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신혼여행은 이후 결혼생활에서 깜깜한 밤하늘에 박아둔 두 사람만의 별자리로 반짝인다. 매연에 가린 날이 대다수고, 하도 바빠 하늘 한번 올려다볼 시간 없지만, 어느날 문득 행운처럼 떠올리면 흐뭇해지는 추억. 당시에는 내가 하늘 위를 걷고 있는 줄 몰랐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땅 위를 걷다보니 그때 그 시간이 구름 위의 낙원이었다는 걸 절감하기에 한결 애틋해진 서랍 속 보물상자.

우리의 신혼여행은 여행회사의 패키지 일정에 따라 천편일률적인 획일성으로. 각자 자기만의 소중한 결혼식을 치르고 온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다니며 밥을 먹고, 바나나 보트를 타고,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돌아가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각자의 추억을 스크랩한다기보다는 집단의 추억에 각자의 몫을 복사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처녀 시절의 까탈스러움이 남아 도도하게 굴던 당시엔 별게 다 불만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차려주는 밥, 알아서 개주는 이불. 최소한 집안일로 싸울 일은 없었다. 메이드들은 오직 팁을 위해서 일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부부싸움을 말려준,

명색이 신혼여행은 '이래야만 한다'가 넘쳐났다. 평생 지닐 추억에 행여 오점이 남지 않도록 럭셔리한 풀빌라에 산호빛 바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돌아갈 길 없는 그 시간은 단지 과거가 되었다는 이유로 머리 속에서 한결 너그럽게 기억되고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산호빛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럭셔리한 풀빌라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분명 신혼여행이 신부에게 안기는 당혹스럽고 불쾌한 감정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감정들조차 그리워진다.

너무나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굴었던 나였지만 그래도 그 모든 걸 받아주던, 아직 남친 느낌에 가까운 신랑이 약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던 시절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맞다. 그때의 신랑은 나의 변화무쌍한 기분변화에 어떻게 맞춰야할지 몰라 절절매며

강요된 행복은 개인의 심리에도 종종 등장한다. '행복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순간들마다 우리는 종종 행복해 까무러치는 연기자가 되야 한다. 오랜 시간 돈을 모아 내 집을 장만하거나 시험에 합격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게 된, 어디에 내놓아도 빛나는 사건들 말이다.

내 삶에서 가장 '호퍼스러웠던' 장면도 신혼여행지의 호텔방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침구, 향기로운 냄새, 고급스러운 가구로 가득찬 호텔방은 그야말로 '행복의 조건'들이 눈부시게 빛나 딴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 생에 체험한 가장 럭셔리한 방은 반대로 가장 낯선 장소이기도 했다. 낯선 냄새, 낯선 침구, 낯선 남자에 둘러싸여 잠들어야 했던 첫날 밤. 저 창밖의 사람들마저 생판 모르는 필리피노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잠이 오지 않았다. 딱히 잠자리를 가려본 일 없이, 수련회의 곰팡이 핀 싸구려 방에서도 바로 잠들어 '잠충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나의 체질상 예상치 못한 불면이었다. 분수에 안 맞게 고급진 방에 황송해서 몸둘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끼어들어 일생의 추억거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 꽤 많은 돈을 들였는데... 방은 제 값을 했으나 마음은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잠을 못 자는 나란 존재조차 낯설어진 그날 밤, 모든 익숙함이 사라진 호텔방에서 나는 나의 방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온 나의 지구.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한 성장의 속도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힘든 날 흘렸던 눈물과 피로에 지친 내 몸을 안쓰럽게 지켜봤던 나의 보호자. 비록 드라마 속 여주들의 방처럼 사랑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구석구석 나에게 길들여져서 특별한 지시 없이도 편안하기만 했던 나의 방은 그냥 '룸'이 아니라 '룸메이트'였고, 엄마의 자궁에서 탈출한 후로 안식했던 두번째 피난처이자 모든 시선들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난 나만의 필드였다.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는 습관 반, 타성 반으로 자꾸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영혼을 붙잡느라 낯선 호텔에서 실강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방의 안주인이 될 자격을 얻기 위해.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많은 이들이 나의 신혼여행지를 물었고, 모래사장이 곱고 하얗다는 휴양지를 밝히면 모두들 '좋겠다'고 부러워해주었다. 이 여행에 참여하는 객들에게는 행복해야할 의무가 부여된 듯, 신혼여행은 이름부터 '허니문'이었다. 허니문은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시간이어야 했기에 이 기념비적인 일정에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끼어들어 평생의 추억거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 꽤 많은 돈을 들였다.

