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대중 기자와 ‘최순실’ 보도… ‘전직 조선일보 기자’로 살아가기④

Fact

▲언론인 김대중은 16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현역 최장수 언론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사내외에서 ‘구세대’의 혹은 ‘파렴치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조선일보 노보에 실었던 그의 글과 말을 바탕으로 그의 변론을 여기에 재구성한다. ▲“오늘의 기자들처럼 과거의 선배들도 시대를 고민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최순실 게이트’의 보도 양태를 보면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일보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나 조선일보의 윤리 의식에 대한 과소평가는 ‘진영 논리’의 소산으로 보인다.

View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지금 가장 장수하고 있는 언론인이 아닐까 한다. 1939년생, 77세의 나이에 그는 아직도 현역으로 필봉을 휘두르고 있다. 1965년 입사, 햇수로 52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그와 언론계 동기 혹은 선배 중에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조선일보 노조위원장을 할 당시였던 1997년 김대중은 10년 연속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됐고 2005년에 이를 손석희에게 물려줄 때까지 독점했다. 김대중으로부터 손석희로의 이동은 인터넷 시대에 신문업계 전체의 세력이 줄어들고, 방송으로 권력이 이동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된 것과 관련하여 김대중을 ‘처세의 달인’이라고 표현한 언론이 있었다. “판매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의 ‘주필’이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왜 ‘처세의 달인’이라고 했나”라며 나는 분개했다. 그런데 노무현의 호화 요트 보도가 1991년에 있었고 이때부터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이미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반대 진영’에 있던 사람들은 김대중을 깎아 내리고 싶어했었던 것으로 당시의 ‘처세의 달인’ 표현을 지금 나는 이해한다.

김대중은 구세대, 산업화 세대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칼럼이 구식이라는 뜻이 아니다. 온고지신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 그의 글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개혁’을 얘기하는 후배들의 말도 그에게는 ‘공격’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1997년, 한 중진 기자가 “선배들보다 후배들이 능력이 출중하다”는 취지로 조선일보 노보(勞報)에 게재한 글에 대해 김대중 당시 주필은 “오늘의 잣대로 선배를 폄하 말라”라고 반발했다. 그 글 중에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선배 세대와 그때의 조선일보가 과연 그렇게도 엉망이었으며 그렇게도 보잘것없었는지에 대한 심한 자책과 울분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그토록 헛자랑이나 하고 그토록 무기력했으며 그토록 생산성이 형편없었던가? 조선일보가 그토록 특종이 없는, 아니 특종을 기피하는 신문이었으며 그토록 발전 없던 신문이었던가?”

“오늘의 후배들에게는 바보같이 취급될는지 모르지만 어제의 기자들은… 수당이 없어도 일요일을 회사에서 보냈고 야근을 하거나 취재가 늦어지면 회사 책상 위에서 새우잠을 잤다. 솔직히 오늘의 후배들이 어떤 열정을 갖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체험한 어제의 기자들은 대부분 열심히 일했고 조선일보에 대한 애착과 정열의 열도도 대단했다. 그들에게는 내가 있고 신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있고 내가 있었다. 신문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고, 생명줄이었고, 기쁨이었고 동시에 슬픔이었다.”

“우리 8기(김대중은 조선일보 8기다)가 입사하던 때 20만부에 불과했던 조선일보를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국가와 민족과 역사를 토론했던’ 어제의 기자들이며, ‘경쟁지가 일보를 터뜨려 주기를 기다렸다가 뒤따라가던’ 어제의 선배들이며, ‘기사가 없는 시간에 도박을 즐기거나 낮잠으로 전날의 만취했던 두뇌를 달래던’ 오늘의 조선일보의 간부들이며, ‘포커나 고스톱을 치다가 몇 달 전에 썼던 기사를 적당히 개작했던’ 바로 ‘우리’였다고 감히 자부한다.”

김대중은 글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냈다.

“기자는 생산성이 유지될 때까지만 존재한다. 우리가 오래 버텼다고, 조선일보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해서 늘그막에 놀고먹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다간 우리가 몸 바쳐온 조선일보가 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양로원’으로 여겨질 때 진정한 기자라면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에 ‘나가 달라’고 귀띔 안 해도 우리는 물러갈 것이다. 제발 후배들이나 이 직업을 ‘밥벌이’로 여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김대중은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에서 교묘하게 한 정치인을 매장하려는 언론인으로 나온다. 영화 ‘내부자들’에서는 권력과 자본을 엮어서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며 사주에게는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부패한 언론인으로 나온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어서 “이 영화가 김대중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없게 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김대중이 언론에 평생을 바쳤고, 77세의 나이에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는 열정적 기자로 보인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위의 글에 나오는 “‘경쟁지가 일보를 터뜨려 주기를 기다렸다가 뒤따라가던’ 어제의 선배들”이란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작금에 전개되는 상황을 보니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지난 9월28일 한겨레신문의 김의겸 선임기자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라는 칼럼에서 ‘TV조선’을 극구 칭찬했다. 뒤늦게 미르 재단의 실체를 알고 취재를 시작해 보니 이미 TV조선이 체계적으로 다 취재를 끝냈더라는 말이었다.

