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 CLASSICS] 피아제 알티플라노(Altiplano)

손목시계 제조 역사에서 시계의 사이즈와 두께는 하나의 본질적인 화두와 같습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시계의 사이즈나 두께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유연해졌다고는 하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급 시계제조사들은 여전히 사이즈와 두께 선택에 있어 보수적인 편입니다. 특히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20세기 초중반에는 셔츠 소매 안으로 쏙 들어가는 작고 얇은 두께의 시계들이 마치 신기한 발명품이라도 되는양 신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 시계에서 얇은 두께를 구현하기란 만만치 않은 난제들이 산재해 있는데요. 1백여 개 이상의 작은 부품들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히 맞물려 작동하게 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부품들을 더욱 작고 정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하게 제작하기란 고도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지금에야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기계공학 기술이 발달해 무브먼트의 설계도를 그릴 때나 이 도안을 바탕으로 각 부품을 절삭하고 가공할 때 고도의 정밀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첨단 장비들이 없던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작업을 사람의 손이 직접 해야 했습니다.

1874년 스위스 쥐라 산맥 자락의 작은 마을 라코토페((La Côte-aux-Fées)의 한 가족 농장에서 탄생한 피아제(Piaget)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미 얇은 두께의 무브먼트 제조사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피아제라는 이름만 듣고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여성용 주얼리 워치부터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피아제는 창립 초창기부터 잔뼈가 굵은 워치메이커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일찍이 얇은 무브먼트와 시계 만들기에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1957년 두께 2mm에 불과한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인 9P와 이를 탑재한 시계를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960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두께의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 기록을 수립한 12P를 공개하기에 이릅니다. 자동 무브먼트는 그 구조상 수동 무브먼트에 비해 두께가 증가할 수 밖에 없는데, 피아제는 전통적인 풀 로터가 아닌, 마이크로 로터를 기어트레인과 평행선상에 위치시킴으로써 두께를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마이크로 로터 설계를 응용하는 제조사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피아제의 12P의 두께가 이전 수동 칼리버 9P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2.3mm였다는 사실은 당시 업계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무브먼트의 두께가 시계 두께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입니다. 두께가 얇은 무브먼트를 제작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을 가진 제조사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얇은 시계, 또는 이를 가리켜 통칭하는 용어인 '울트라 씬(Ultra-Thin, 초박형)' 시계가 기계식 시계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피아제는 울트라-씬 손목시계 제조 분야의 선구자 중 하나로서 반 세기 넘는 세월 동안 탁월한 업적을 쌓아왔습니다.

하지만 피아제 역시 쿼츠 쇼크와 함께 기계식 시계시장이 오랜 침체기에 들어선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본업인 고급 무브먼트 제조사 및 파인 워치메이커로서보다는 뜻밖에도 파인 주얼러로서 훨씬 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재클린 케네디, 앤디 워홀 같은 명사들이 애용했고, 어느덧 까르띠에나 불가리 같은 주얼리 브랜드로서의 이미지가 대중들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지요. 이후 1988년 방돔(Vendôme, 현 리치몬트의 전신) 그룹에 합류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연달아 다양한 시계 컬렉션을 발표하며 움츠려 있던 잠룡(潛龍)이 깨어나는 것처럼 시계제조사로서도 새로운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특히 1998년 아르헨티나 고원에서 이름을 따온 새 남성용 워치 컬렉션 알티플라노(Altiplano)는 전통의 울트라 씬 명가 피아제의 완벽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앞서 두께가 2.1mm 밖에 되지 않는 수동 칼리버 430P를 선보였는데, 시계 케이스 두께 역시 6mm가 조금 넘는 수준이어서 시계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알티플라노는 과거 피아제의 울트라 씬 시계들이 그러했듯 그 태생부터 현대의 신사들을 위해 탄생한 시계였습니다. 또한 파인 주얼러로서도 명성을 얻은 이들답게 전체 고급스럽게 마감한 18K 골드 케이스에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다이얼, 한명의 워치메이커가 정성스럽게 다듬고 조립한 초박형 무브먼트를 탑재함으로써 런칭과 동시에 피아제를 대표하는 워치 컬렉션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피아제의 얇고 우아한 시계 만들기의 집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는데, 지난 2010년은 또 한 차례 기념비적인 해였습니다. 1960년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로 기록된 피아제의 12P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1208P가 그것인데요. 무브먼트 두께 2.35mm, 이를 탑재한 알티플라노 시계 케이스 두께도 5.25mm에 불과한 그야말로 초박형 시계였고,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와 가장 얇은 자동 시계 부문에 동시에 신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오르게 됩니다.