덕분에 우리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마닐라의 5성급 호텔은 놀랍도록 호화스럽고 깔끔했다. 럭셔리라는게, 참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또 돈 하나면 이렇게 간단히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 호텔이 갖춘 수준에 소리 없이 감탄했다. 좋은 호텔에서는 어딜가나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좋은 호텔의 샹들리에는 고급스럽고 환하게 빛나는구나... 좋은 호텔은 직원들도 다 친절하구나... 좋은 호텔은 침구를 매번 새로 갈아끼워 빳빳하고 푹신하구나.

우리의 방은 작았지만 가구며 패브릭이 고급스러웠고 메이드의 손길이 닿은 청결한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자그마한 웰컴 바구니까지. 불평할거리가 하나도 없이 만

그가 그린 '방'은 가족들의 웃음이나 화기애애한 대화가 사라진, 함께 있어도 따로인 개인의 공간이다. 주위의 시선이 차단되고 오직 나만이 나에게 집중하는 공간. 벌거벗은 스스로에게 집중한다는 건 명상이 주는 건강한 이미지와 달리 꽤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피하고 싶었던 본래의 나와 맞닥뜨릴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이 괴물인 건 욕하고 넘어가면 되지만 그 괴물의 일면을 나에게서 발견하면 뼈를 깎으며 고쳐야 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무수한 타인들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도시인들은 세련된 옷차림으로 자신을 방어하고도 늘 신경이 피곤한 상태다. 그래서 종종, '방'으로 피신하고는 하는데 이 방에서

모름지기 신혼부부의 호텔방은 럭셔리해야 한다는 믿음에 꽤 비싼 돈을 들여 패키지 상품 중 가장 좋은 풀빌라를 얻었다. 단독 빌라를 독채로 쓸 수 있어 '프라이빗'이 보장된다는 그곳은 돈이 얼마나 우리 삶을 있어보이게 만들 수 있는지 제대로 구현해낸 건물이었다. 개인용으로 딸린 수영장, 캡슐 커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홈바, 푹신하고 넓은 침대와 침대에 누우면 창문 너머로 가득 펼쳐지는 에메랄드빛 바다. 메이드의 세심한 손길로 정리정돈된 욕실은 머리카락 하나 없이 뽀송했고 변기 옆의 두루마리 휴지마저 삼각형으로 접혀 장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심드렁한 눈길로 일층과 이층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무리 럭셔리한 방과 세심한 서비스일지라도 구체적인 사진과 후기를 보고 와 버리면 막상 내가 그 선물을 열어봤을 땐 그저 기대했던 물건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리조트 홈페이지에 올린 포토샵 잘된 사진만으로는 영 의심쩍었던 나는 블로그를 통해 이 방 구석구석을 미리 살펴봤다. 아마츄어의 어설픈 사진 속에 담긴 방은 그 본래의 색감과 구도를 여과없이 드러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했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이곳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욕조에 몸을 담궜던 나는 사진과 여지없이 똑같은 방 앞에서 감동이 아닌 00을 받았다. 아, 여기 화장실에는 핸드타월이 돌돌 말려 있구나. 사진처럼. 수영을 마치고 난 후에는 야외에 설치된 샤워부스에서 몸을 씻을 수 있구나... 사진 처럼...

