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위에 나서는 시민들에게… 전직 조선일보 기자로 살아가기 ⑩

Fact

▲사람의 지극한 마음은 세상을 바꾼다. ▲2000년도 더 전의 예수나 석가는 자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혁시켰다. ▲그들의 위대한 정신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도 소통을 계속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인 오늘날, 소통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바꿀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View

“시위는 시위여야 한다. 시위는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위협'이다. 그런데 박근혜 퇴진 시위에 참여한 백만명 중 청와대를 향하다 경찰과 대치한 건 0.5퍼센트이고, 경찰 차벽에 오른 사람에게 '내려와!'를 연호하며, 경찰이 권고하는 시위 태도를 벗어나면 '프락치'라는 비난이 오가는 순치된 시위는 과연 '백만명의 위협'을 만들어냈을까. 오히려 '백만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위협'을 구현해낸 게 아닐까.”

며칠 전 한 진보 칼럼니스트의 페북에 이런 글이 떴고, 그걸 나의 페친이 공유했다. SNS의 좋은 점은 이런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나의 페친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시위는 협박”이라는 이 말이 옳은 말일까?

광화문광장에 모인 백만명은 박근혜를 위협하기 위해서 모인 것일까? 각자 생업이 있고 할 일도 많은 그들이 과연 조폭들에게나 어울릴법한 ‘위협’이라는 행위를 위해서 모인 것일까?

폭력은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이를 교육할 때, 목소리를 높여서 "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소리를 지르면 아이는 겁에 질려 무얼 어떻게 하라는 건지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화를 가라앉히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야, 이럴 때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내야 하지 않겠니?"라고 타이르면 아이도 충분히 알아듣는다.

대통령에게도 이런 원리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통령을 위협하면 대통령은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더욱이 대통령은 아직 합법적 권력을 놓치 않고 있다.

절제 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이며, 자유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시위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말 시위는 ‘순치된 시위’가 아니라 ‘절제된 시위’였다. 시위는 ‘위협’이 아니라 ‘의사 표현’이었고 ‘소통’이었다. “대통령은 꽃을 버림으로써 열매를 얻으라”는 의사 전달이었다. ‘탄핵’이 가져올 기나긴 무질서를 회피하고 ‘질서 있는 퇴진’을 함으로써 국가의 재정비에 대통령 자신이 기여하라는 제안이었다. 헌법이란 곧 국민의 뜻일진대, 구시대에 만들어진 헌법이 오늘날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정치적 결단을 대통령이 해 주십사 하는 요청이었다.

보수 언론이라 할 조선일보의 최원규 논설위원은 지난 7일 ‘만물상’에서 5일의 시위를 언급했다. 그는 “5일 시위는 평화롭게 마무리됐지만 어떤 시위꾼들이 또 화난 민심에 불을 붙이려 들지 알 수 없다. 성숙한 시민들도 선동에 휘둘리면 군중이 될 수 있고,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폭도로 변할 수 있다. 근본적인 수습안이 나와 시위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라고 했다.

최 위원의 충정은 이해된다. 그의 글은 ‘피로사회’의 저자인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백만 시위’를 앞두고 ‘비폭력-평화’의 방법을 격려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시위 자체를 ‘필요악’이라고 보는 시각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시위는 이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에너지’다. 또한 최 위원은 시민의 수준을 너무 낮게 봤다. 지금의 시민은 선동에 휘둘려서 폭도로 변할 수준이 아니다.

재미(在美) 철학자 홍창성은 페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신보다 저열한 자들에게 지배받기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한국은 누구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곳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공주병 아니 여왕병 걸린 자와 그를 따르는 왕당파 무리들이 지금껏 감추고 속이고 앙큼하게 거짓말을 해 와서라고만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정치에는 관심이 많지만 우리가 이런 자들을 분별하고 배척해 낼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였다고 판단해야 할까?”

어떤 이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위대한데 정치는 졸렬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게 논리적으로 가능할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은 것은 국민인데 어떻게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틀렸고 국민은 옳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대통령과 국민이 대치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대통령의 공(功)은 국민의 공이고 대통령의 과(過)는 국민의 과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의 진리다. “대통령의 한계는 국민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국민의 한계가 곧 대통령의 한계이다.

이는 언론의 한계이기도 하다. 1997년, 조선일보 윤희영 뉴욕 특파원이 노보(勞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미국 신문은 ‘이슈’를 중심으로 보도하는데 한국은 ‘계파’를 중심으로 보도한다. 미국 신문의 키워드는 ‘세금’, ‘총기 규제’, ‘이민’ 등인데 한국 신문의 키워드는 ‘동교동계’, ‘상도동계’, ‘친이세력’, ‘반이세력’이다.”

이는 명백히 후진적 보도 태도다. 미국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 샌더스와 클린턴 중에 누가 친오바마이고 누가 반오바마인지와 관련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한국 언론의 후진적인 보도는 오늘날에도 진행중이다. 새누리당에 들어와서는 ‘친박’, ‘비박’에 ‘진박’이란 단어까지 나왔다. 한 당의 당론을 보도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이 당내의 불협화음을 주로 보도한다.

도대체 왜 일반 국민들이 당내 속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가? 어떤 기업의 제품이 불량이면, 우리는 그 제품이 왜 불량으로 나왔는지 기업 내 계파에까지 관심을 갖고 이해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정치에서는 ‘계파’를 알아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치는 ‘지방색’과 ‘계파’로 이루어진다. 이는 정치인들이 사적(私的) 이해 추구 과정에서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언론이나 국민들은 여기에 놀아났다.