그해 알티플라노의 매체 광고 이미지 중에는 유독 시계의 옆면이나 무브먼트의 두께를 보여주는 형식이 많았는데, 이는 그만큼 초박형 시계 전문 제조사로서의 피아제의 강한 자신감과 긍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2013년에는 1208P 무브먼트에 날짜 표시 기능을 더한 1205P를 발표했으며(무브먼트 두께 3mm, 시계 두께 6.36mm), 역시나 울트라 씬 무브먼트인 기존의 베이스 1200P를 바탕으로 약 3년여의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스켈레톤 형태로 제작한 1200S와 이를 탑재한 시계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스켈레톤 무브먼트(2.4mm)와 시계(5.34mm)로 또 한 차례 신기록을 수립하게 됩니다.

비록 알티플라노 컬렉션은 아니지만 다른 엠퍼라도 쿠썽(Emperador Coussin) 라인을 통해서는 출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투르비용 무브먼트인 1270P(두께 5.5mm)와 가장 얇은 자동 미닛리피터 무브먼트인 1290P(두께 4.8mm)까지 선보였습니다. 컴플리케이션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시계들조차도 무브먼트를 포함한 시계 전체 두께가 10mm가 조금 넘는 정도이니 그 기술력과 정교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단, 이후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무브먼트와 미닛 리피터 무브먼트 및 시계 기록은 불가리에 의해 경신되게 됩니다(그 전까지는 예거 르쿨트르였음).

무브먼트와 케이스 통합 설계로 두께 3.65mm를 구현, 2014년 발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손목시계 신기록을 수립한 알티플라노 900P 모델과2015년 발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수동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4.65mm)와 시계(8.24mm) 기록을 수립한 알티플라노 크로노그래프 모델입니다.

기존의 울트라 씬 수동/자동 베이스에 다양한 기능 베리에이션을 구축해 현재 피아제는 세계서 울트라 씬 무브먼트를 가장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는 제조사로 손꼽힙니다. 피아제가 워치메이커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의 무브먼트와 시계는 창립 초창기부터 자체 매뉴팩처에서만 개발 제작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시계 제조의 전 과정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사의 기술과 시설, 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조사는 스위스 안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그 수가 적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피아제 시계하면 국내에선 아직도 주얼리 워치 이미지가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파인 주얼러로서 비약적으로 성공한 1960~1980년대에 걸쳐 피아제는 자사의 시계에 여러 귀금속을 화려하게 세팅하는 것을 즐겼으니까요. 지금처럼 시계의 미적, 기계적 가치를 논하는 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고로 피아제의 골드/주얼리 워치를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처럼 여기던 시절도 분명 있었습니다. 정경유착의 폐단인 불법 로비사건에도 휘말린 사례가 있는 걸 보면 피아제 시계를 바라보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시선이 우리 주변엔 여전히 부유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진정한 시계애호가라면 피아제가 반 세기 넘도록 한결 같은 열정을 쏟아온 울트라 씬 시계 개발의 성과들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을 줄 압니다. 피아제의 알티플라노는 창립자 조르주 에두와르 피아제가 남긴 모토- "언제나 완벽, 그 이상을 추구하라(Always do better than necessary)" - 를 근간으로 울트라 씬 시계 개척의 역사와 기술력을 망라한 브랜드의 핵심이자 음전한 신사의 풍모를 닮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윽함이 배어나오는 명품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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