호텔측에서 준비한 '웰컴 바구니'와 침대 위에 수건으로 만들어 놓은 백조 장식마저 블로그에서 수없이 봐왔던 서비스였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서프라이즈'가 빠진 이벤트는 무미건조한 사실 확인에 불과했다. 남이 써놓은 구체적이고 솔직한 후기 같은 건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여행의 아이러니는 남의 블로그를 봐도 후회, 안 봐도 후회라는데 있다. 안 보고 오면 분명 기대와는 다른 현실의 어떤 부분에 실망할테고 보고 오면 기대와 다르지 않은 현실에 얼마쯤 건조해진 감동을 느끼는 딜레마. 나는 예상 외의 곰팡이나 가격대비 안 좋은 방에 놀라느니 서프라이즈하지 않아도 된다는 쪽이었고 어쨌든 태어나 이렇게 비싼 방에 머물러 본 적 없는 처지였다.

이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 동안 허락된 권리를 빠짐없이 누려야 했다. 패키지여행의 빡빡한 일정상, 방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일층과 이층을 오르락 내리며 모든 설비를 체험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다. 그 결과, 거실 소파에 누워 있으면 이내 수영을 해야 될 거 같고, 수영을 시작하면 어서 캡슐 커피 한 잔을 마셔줘야 할 것 같은 강박증세에 시달렸다. 수영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발코니에 앉아 있는 나의 모든 행동은 얼핏 보기에 휴식이라는 반경에 속했으나 마음만은 거의 노동에 가까운 심리상태였다.

혼자 설치고 다니는 동안 남편은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널찍한 침대에서 푹 자고 있는 그는 이 방의 가격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오직 침대 하나만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독촉하며 깨웠지만 이때다, 작정하고 쉬는 사람을 깨우다 지쳐 혼자 버기를 타고 리조트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칵테일 한 잔 시켜 마시는 것은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품었던 한 장면이었다. 미국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씬을 위해 칵테일을 주문하고 수영하다 질끔 질끔 마시니 금세 취했다. 나른해진 몸으로 돌아왔을 땐 다소 허기가 져 웰컴 바구니에 놓은 과일을 먹기 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망고라는 과일을 이때 처음 먹어 봤다. 노랗고 살짝 물렁한, 이 거대한 아몬드는 오년 전만해도 요새처럼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동남아에 가서야 현지가격으로 싸게 먹을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다. 끈적거리는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걸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칼로 잘라 먹었다 입으로 베어 먹었다 아주 추접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호텔 조식뷔페에서야 가로, 세로로 예쁘게 칼집 낸 망고를 보고 저렇게 먹는구나 했지만, 막상 내가 먹을 땐 역시 입으로 베어 먹다 씨까지 쪽쪽 빨아먹는게 편했던 낯선 이국의 먹거리였다.

보라카이에서 우리는 낯선 방, 낯선 과일 외에도 낯선 가난을 만났는데 해변가에 있는 자그마한 '읍내'로 나가기 위해 마을을 지났을 때였다. 비가 오면 한 방에 무너질 듯 싶은 허름한 판자때기에는 분명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고운 모래로 멋진 작품을 만들고는 관광객들에게 '1달러'를 받고 사진을 찍게 해주었고

웰컴 바구니에 놓인 망고를 깎아 먹으며

화장실에 걸린 두루마리 휴지까지 끝부분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접혀있는데 아무렇게나 쓰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또 접혀 있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음껏 먹고 자고 뒹굴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빡빡해 그러지도 못했다. 기껏 비싼 방을 빌려놓고 패키지여행을 택한 초짜 여행가들은 가이드가 짜준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그 럭셔리를 맘껏 즐기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자유시간 동안 모든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쉴틈없이 돌아다녔다. 커피 한 잔을 뽑아 거실에 앉으면 채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해야할 다른 일이 생각났다. 리조트 수영장에서 헤엄치꿈꾸던 대로 욕조 가득 거품을 풀어넣고 몸을 담궜다. 깨끗하게 관리된 욕조에 몸을 담그는 순간은 행복하다. 집에 있는 욕조에 몸을 담그려면 일단 락스로 박박 닦느라 땀이 나고 몸을 비록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결혼생활의 무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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