혹은 그 역(逆)도 가능하다. 언론이 자사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당내 세력다툼을 중심으로 보도했다. 혹은 국민은 공(公)적인 관심보다는 사(私)적인 관심에 골몰했으며, 언론은 국민의 관심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보도가 ‘계파정치’, ‘지역감정에 편승한 정치’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중립, 객관보도’로부터 언론이 일탈하여 스스로 정치의 ‘행위자’(actor)로 기능하도록 하는 유혹을 받는 것은 아닐까? ‘패거리’의 논리에 빠지지 말고 ‘이슈’에 관심을 가지면서 진지하게 공적인 생각을 전개하는 시민들의 문화가 정립돼야 언론과 정치도 변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또한 우주를 인식하는 ‘의식’을 갖게 됐을까?

가설 중 하나는 1000억개나 되는 뇌 세포가 서로 연결돼서 정보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창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창발’이라는 이 단어가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의식이 ‘빠른 정보 교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데에는 현대 뇌과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왜 가난한 나라는 가난하고 잘 사는 나라는 잘 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MIT의 세자르 히달고 교수와 히브리대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최근 새로운 답을 제시했다. 바로 ‘정보 교환 속도의 차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세계는 ‘디지털 혁명’, ‘정보 혁명’의 와중에 있다. 인터넷 보급이 가장 빠른 국가에 속하는 한국에서는 그 혁명이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중이다. 시민들은 인터넷으로 ‘비폭력’을 서로 다짐하고 시위장에 나왔다. 현장에서도 폭력이 등장할라치면 휴대폰으로 이를 찍어서 인터넷 공간에 올린다.

폭력은 역풍을 부르기 십상이어서, 시위대나 경찰이나 폭력을 쓸 수가 없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해서도 정부 측에서 사실상 아무 말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그리고 서울대 백선하 교수가 과장직 보직해임을 받은 것도, 명백한 증거가 인터넷 상에 존재하고 있고 누구나 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힘은 시민의 힘이다.

그러나 정보 교환의 ‘속도’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정보 교환의 ‘질서’가 중요하다. 정보가 교환되지만 ‘패거리’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든지, “우리가 옳다”며 상대를 조롱하는 정보 교환뿐이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놈의 ‘새로운 집회문화’는 14년전에도 12년전에도 8년전에도 있었는데... 없어졌다가 어느날 갑자기 솟아올랐나봅니다.”

이는 앞에 인용한 “시위는 협박”이라는 포스팅에 붙은 찬성 댓글이다. 이 ‘새로운 집회문화’, 즉 ‘평화집회 문화’는 어떻게 갑자기 생겨났을까?

그것은 지난해 12월5일, 민주노총 등이 주도한 ‘제2차 민중 총궐기 집회’로부터 비롯됐다. 개신교와 성공회, 천도교, 원불교, 불교 소속 단체들이 모인 '종교인 평화연대'는 이날 서울 중구 파이낸스 센터 앞에서 '위헌적 차벽 설치 반대와 안전한 집회 및 행진 보장'을 위한 종교인 호소문 발표 및 기도회를 벌였다. 종교인과 시민들이 손에 꽃을 하나씩 들고 행진함으로써 ‘평화의 꽃길’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행사로 인해 1차 총궐기 집회 이후 논란이 된 '과잉진압-과격시위'의 악순환이 끊겼다.

‘평화의 꽃길’은 도법 스님이 이끄는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주도했고, 이 퍼포먼스는 도법이라는 한 개인의 ‘깨달음’으로 해서 생겨났다. 이날부터 시민들에게는 ‘평화’가 각인됐고 폭력시위는 종식됐다.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평화의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이전에 사람들은 으레 “시위에는 폭력이 동반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평화의 꽃길’ 행사 이후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들어앉았다. 이제 시위의 개념이 ‘위협’과 ‘폭력’에서 ‘소통’과 ‘평화’로 바뀐 것이다.

한 사람의 지극한 마음은 세상을 바꾼다. 2000년도 더 전의 예수나 석가는 자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혁시켰다. 그들의 위대한 정신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도 소통을 계속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인 오늘날, 소통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오늘날 한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바꿀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번 주말에도 50만명이, 혹은 100만명이 모인다고 한다. 미국 덴버대학교의 정치학 교수 에리카 체노웨스의 ‘3.5% 법칙’이 전해지면서 “인구 5천만명의 3.5%인 175만명이 비폭력 시위를 지속한다면 박 대통령도 못 버틸 것”이라는 전망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 도심이 물리적 충돌로 얼룩질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도 19일 오후 2시 서울역 광장에서 '대한민국 헌법 수호를 위한 국민의 외침'이라는 집회를 열고 '한국자유총연맹(KFF)'도 여기에 참여함에 따라 좌우 시민들 간의 충돌이 우려되는 것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말했다. 촛불 시위를 폄하한 발언이다. 그러나 바람 앞의 촛불은 박근혜와 친박이다. 그들은 국정농단을 방치함으로써 전 근대의 왕과 내시임을 자처했던 세력들이다.

논리로 안 되는 측은 힘으로 하거나 혹은 도망가고 싶어 한다. 부당한 일을 한 자를 응징하는 방법은, 감정을 상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달램으로써 힘을 사용할 여지를 주지 않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건 정서적 충돌이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제발 폭력에 휘둘리지 말고 지혜롭게, ‘꽃을 든 마음’으로 시위를 하자.

/김왕근 (전 조선일보 기자, 수습 24기 • ‘붓다로살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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