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때의 이기붕과 지금의 최순실… 놀라울 만큼 흡사한 시대상황

Fact

▲국정 농단→ 20만명 대규모 시위→ 교수들 시국선언→ 대통령 퇴진 요구→ 과도정부 수립→ 개헌. ▲1960년 4·19 혁명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진행됐다. ▲56년 뒤인 2016년 현재의 상황 역시, 국정 농단→ 100만명 대규모 시위→ 교수들 시국선언→ 대통령 퇴진 요구→ 중립내각 추진→ 개헌 추진으로 당시와 매우 유사하다. ▲4·19 당시엔 이승만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이기붕이 있었다면,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 곁에서 떡 주무르듯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있다. ▲4·19 혁명은 내각제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내각제 실험(1960년 6월 15일~1961년 5월 16일)은 336일 만에 막을 내렸고, 이후 대한민국은 긴 군사정권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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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의 2인자 이기붕(1896~1960)과 ‘국정 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60)씨. 두 사람의 공통점은 1인자 못지 않은 권력자 행세를 하면서 국가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는 데 있다. 이기붕은 부통령이라는 공적 지위에, 최순실은 사인(私人)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특히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들(이강석)까지 양자로 바치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 역사’(2013년)라는 책에서 이기붕의 권력 양상을 이렇게 썼다.

권력 2인자 이기붕의 국정 농단

<이기붕은 국회의장, 자유당 부총재로서 이승만 정부의 핵심적 지위에 있었다. 이승만 권위주의 체계는 이기붕을 정점으로 하는 비공식적인 지배구조에 의해 운영됐다. 노쇠한 대통령은 일주일에 한 두 차례 국무회의를 주관하였을 뿐, 국정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었다. 내각은 이기붕의 지휘 하에 내무, 외무, 국방 등 주요장관 6~7명이 ‘내집단’을 형성하여 국정을 협의하고 결정했다. 그들의 결정은 이기붕을 통해 대통령에 보고 되고 재가를 받았다.>

당시 상황은 가히 ‘이기붕의 국정 농단’이라 할 만하다. 이기붕과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부통령’ 자리 문제로 촉발됐다.

제1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 상황을 대비, 그 직을 승계하는 넘버2 자리인 ‘부통령제’가 있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유고 가능성에 대비, 부통령 후보로 최측근인 이기붕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던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을 제치고 이기붕을 당선시키려다 개표조작 등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4·19 혁명의 시작이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마산상고 학생이던 김주열의 사망이었다.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지 27일 만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던 것이었다.

대규모 시위-시국선언 등 현시국과 비슷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급기야는 4월 19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2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서울 전역의 시위 규모가 20만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당시 인구는 약 2500만명이었다.

급기야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들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이튿날 경무대에서 사저 이화장으로 떠났다.>

이승만, 자유당 총재 사퇴후 하야…박 대통령 수순은?

김주열 사망, 20만명 경무대 시위,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최순실 사태’로 벌어진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 4‧19로 인한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차후 플랜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을 먼저 사퇴하고 하야하는 수순을 밟았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새누리당 당적을 버려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하야의 길을 갈지, 탄핵을 당할지, 아니면 거국 중립내각을 구성하고 2선으로 물러날지는 미지수다.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권력 2인자 이기붕 일가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저로 떠난 다음 날인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이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당시 육군 소위)은 권총으로 친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을 쏴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이승만 정부 이은 허정 과도정부의 한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과도정부라는 또 하나의 정치 실험을 가져왔다. 이 대통령은 하야하기 전에 교통부, 사회부 장관을 지낸 허정을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장관에 임명해 정국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허정은 과도정부를 이끌게 됐다.

당시의 과도정부는 대통령의 권한을 잠시 대행한다는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거론되고 있는 거국중립내각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50일도 채 안되는 허정 과도정부(1960년 4월 27일~6월 14일)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거국중립내각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언론인 출신 박석흥 건양대 대우교수는 ‘한국 근현대 쟁점 연구’(2013)라는 책에서 “짧은 과도 정권 기간 중 허정 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과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 정권에 어려운 숙제를 남겨 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차기 집권 정당인 당시 민주당과 미국 그리고 허정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했다. 허정 과도정부는 4‧19 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고, 강한 반공 노선과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지속만을 생각했을 뿐, 부정 척결은 다음 정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도정부에 이어 내각제 출범

허정 과도정부에 이어 1960년 6월 15일, 개헌에 의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구성됐다. 새 헌법은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했고, 2달 뒤인 8월 양원 합동회의는 민주당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의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내각책임제 정부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내각제 정부는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이와 관련 “윤보선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지위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며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이 국군 통수권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총리, 군통수권 문제로 대립

제2공화국의 헌법을 들여다 보면,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제61조 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서중석 이사장은 2014년 6월 14일,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이 문제를 짚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당시 헌법에는 ‘군 통수권을 대통령이 갖는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참모총장 등 군 인사권을 가진 건 총리였다. 그래서 군 통수권이 어디 있느냐에 대해 장면 집권 내내 논쟁이 벌어졌다. 양쪽이 서로 자기 쪽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장면 정부에서 벌어진 군 통수권 문제는 현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정에서 손을 뗐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공교롭게 북한이 서해상에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될까.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군 통수권을 지휘하는 것은 박 대통령일까, 거국중립내각 총리일까, 아니면 국방부장관일까. 권한 조율이 있겠지만, 상황이 닥치면 이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헌을 통해 탄생한 내각제 실험(1960년 6월 15일~1961년 5월 16일)은 336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대한민국은 긴 군사정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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