 숙성의 과정 또한 잘 활용해 계속해서 미주를 만드는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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