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자

언론, 영화, 교과서 등을 통해서 뿌려진 흔한 얘기들은 가급적 배제하고 다른 각도로 감춰져 있던 일면들을 정리, 요약한 것이니 참고상으로만 봐주세요. 1. 기본 정보 명성황후 민씨 (明成皇后 閔氏, 1851~1895) 본명: 민자영 (민비, 민씨 교차 통용) 아래부터는 줄여서 민씨로 서술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아내이자 순종의 어머니.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후(추존) 철종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끝장을 보여준 인물로, 당시 민씨 일가는 민씨를 등에 업고 나라 살림을 죄다 말아먹고 외세가 들어오게끔 구실을 만들어준 장본인. 역대 왕비중 한국사에서 여러 의미로 가장 유명한 왕비 또한 부정부패와 사치, 외세를 불러오는 등의 행위로 조선을 파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악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살해된 점, 조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철의 여인과 같은 이미지로 여론과 드라마, 그 유명한 이미연 뮤비등을 통해 엄청나게 미화된 케이스 2. 각종 매체, 미디어에서의 민씨 희한하게 민씨에 대해서는 뮤지컬, 드라마등 각종 매체를 통해서 그런지 현재까지 나쁜 이미지가 거의 없음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이미연 대사가 대중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에 파생된 드라마 명성황후, 영화 한반도, 뮤지컬등을 통하여 따뜻하며 지조가 있는 명성황후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굳히게 됨 특히 60~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까지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식인이나 역사학자들, 각 교단에서도 국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씨와 고종에 대한 실체를 알리거나 비판하면, 거의 사장되거나 민씨에 대한 좋은 점만 부각시켰던게 태반 이유는 군사정권과 박정희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면 민씨의 업적을 좋게 명분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당시 지식 깊이와 이해가 짧았던 국민들을 대상으로 언론과 드라마를 이용하여 민씨를 신급으로 격상시키는게 대부분이었음 그 후, 군사정권 이후 민씨에 대한 실체를 알리고자 여러 지식인들이 다시 움직였지만 이미 국민들 태반이 민씨에 대한 우호감과 동정론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영화사나 방송사는 그걸 또 이용하여 바로잡기는 커녕 매출 올리기에 급급했음 (드라마, cf, 뮤지컬등) 즉, 국민들 인식은 한쪽으로 대부분 치우쳐져 있었고, 국가는 이미지 메이킹을, 기업과 방송사는 상업적으로 돈만 벌 궁리에 열을 올린 나머지 기형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음. 그나마 지금은 언론의 다양성과 매체 발달로 많이 알려진 편 3. 갖은 사치와 비리 그리고 엄청난 부패 서태후는 민씨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 할정도로 나라의 예산을 본인 사치질(자세한건 아래에 상세 후술된 표범 양탄자나 미용, 친인척 비리등을 참고)로 대부분 탕진했고, 일설에 따르면 흥선 대원군이 10년동안 모아둔 돈을 1년만에 다 소비했다고 함 그중 악명높은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1) 민씨의 수탈과 횡포까지 더해져서 임오군란 때 민중들이 민씨와 관계된 여흥 민씨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음 2) 매천야록에 따르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끌어들이고, 순종이 태어나자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 내탕금을 탕진하고 호조의 예산까지 까먹는 막장짓을 저지름 3) 제사 지낸다고 멀쩡한 쌀가마니들을 한강물에 던진 실화 일가 친척 또한 저지르는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대부분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팜. 물론 일가 친척중에는 민영익 같은 개념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친일파, 부정부패의 요인들임 오죽했으면 일본 폭력배랑 그에 협력한 조선인들이 민씨가 시해될때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민씨와 그 일가, 친인척에 대한 민심은 극히 바닥이었음 p.s 민씨와 친인척을 비판한 황현이 쓴 매천야록이 야사에 가깝고 민씨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하다는 객관성 논란이 많았으나, 그 시대의 국가에 대한 백성들 민심이 매우 밑바닥이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민씨와 그 일가를 매우 싫어하고 조롱한 풍자가 많았다는 점, 그 시대의 여론을 반영해서 썼다는점 등을 감안했을때 현대에 와서 매천야록은 재평가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입증되는 분위기임 현재를 매천야록으로 비유하자면, 한낮 루머에 가깝던 최순실, 청와대 사건들이 거진 기정 사실화되는 것처럼 위에 서술한 민씨와 친인척의 악행은 거의 사실이라 봐도 무방함 4. 동학 농민운동 그 시기에는 민중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투입. 이 얘기는 백성들이 불만이 쌓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걸 외국의 군대로 진압했다는 것(이건 매우 중요. 조선을 더욱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전쟁 또한 일본의 승리로 더더욱 정당성을 부여시킨 치욕스러운 발단이라고 보면 됨) 쉽게 설명하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미군이나 중국, 일본군을 국내로 끌어들여 백성의 무력 시위를 유혈 진압했다고 생각하면 쉬움. 결과적으로는 미련을 넘어 매우 한심한 짓이자 악랄한 짓을 벌인 것임 그 이유는 민씨의 그 결정이 바로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만듬. 청나라, 일본이 어떻게든 들어오려는 내정 간섭할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자동으로 문 열어주고 들어오게 한 "어처구니없는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 p.s 흔히 교과서나 언론을 통해 각인됐던 러시아와 청나라, 일본에 대한 견제 구도를 유지했다는 점. 이것만 봐도 명성황후는 매우 잘한게 아닌지 등 이런 의견이 대부분 지배적인데,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세가지 이상이었다고 함. 이에 대한 토론은 너무 길어지므로 판단은 각자의 몫 5. 을미사변 임오군란때도 시해 당할뻔한 적이 있었지만, 궁녀로 변장해 살아남은 적이 있었음. 민씨는 을미사변때도 같은 방법으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낭인들이 조선왕실에서 궁녀로 일한적이 있었던 일본 여자를 대동했거나 현장에 있던 일본인 궁녀가 저 여자가 왕비라고 지목했다고 함 그 후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하고 기름으로 소각됨. 이 사실은 당시 교관이나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러시아인과 미국인등 외국인들이 목격하고 증언하여 알려지게 됨 시해소식을 들은 고종은 두려워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함. 