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노동이 사람의 일이라면

바다는 언제 봐도 젊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바다도 쉼없이 일을 한다는 소린데 노동의 찌든 때는 수평선 너머로 물러간지 오래. 우리 앞엔 이제 막 태어나 꼬물꼬물 발등을 쓰다듬는 어린 바다 뿐이다. 인간의 기원부터 현재까지. 모두 다 알면서도 늙지 않는, 불로장생의 바다.

인간의 커풀은 바다와 달라 세월에 쉽게 풍화당하고 노동에 퇴적화된다. 매일 밥을 짓든, 나가 돈을 벌든 각기 무게와 숙련도가 다른 노동 속에 각자의 연대기를 쌓고 있다. 오래 쓴 걸레가 해지고, 몇만키로를 달린 타이어의 홈이 닳아가듯, 사람이 일에 닳아가게 되는 현상. 노동의 흔적이다.

강도 높은 연습이 기형적으로 변형시켜 놓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맨발은 존경스러운 연습의 흔적으로 세계의 극찬을 받는 사례인데 그와 달리 딱히 세상에서 주목하지 않는, 그저 늙음의 표식으로 여겨지는 아빠의 처진 어깨나 엄마의 주름 같은 소소한 흔적들도 있다.

주름 같은, 흔해빠진 표식외에도 구구절절 쌓인 노동의 흔적은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다. 삼십년 넘게 직장일과 가사일을 병행했던 엄마는 빠르게 먹어치우는 식습관을 얻었다. 맞벌이 주부에게 밥은 노동의 연속이었다. 밥을 해치우고 해야할 일이 산더미라 앞에 놓인 음식과 투쟁하듯 씹었다. 소리를 들어보면 재료의 질감이 느껴졌는데 배추는 아삭아삭한 잎이고 시금치는 질긴 식물이라는 것을, 경쾌한 저작활동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식탁에서 발화한 소리가 집 전체를 메울만큼 단단했던 엄마의 어금니. 끼니에 풍화되고 퇴적화된 뼈는 그 단단한 성능도 예전같지 않아 뜨거운 물을 마시면 아리다고 한다.

이제 내 곁에는 노동의 흔적을 쌓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자고 있을 때, 한 일자로 굳게 닫힌 남편의 눈커풀은 툭 하고 부어 있고 눈커풀 틈으로 보이는 흰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다.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봐야 하는 눈이라 저렇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렇게나 많다는데,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시력을 축내야 하는 젊음이라니. 그의 미간에는 자는 중에도 살짝 인상이 잡혀있다. 아마 그대로 주름이 되겠지.

지난날, 남편이 드라마 <미생>의 열혈팬이 되어 "한국에 저런 리얼한 드라마가 많아져야 한다"고 격찬했을 때, 나는 슬퍼졌다. 미생의 회사는 끊임없는 신경전과 정치암투가 벌어지는, 냉정한 조직사회였다.

때문에 나는 자는 남편을 깨워 누구네 남편은 밖에서도 힘든 노동을 다한 후 집에서도 노동을 이어간다더라고 잔소리 하고 싶을 때마다 참는다. 저것은 노동의 흔적이다. 힘든 노동을 끝낸 후에 취하는 정당한 게으름이다. 라고 다독이며 기다린다. 쌓인 피로가 눈커풀 속에서 풀어져 흐릿해질때까지.

노동에 굳이 '신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면 개미군단이 이뤄내는 경제발전이나 일개미들에게 떨어지는, 노동량에 비하면 치사하기 짝이 없는 연봉에 붙여야 할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버티는, 그 굳센 마음에 붙여야 할 것이다.

고로 우리들의 노동은 신성하고 이타적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자 바다 자체라면, 노동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 죄의 짐이자 온 몸을 내던져 표현하는 열렬한 사랑고백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작가의 책 제목에서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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