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았다 - 진정으로 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강남살인남과 짝 지워진 해시태그는 #살아남았다 이다. 여자라서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범죄는 여성을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한 강한 공감이 일어났다. 그리고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분노하고 애도하는 과정에서 여혐과 남혐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싫다는 주장을 한 여중생을 폭행하는 여성분도 있었다. 이 사태는 과연 어떤 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까? 조금 삐딱선을 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흑백논리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 적대적이다. 남혐이든 여혐이든. 괴벨스가 이런 식으로 선동을 잘했다고 한다. 아마 기업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이익을 위해서 여혐을 통해서 과대 포장하고 호신용 무기를 판매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업은 개인과 감정을 공유하기보다는 이익을 위한 집단이니까. 나는 이 사건을 여혐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피해자를 여러 번 찔러서 살해했다. 여러 번을 찔렀다는 것은 그동안 쌓인 게 있었다는 말이다. 둘은 일면식도 없었다. 쌓일게 없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조금 더 탐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정치적인 프레임은 일단 내버려두자. 여혐 범죄라고 주장해도 임상적인 기록들에 대해서는 '여혐'이라는 단서를 들이밀지 못할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미 이와 같은 범죄사례에 대해서 단서를 추측할 수 있는 임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간략하게 나마 오늘 그 임상도 잠시 언급할 것이다. 조현병에서 나타나는 임상이 아니다. 학파별로 임상의 강세가 있는데 정신분석은 편집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되었다. 정신분열은 융 학파에서 연구가 많이 진행이 됐다. 프로이트는 개인 사무실에서 연구를 했고 융은 병원에서 연구를 했다. 환자들이 모이는 차이에 따라서 정신분열은 입원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융은 분열 연구를 많이 할 수 있었다. 편집증은 초기에, 즉 급성기에는 정신분열과 혼동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증상이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사회생활을 오히려 더 잘할 수도 있다.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경우 의처증과 데이트 성폭력에도 편집증이 연결될 수 있다. 배우자가 연인이 바람 피고 있다는 확신은 폭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 일어나는 폭력이다. 발병은 눈치챌 수 없다. 그만큼 조용히 현실에 등장한다. 따라서 정신병 발병의 문제도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치료의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과연 약물로 치료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다. 대중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상담도 받고 약도 먹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이 내용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약물의 작용은 증상을 묘하게 위장시킬 수도 있다. 정신의학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완고한 태도다.

좀 더 탐구해야 할 내용이 나왔다. 그가 이 사건의 범행을 인정하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점과 여성 혐오로 보이는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편집증이 폭력과 관련될 때, 제삼자의 개입은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다. 편집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언제나 박해받고 있다. 따라서 박해자와 자신만 세상에 있다. 제삼자가 끼어들어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와 1:1 관계에 있었을 때, 그의 시야에는 자신과 자신을 박해하는 박해자 밖에 없다. 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정신분석학자인 미졸드-멜러는 다음을 지적했다. "편집 증자는 무기도 없이 가만히 있는 박해자를 살해해놓고도 자신은 정당방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박해자는 편집증자가 옆에 있는지 모르는데도, 편집증자는 폭력을 휘두른다." 제삼자의 개입이 없을 때 이럴 수 있다. 정신분석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외디프스 삼각형이라는 라캉의 도식이 있다. 잠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자아-초자아-이드의 도식도 함께 소개한다.

외디프스 삼각형의 도식을 읽는 방법은 a가 자아다. 즉 '나'다. 그리고 a'는 타자다. 아버지의 자리이며 법의 자리 즉, 초자아가 위치한다. 중요한 것은 A, 대타자. 어머니의 자리다. 이 곳에는 우리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자리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 장치의 도식을 이렇게 그려놓고 본다면 그가 왜 엄마가 갖다 준 것도 거부하는지에 대한 탐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정신병자는 엄마의 리비도에서 떨어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자기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엄마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의 초자아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초자아의 힘은 그것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그것이 초자아에게 보급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이, 나르시스로부터 자아가 에너지를 보급받는다. 자아는 자기보다 작아진 초자아를 잡아먹어 버린다. 하극상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자리, 초자아는 기능하지 못한다. 그것이 편집증이다. 초자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편집증자는 어머니의 리비도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움직임도 나타낸다. 그가 현실에서 어머니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초자아가 기능하지 못한다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망상에 의해 감시받고 있었다. 신경증은 곧잘 '티눈'처럼 묘사할 수 있다. 심각하지 않을 때는 그냥 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은 자아가 걸리는 병이다. 자아는 평소 초자아에 의해 감시되고 명령을 받는다. 자아가 병에 걸리자 스스로를 감시하고 명령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자아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이 처음으로 촉발된 시기를 찾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신경증에서도 촉발 사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증상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만한 신뢰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병자에게서 신뢰를 얻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폐쇄병동에서 생활하는 환자라고 할지라도 의사에게 자기 망상을 모두 털어놓진 않는다. 운 좋게도 나는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된 사람의 망상을 들어본 경험이 있다.