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오뚝이

흔들흔들 이리 휘청 저리 휘청이는 오뚝이. 센 힘으로 밀면 휘꺼덕 할 것처럼 뒤로 제껴지면서도, 휘청대다 기어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중심을 잡는 오뚝이를 보고 있노라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천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어쩜 그리도 강인한지. 역경에 처해도 넘어지지 않고 다시 서는 이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오뚝이같다-고 말한다. 드라마틱한 역경이 아니어도,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몸과 마음을 흔드는 일들에 강인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내 마음에도 오뚝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뚝이를 서있게 하는 힘은 중력이다. 물질계를 이루고 있는 힘 중 하나인 중력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오뚝이 내부에는 이 중력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무게추가 있다. 무거운 쇳덩이는 동그란 밑바닥에 고정된 채로 무게중심을 잡고 있어, 오뚝이가 옆으로 기울어도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둥근 바닥 탓에 자연스레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게 된다. 아래에 고정된 무게추와 모나지 않고 둥글려진 바닥이, 오뚝이를 다시 서게 하는 비결이다. 마음에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무게추는 무겁고 아래에 있을수록 굳건하다. 그리고 모나지 않은 둥글림, 원과 구의 형상은 우리가 흔히 '사람 참 둥글둥글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긍정성, 낙천성, 포용력, 이해심, 배려 등과 관계가 있다. 무게중심이 잡힌 사람은 외부의 일, 남의 말 등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분별없이 따라하지도 않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설령 한다 하더라도 자기화하는 소화력이 있어, 내 양분으로 사용하지 괴로움의 재료로 써먹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볼 때, 외부의 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날 공격하면 내 면역력이 작동해야 할 바이러스이지만, 날 먹이고 키우는 양분이 되면 소화해야 할 귀한 음식이다. 몸의 면역세포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 지어 버릴건 버리고 취할건 취해야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내 것과 아닌 것을 경계 지어 버릴 것과 받아들일 것을 거를 줄 알아야 마음의 건강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나와 너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전체성을 찾는 영적인 목표가 인간에게 있지만, 융이 말했듯이 대극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전체의 합일을 이룰 수 없다. 육체가 피부와 감각으로 나와 외부의 경계를 짓고, 면역 시스템이 나-나 아닌 것을 구분해서 날 보호하고 건강을 지키는 것은, 경계 속에서 나를 찾는게 우선이라는 삶의 메세지이다.) 무게추와 둥근 밑바닥에 비유할 수 있는 마음의 무게중심과 포용의 둥글둥글함은, <소화>에도 비유할 수 있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나만의 버전을 구성해가는 무게중심의 힘은 소화력에 해당한다. 소화하고 흡수하여 내 몸에 양분을 공급하듯, 내 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설령 불량식품이 들어오더라도 뱉을 것은 뱉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 위장도 상한 것을 먹으면 탈이 나는데, 이 또한 '내 몸에 해가 되는걸 알아보는 힘-위장이 설정한 내 기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게중심이 잘 잡힌 튼튼한 마음은 상한 생각이 나를 공격하면 탈이 난다고 신호를 보내고, 다시 토해내 거부할 수 있다. 늘 다 좋게 여겨 즐겁기만 한 것이 건강한게 아니라, 상한 것이면 상했다고 슬퍼하고 성도 내고 토해내기도 할 수 있는게 건강한 것이다. 부모가 잘못된 생각을 주입했다 하더라도, 무게중심이 잡혀 있다면 언젠가 '이건 아니야'라며 뱉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궁극의 소화력인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주입받고 전수받은 생각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하기에, 나다운 중심을 잡기 위해 소화하고 넘겨야 할 가장 도전적인 소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생 과제로 삼는다. 모방의 아동기-부모라는 음식을 섭취하고 그대로 흡수하는 시기-를 지나 판단의 사춘기가 되면 '요란스러운 소화'가 시작된다. 여태 먹었으니, 이젠 자기답게 소화를 좀 해보겠다며 엉성하게 거르고 흡수하는 초기 소화단계인 셈이다. 그래서 사춘기는 내적 부대낌이 심해지고 부모에 반발하며 자기를 찾느라 애쓰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된다. 부모는 아이의 변화를 '나름의 소화'로 이해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기 때 이유식을 먹이던 그 기분으로, 정신적으로 소화력을 기르는 중인 자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탈이 덜 나지 않을까. 부모의 태도는 아이가 오뚝이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되고, 아이는 그 오뚝이를 가지고 세상에 더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반면 둥글둥글함은 소화 이전의 섭취와 관련이 있다. 오뚝이의 밑면이 둥글기에 제자리에 돌아오기 쉽기도 하지만, 휘청이기도 쉬워진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힘과도 같다.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능동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은 긍정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나와 반대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주춤할지언정 수용할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는 '둥글둥글한' 것으로 보일만하다. 하지만 그게 '모든걸 다 받아들여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중하여 '오뚝이처럼 넘어가주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인 후 내 무게중심의 소화력으로 거를 것은 걸러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받아들이는 힘과 버리는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작용하는 셈이다. 이 균형이 깨지면 소화력과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신체 반응이 나타난다. 나는 겉으론 수용적인 태도를 취했었지만 나만의 필터링이 강하여, 나와 다른 견해를 진심으로 소화하지 않고 내적으로 튕겨냈었다. 그러다보니 소화도 안 시킬 것을 잔뜩 받아들인 꼴이 되어, 신체적으로도 조금만 과식하면 소화가 안되어 위가 아팠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수용의 폭은 늘면서도 아니다 싶으면 표현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마찰 역시 껄끄럽더라도 받아들이는 힘이 생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위장질환이 현저히 줄었다. 예전엔 일주일에도 몇 번이고 위가 아파 잠을 못 이루었다면, 요새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다. 위장병을 달고 살았던 시기의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날 어찌 생각할지가 두려워 속으론 거부감이 들어도 말도 못하고 뒤에서 괴로워하며 혼자 끙끙댔다. 지금은 그 두려움을 극복하여 직접 부딪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떳떳함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기분 좋은 것, 기분 나쁜 것도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여 담백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계속 신경 쓰면서 쟤가 잘했네 내가 못했네 해가며 괴로워 했을 것이다. 지금은 엔간한 것을 <그럴 수도 있음>의 영역에 두어 감정도 삶도 담백하고 단순해져서 행복지수가 올라간 상태다.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심적 변화와 신체 증상의 완화가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하니 놀랍다. 이 역시 내 오뚝이가 건강해지면서 생겨난 변화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 오뚝이를 우뚝 세우고 적극적으로 가지고 노는 일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무한한 유한성을 묵상케 하는 모래시계에 이어, 오뚝이도 참으로 훌륭한 물건인 것 같다. 원문 :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atship&logNo=220797817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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