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울 25시, 夜 (26)

제2화 그녀는 분식회계 중 (5)

박 과장이 저녁을 사준다니까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쁠 게 없을 것 같았다. 박 과장이 기다리고 있는 신림동으로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림동은 회사, 오피스텔, 박 과장의 집과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지점이다.

“지난번 감자탕 별로였지? 돼지 냄새가 좀 나더라. 혜진 씨는 안 그랬어?”

“저도 솔직히 좀 그랬어요.”

“오늘은 다른 걸 먹자구.”

박 과장은 처음처럼 먹자골목으로 안내했다. 부담 없이 김치찌개에 막걸리를 마시며 회사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이 없느냐? 이러이러하면 일하기가 편하다는 등 주로 회사 이야기를 했다.

세 번째 만남은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적당히 핑계를 대려고 했다. 인터넷으로 영화표를 두 장 샀다는 말에 할 수 없이 극장 앞으로 나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지하철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도 갈 수 있어요.”

“시카고 뒷골목 같은 서울인데, 밤에 혼자 보낸다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

호! 이 남자 봐라. 박 과장이 갑자기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부남이다. 택시에 타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앉았다. 박 과장은 술에 취했지만 손목을 잡으려 하거나, 치근대지 않았다. 지금 이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신파극 대사를 읊지도 않았다.

“저, 여기 살거든요. 이제 안심해도 되니까 들어가세요.”

오피스텔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박 과장도 따라 내렸다. 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오피스텔을 손짓하며 바라봤다. 검은 하늘에 머리를 묻고 있는 오피스텔이 그날 따라 쓸쓸해 보였다.

“음, 안심이 되는군. 그럼 내일 회사에서 보자구.”

박 과장이 멋있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혼자 외롭게 밤길을 걷는 박 과장의 뒷모습이 갑자기 안쓰러웠다. 뛰어 가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 방에 들어가서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극장을 몇 번 갔다. 토요일은 대학로 소극장도 갔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화랑도 갔고, 유명인 토크쇼에 가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도 쳤다. 사람은 겉으로 볼 때와 다르다고 하더니 나름 문화를 누리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범위를 넓혀서 인천 월미도도 가 봤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날 고궁을 거닐고 나서 순두부찌개에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당일치기로 경포해수욕장도 가 봤다. 메뉴는 매번 김치찌개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닷가에서도 회가 아닌 매운탕을 먹었다.

그동안 몇 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줬다. 비틀거리다 갑자기 품에 안기기도 했고, 박 과장보다 먼저 취해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토한 적도 있었다. 박 과장은 그때마다 친오빠처럼, 때로는 직장의 부드러운 상사처럼, 어떤 때는 또래처럼 대해줬다.

박 과장은 단 한 번도 드라마의 불륜남 행세를 하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너 때문에 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나도 이제 내 맘대로 살고 싶다. 더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는 불륜의 교과서적인 대사도 읊지 않았다.

그런 점들이 박 과장과의 데이트를 정당화시켰다. 혼자 청승맞게 고궁이며 바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된다. 믿을 만한 직장 상사와 동행을 하면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되고, 무섭지도 않았다.

어느 때는 당일치기로 여행 가고 싶은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박 과장에게 먼저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경비도 가능한 한 더치페이를 하거나, 박 과장이 밥을 사면, 커피를 샀다. 박 과장이 차를 몰고 나오면 기름값을 부담하는 식이다.

아무도 모르게 둘이 경포해수욕장을 거닐고 나서 이튿날 출근해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것도 재미있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거나,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여행 후일담을 은밀하고 주고받았다. 그런 말들은 싱거운 반찬에 밥을 먹다가 자극성 있는 반찬을 먹은 것처럼 생활의 자극제가 됐다.

사고는 항상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연인이 아닌데도 연인처럼, 직장 상사인데도 오빠처럼, 유부남이라서 부담까지 없던 박 과장에게 알몸으로 포로가 된 것은 순전히 성질 급한 부장 때문이다.

아침부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날이었다. 하청 회사에 입금해야 할 자금을 엉뚱한 계좌로 입금했다. 박 과장이 다행히 빨리 발견해서 원만하게 수습을 했다. 하마터면 하청 회사가 부도를 맞을 뻔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부장이 노발대발 고함을 질렀다.

부장의 고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분 만에 끝났지만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맹세코 태어나서 큰소리로 혼나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직원들이며 동료직원들이 카톡으로, 구내전화로 위로를 보냈지만 충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과장님, 술 한잔 사주세요.”

박 과장한테 카톡을 보냈다. 둘이 신림동에서 만나 먹자골목으로 갔다. 순대에 소주를 마셨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니까 갑자기 세상이 서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났다.

“부장님 성질 급하신 거 알잖아. 그게 다 약이 되고 피가 되는 교육이니까 좋게 받아들여.”

“그래도 과장님께서 수습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박 과장이 위로를 해주니까 더 서러웠다.

한만수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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