(나는 의사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 망상의 내용은 정치인에게 자신의 정자를 보내서 후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망상 역시도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돕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편집증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 바로잡든지, 덧붙이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정신병의 발병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꽤 험난하다. 현행 정신과에서 15분으로 제약된 면담시간은 전혀 아무런 탐구를 할 수가 없다. 정신병은 신경증 보다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15분 면담하고 약을 먹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 급성 편집증 환자의 분석을 맡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나와 인연이 있었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신이 김길태(연쇄성폭행범) 보다 더 나쁜 범죄자라고 주장하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공부해서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던 아이다. 과연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 걸까? 그 아이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할 수가 없었다. 신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휠체어나 케인을 사용해서 걸어야 했다. 약물은 그 모든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상담실로 갈 수도 없기에 직접 방문해서 상담하기로 결정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따뜻했고 관심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가 발병시점을 알려주었다. 당시, 지번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뀌던 때였다. 그 아이 집 앞에 주소 표지판이 붙어 있었는데 어느 날 표지판이 교체가 되어 있었다. 그걸 목격한 아이는 "아.. 드디어 내 뜻대로 됐어... 내 뜻대로 됐어..." 본격적인 발병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숨어있던 광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현실에 드러나게 될 때는 이미 발달이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망상이 언제 생기는가? 정신병의 초기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중 단계에 생긴다. 망상은 세상을 새로운 법으로 해석하게 만들어준다. 망상이 생기는 과정을 두고 라캉은 1932년에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는 사회적 변화라고 답한다. 그 당시는 아이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부모님에게서 일어난 변화의 요소는 그 아이의 정신에 매우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갈등의 문제는 자신의 장애와 결부되었고 숨겨놓은 상태에서 발병하게 된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정신분열증으로 진단이 되었다. 이 외에도 분석 진단과 다른 경우는 곧잘 발견된다. 심한 강박증도 종종 정신분열로 오해가 되기도 한다. 신경증이 심각할 때, 현실 판단조차 힘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으로 오해가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그것이 DSM의 진단체계 중 정신분열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과거 정신분열증 진단에 최고로 자신 있어 하던 사람들이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뭔가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강남살인범과 비슷한 범죄를 남자에게서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자에게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이 사례가 꽤 있다. 알려지지 않은 범죄에서도 이와 비슷한 류를 분명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국내의 사례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류의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로 진단된 사건이며 더욱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이 되기도 했다. 파주 토막 살해 사건이다. 사진만 첨부하고 넘어가겠다. 아무런 동기가 없었던 그녀의 살해는 무참했다. 남자를 수차례 칼로 찌르고 토막을 냈다.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동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편집증은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녀에게도 편집증의 진단이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1931년 4월 18일, 프랑스 생-조르주 극장. 어느 젊은 여성이 유명한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에게 다가간다. 젊은 여성은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고 응답을 받자마자 손가방에서 커다란 사냥용 칼을 꺼내서 뒤플로를 후려쳤다. 주변에 있던 관계자들에 의해 상황은 제압되었지만 뒤플로의 손의 힘줄이 끊어졌다. 차칫 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이 사례는 라캉의 박사학위 논문에 실려있는 에메의 이야기다. 그녀는 처벌받은 직후에 안정이 되었다. 증상이 노리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무의식에서 노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에메(본명은 마르그리트 앙지외지만 그냥 에메라고 부르겠다.)는 어릴 때 집에서 특별했다. 머리도 좋고 우수했다. 아버지의 권위에도 맞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에 의해 시달리면서 살기도 했다. 25세는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 시기에 결혼했고 실제적인 문제가 나타났다. 망상 체계들이 나타나며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캉은 그녀가 검거된 이후에 1년 6개월간 꾸준히 면담했다. 그녀의 망상을 탐색하기 위해서 공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에메는 허심탄회하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겠지만 에메의 망상은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에 기인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벌받으면서 안정이 되었다. 이 내용은 기묘하게도 안산 토막살인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은 안정적이고 침착했다. 악의도 없었다. 살인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건 정황은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지목하고 있었고, 자기 범행을 시인했다. 그는 뉴스도 보지 않았다. 자기 미래에 대한 계획 구상에 한참이었다. 어쩌면 그가 처벌을 기다리던 독특한 방식으로 채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논리는 의식적이지 않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시 라캉은 자기를 처벌하는 편집증을 연구하고 있었다. 에메사례는 참고자료로 쓰였다. 만약 국내에서 자기를 처벌하는 편집증을 연구하게 된다면 안산 살해범이나 강남 살인남이 그 자료 선상에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범죄의 목적은 살해라기보다는 그 뒤에 오는 처벌이기 때문이다. 살인범이 잡히지 않으려고 한다는 일반적인 관점은 정신분석에 의해 뒤집히기도 한다. 