김 기자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조선이 침묵하기 시작했고, 이는 송희영 주필 사건으로 조선일보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조선이 ‘결정타’에 해당하는 물증을 확보했으면서도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이를 터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기자는 “사장님이 당당할 때 권력도 감히 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글을 맺음으로써 ‘당당하지 못한 조선일보’를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런데 JTBC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등 파일 200여개가 담긴 최순실의 컴퓨터를 확보해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의혹을 사실로 증명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26일 ‘TV조선’을 인용해서 “최순실이 민정 수석 추천서도 미리 받아봤고, 이후 어느 시점에 인사 결과가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TV조선은 최씨 측근들이 일했던 사무실에서 입수한 청와대 인사 보고서 2매를 공개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신문을 10면까지 ‘최순실’ 관련 기사로 뒤덮었다.

한겨레신문도 이날 “청와대 정호성 제1부속실장이 거의 매일 30㎝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들고 최순실의 사무실로 왔으며 최씨가 이를 토대로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 모임’을 운영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이런 진술은 최씨와 가까웠던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이 9월7일부터 9월25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16시간 동안 진행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관되게 말한 내용이다”라고 덧붙였다.

TV조선의 보도 근거는 ‘최씨 측근들이 일했던 사무실에서 입수한 청와대 인사 보고서 2매’였다. 한겨레의 보도 근거는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과의 인터뷰였다.

그런데 이 언론사들은 왜 그 동안 이를 보도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이 자료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자료는 너무 단편적이다. 한겨레의 자료는 다만 개인의 견해일 뿐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반면에 JTBC가 확보한 ‘청와대 자료 200개가 들어 있는 최순실의 컴퓨터’는 결정적인 자료다.

결국 이 정권의 ‘최순실 게이트’는 조선이 불을 지폈고 한겨레가 이를 이었으며 JTBC가 결정타를 날린 셈이 된다. 조선은 ‘경쟁지가 일보를 터뜨려 주기를 기다렸다가 뒤따라간’ 것이 아니라 ‘일보를 터뜨려 주고, 경쟁지가 결정타를 날린 이후에 자신의 취재 자료로 힘을 보태는’ 형식을 띠었다. 이것은 언론의 ‘협업’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결정적인 증거를 갖고도 자사의 보신주의(保身主義) 때문에 보도를 하지 않은 것처럼 쓴 한겨레 김의겸 기자의 칼럼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김 기자는 조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으며, 조선의 윤리 감각을 과소평가했다. 부패를 드러내고 싶지만 취재력에 한계가 있어서 보도의 타이밍을 고민하는 것은 조선이나 한겨레나 마찬가지였고, 김대중이 말한 조선일보의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주필은 노보에 기고한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 토론하고 글로 쓰고, 제목으로 그것을 표현하려 애썼다. 때로는 데스크가 그냥 넘어가 주기를 바라면서 박스 기사 속에 ‘할 말’을 끼워 넣곤 했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버릇없이 굴기도 했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한 여당 대표 김종필 씨의 유세가 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의 기사를 누르고 톱에 올랐을 때 야당 출입기자들은 일제히 데스크에 항의했다. 청와대에서 우리 회사가 정한 출입기자를 마다했을 때 우리 기자들은 회사의 결정을 밀어 관철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광주사태 때 울분하고 분노하며 한 줄이라도 더 사실을 알리려고 검열단과 숨바꼭질을 했다.

오늘날 ‘80학번’의 기자들은, 그때의 선배기자들은 시대의 추이에 안주하며 권력에 순치되고 압력에 익숙한 상태로 살아온 것처럼, 그 반면에 자신들은 언론이 말 못하고 있을 때 자신들만이 거리에서 외쳤던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그렇게 일도양단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오늘의 기자들이 그때에 살았다면 어떻게 신문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해야 하고 어제의 선배들이 거리에 나섰을 때 무슨 소리를 외쳤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어제의 일선 기자들은 회한의 ‘오늘’을 큰 망가짐 없이 후배들에게 인도해 줄 수 있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갖는다. 그때의 기자들도 열나게 고민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조선일보 재직 시절, 나는 김대중 주필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를 곧이곧대로 신문에 쓰면 그 신문은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독자들이 ‘행간(行間)’을 읽어주기를 기대하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언어로 기사를 작성했다.”

1980년 5월 당시, 서울대 신입생이었던 나는 점심 시간에 사람들이 교정에 삼삼오오 모여 방금 배달된 석간 신문을 주의 깊게 읽던 모습이 생각난다. 당시 광주의 실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신문은 없었지만 김대중 기자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있었다.

내가 김대중 개인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최순실 보도를 함께 얘기하면서 이렇게 산만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다. 우리는 상대가 악마와 같은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를 악마로 규정하지 말고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묻고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상대를 조롱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어는 삼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뢰는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소통의 힘이나 빈도가 과거에 비해서 엄청나게 커지고 높아진 현재 혹은 미래의 ‘디지털 문명’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김왕근 (전 조선일보 기자 • ‘붓다로살자’ 편집장) <⑤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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