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권이 정당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안전과 행복, 발전을 위해 투표를 하고 정부를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최순실 정권 이래 북한의 날선 목소리가 계속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올바른 대북정책의 성과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 문제는 국내에서조차 날선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적이 불행해지길 바랄 순 있어도, 적이 불행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내놓을 순 없습니다. 그건 목적과 행위가 전도된 겁니다. 안팎에서 두려움을 사는 걸로 그 목적이 달성되는 분야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고작해야 교도소나 고문관이 아닐까 합니다. 아오지 탄광이 북한 인권을 유린하는 걸로 대내외에서 악명높은 공포의 상징이듯이,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과 적 모두에게 공포의 상징이 되는게 올바른 정책이라면 그렇게 주장하는 스스로가 감방의 수인 되길 자처하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우리가 행복해져 북한이 감화되길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북한이 우리를 두려워하길 어쩔 수 없이 바랍니다. 최순실 정권은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악을 택했습니다. 북한에게 두려운 정권이 되기 위해 국민의 행복 추구를 포기하고 제한했습니다. 재벌 배를 불려놓고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낙수 효과에 빨대를 꽂아 '국익을 위해' 특정인에게 재분배했습니다. 숱한 관료, 석학, 양심적 정치인들이 그 과정을 합리화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투표로 뽑은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목숨이 달린 주사액까지도 한낱 비전문가 개인에게 맡겨 자신의 안전과 국가의 안보를 위협했습니다. 게다가 작은 정부를 주장했던 보수정권이 큰정부를 넘어 민간 영역에 간섭하는 통제 정부, 국유 정부를 시도한 정황이 차은택 씨 입을 통해 광고사 지분 강압 매수라는 사건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통제, 국유화야말로 지난 MB정권 내내 몰아내려고 했던 큰 정부, 나아가 사회주의 정부의 대표적 정책으로, 심지어 진보 정권 당시조차 일부 국민생활에 밀접하거나 인프라에 속하는 산업 외에는 시도되서는 안될 정책이란 말이 나왔던 사안입니다. 대체 이 정권의 국정 철학이랄게 애당초 있기나 했습니까? 문제인이 북한에 결제를 요구했다면 이 정권은 국가를 사유화, 사회주의화라도 시킬 요량이었습니까? 딱 잘라 말하자면, 이 정권은 진보 정권도 보수정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부입니다. 국가를 수호할 의무가 있는 보수층이라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생각으로 최순실 정권의 환부를 도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야당 의원은 광장은 광장의 방식이, 국회는 국회의 방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스민 혁명 이후 모든 세계사의 주요 결정은 광장에서,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을 이끌며 나타났습니다. 국회만의 정치공학, 엘리트들이 바람직하다 생각하는 정치 지향은 더는 현실 사회에서 먹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광장 정치를 국회 내로 끌어들이느냐가 국민의 대변자로서 지금 국회가 할 역할입니다. 국민의 열망이 하야 혹은 탄핵이라면, 국회는 더이상 그 열망에서 괴리되지 말고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현할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정치적 손실은, 야당이건 여당이건 감내 없이는 혁신을 이루어낼수 없습니다. 광장에 나와 합세하던가, 아니면 광장에 나와 국민을 설득해 주십시오. 더이상 국회는 광장과 괴리될 수도 괴리되서도 안됩니다. 그게 새 시대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될 것이므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헌법을 고친다는 건 향후 100년의 후손들에게 폐끼치는 행위입니다. 새 헌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새시대의 미래를 위해서지 과거 정치인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