내 사례에서도 분명히 아이의 주장은 자기는 김길태 같은 성폭행범보다 더 더러운 놈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꿈을 꾸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 꿈의 내용이 아이의 정신 장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어떤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정신 결정론은 이런 현상에서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정신은 자연보다 더 엄격하게 그 원인을 결정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없지만 분명 의미가 있고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병자에게 응시와 목소리는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부른다는 것과 관련된다. 정신병자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정신병자들은 환각과 많이 싸운다. 거의 언제나 싸울 수도 있다. 따라서 괴로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체는 이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무력화시키려고 할 수가 있다. 여자가 무시해서 그랬다는 그의 진술은 여기서 무시의 프레임을 바꿀 수 있다. 여자들이 안 바라봐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각을 통해서 과도하게 괴롭히는 여성의 이미지가 된다. 강남 살인남은 한 번만 찌르지 않았다. 수차례 찔렀다. 어쩌면 그는 칼을 바로잡고 찌르기보다는 거꾸로 잡고 찔렀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박해자에게 그만큼 시달려왔다는 말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치료문제다. 정신의학이 정신병적 범죄를 예방하기에 무력한가? 우리는 질문해볼 수 있다. 치료 임상을 가지고 있으며 연구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정신병자라도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은 듣는다. 정신분열증으로 진단을 받은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상상을 해보자. 그가 의사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는 순간 의사가 주는 약은 정신분열을 낫게 할 것이다. 편집증에서 전이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의사와 대화하기보다는 약만 타 먹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약물이 망상의 발달을 막지 못했다. 약물이 설명해주는 것은 뇌기능의 저하뿐이다. 그의 삶에서 형성된 망상의 토대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의사에게 신뢰를 갖지 못하고 의심만 할 때, 치료와는 전혀 별개의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여담으로 초기 정신의학자인 블로일러는 분열증의 임상을 꼼꼼하게 연구했다. 초기 정신의학의 연구자들은 매우 귀중한 임상자료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약은 부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현재 발견이 어려운 것 같다. 강남 살인남은 2달 정도 약을 먹지 못했다. 약물 복용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편집증자에게 약물은 자신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느끼게 될 수가 있다. 약물에 대한 거부는 폭력에 대한 거부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강제입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폐쇄병동에서는 강제로 약물을 먹인다거나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 보호사가 그것을 확인한다.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이 상황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반에서도 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다.

의사 과정에서도 심리치료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주 치료는 거의 약물이다. 이유는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가장 효과적으로 병원유지비를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의 역사를 본다면 이 생각은 바뀔 수가 있다.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된 환자에게 약물을 복용시켰더니 일상생활로 바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약물의 치료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은 한번 더 일어난다. 정신질환이 발생하는 위치를 신체의 내, 외부로(신체와 마음) 설정한다면 약물의 논리는 허물어질 수도 있다. 이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실제로 약물 끊는 과정이 전문상담에서 곧잘 이루어진다. 디지털 정신분석, 즉, 채팅으로도 그 일은 일어났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과연 약물이 정신치료를 위한 길인가? 하는 점이다. 정신의학에 대해 맹신하고 있다면 약물은 절대 끊을 수 없는 소중한 '보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는 약을 끊어주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정신보건사회복지 수련생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약물문제로 나와 시비가 붙었다. 평생 먹어야 된다고. 그는 의사에게 그걸 질문했다. 평생먹어야 하냐고. 그 수련생은 야단을 맞았다. 의사라면 약을 끊어줘야 한다는 것을 대답으로 들었다. 흥미로운 내용을 하나 추가해 볼 수 있다. 사회공포증이라는 진단명은 의사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제약회사가 약물의 보급을 위해서 만들어낸 진단명이라고 한다.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제약회사는 가장 효과적으로 프로파간다 기법을 통해 약물을 보급했다. 기업의 목적은 맨 처음에 이야기했다. 이 사건을 여혐으로 본다면 치료 문제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성 혐오가 증상으로 둔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정신병자에게서 여성에 대한 욕설 혹은 남성에 대한 욕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할 수 있다. 혐오할 수도 있고 성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여성 혐오라는 방식을 채택한 증상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욕설과 비하가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기록을 살펴보라. 아마 꽤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도 그 자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강남역 사건을 임상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본다면 정신의학의 치료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던져진 질문에 어떤 응답이 나올 수 있는가? 정신의학은 임상과 거리가 먼것인가? 강남살인남. 그는 '무시'라는 단어가 들어간 한마디 말을 했다. 정신병자의 말은 곧잘 오해를 불러온다. 그리고 정신병적 사고의 특징은 원인을 한 가지로만 지목하게 만든다. 여기서 부터는 본인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이 사건으로 드러난 이슈는 '여혐'이다. 여혐이 가려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영화속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분석가의 외투>,<영화의 무의식>의 저자. 현재는 그 동안의 분석경험의 일부를 출판하기 위해 <디지털 정신분석 연구>를 집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온라인을 통해서 신경증에 대한 상담이 가능하고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임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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