아관파천은 곧 "러일전쟁"으로 이어짐 개혁파였던 김홍집은 을미사변의 배후자로 모두 뒤짚어 쓰지만, 또 포기하지 않고 공사관에 틀어박혀 있는 고종에게 거기 있으면 안된다고 설득하러 가는 도중 진짜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당시 인지력이 없는 백성들에게 칼에 찔려 안타깝게 죽음(여러 설이 있으나 고종이 배후라는 설도 있음). 교과서에서도 쉽게 지나치는 재평가 받아야 될 인물중 하나 6. 을미의병 을미의병은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일어난걸로 착각들 하지만, 을미사변 이후 을미개혁때 단발령이 시행되자 들고 일어난 사건임. 사실 구한말 의병의 주역들은 유림이 주축이었는데, 유림들과 민씨 일가와는 사이가 안좋았고, 위에서 기술한 매천야록을 쓴 황현도 이런 케이스 7. 고종 배후설 최근에는 고종이 비선실세급 배후였다는 설도 있으며, 민씨가 외척들을 등용시키고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싸움을 벌인것도 고종의 계획이라는것 우선 민씨의 막장 행각의 최종 결정권자는 어디까지나 고종이었으며, 우리가 알고있는 고종 이미지와는 반대로 민씨에게 휘둘리는 스타일이 아니라는것. 유교 중심 사상이던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이라도 아버지한테 반항하는 것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고종이 민씨와 외세를 이용했다는 주장 민씨 친인척들을 대거 등용한 것도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에 대항하여 민씨의 친척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려한 계획의 일환으로 볼수 있다는 설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나라를 팔아먹은 민씨에게 휘둘리던 인물이라는 점과 부부가 쌍으로 나라를 판 짓은 변함이 없음 8. 정리 / 총평 민씨가 현재와 같이 높이 평가되고,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은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미화를 너무 많이 해놨고, 매체뿐만 아니라 교과서에서도 민씨는 청, 러시아를 지능적으로 끌어들여 이들간 힘의 균형을 이용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유지시키고자 했으나 간악한 일본에 의해 참살당한 약소국의 비운의 여성으로 묘사되는게 태반 역사는 상대적인 것이고 절대적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어떻게 평가할지는 본인 자유니 참고상으로만 읽어주시고,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참고로 꽤 기니 안 읽으실 분들은 여기까지만ㅋ

■ 여기서부터는 상세 서술 □ 평가: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인물로, 동시대 인물이었던 유길준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명성황후 자신과 민씨 일가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개혁 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하는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명성황후의 추천으로 "수많은 인척이 등용"되었다. 이들이 민씨 일파다. 명성황후의 파벌인 민씨 일파 역시, 명성황후의 이름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지만 명성황후는 이를 만류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장려하며 이러한 전횡과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민씨 일파의 세력을 급격하게 키워나갔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심했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꿀 지경이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끔찍하게 뜯어 먹은 탓에 후일 그가 휘문학교를 세웠을 때 이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었던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민씨 일파의 패악질은 놀랍게도 일제 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중에 상당 지분을 민씨 일파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행한 친일 행위의 비중이나 악영향 역시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명성황후가 나라에 끼친 가장 큰 폐악 가운데 하나는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에 팔아 버린 것이었다. 일례로, 알렌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미국에 단돈 2,700원에 팔아넘긴 운산금광의 채산성이 4,000만원 정도였다. 국채보상운동이 갚고자 했던 국가의 빚이 1,300만원 정도였으니 저 금광만 잘 관리했다면 국채보상운동은 애초에 없어도 됐을 것이며 미국인 알렌만 좋은 일 시킨셈이 되었다. 다만 운산 금광의 경우, 2,700원에 팔린 것이 아니라 일시금 25만원에 년간 25,000원을 받는 조건으로 25년간 특허권을 준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2,700원보단 많지만 여전히 파낸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게다가 그 돈 다 받지도 못했다 역사학자들의 해석 중에는 명성황후의 역할은 "고종의 대리역"이라는 해석도 있다. 철저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아버지와 대립한다는 건 고종 입장에서 부담이 큰 일이다.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고종과 흥선 대원군은 직접 맞서는 대신 명성황후를 통해 싸우게 된다. 마치 강대국들이 직접 싸우기 부담스러우니까 대리전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근에는 이노우에 공사가 명성황후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금전 제공과 그에 따른 일본의 영향력 확대, 또 일본에 빚지는 것을 사전 차단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덧붙이자면 당시 일국의 왕비로서 일본의 차관을 받기로 하는 결정은 딱히 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 아니므로, 아마도 명성황후 자신이 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는 와중에도 일본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받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혹은 대여금(차관)은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므로 굳이 받지 않은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시아버지 홍선대원군과의 관계: 명성황후는 비록 흥선대원군이 간택한 며느리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틀어져 나중에는 결국 견원지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그 원인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완화군과 관련된 설이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직전인 1871년 11월 4일 명성황후는 첫 아들을 낳는데. 이 아이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 결국 4일 뒤인 11월 8일에 죽는 일이 벌어졌다(출처 승정원일기 1871년 11월 8일 기사),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이전에 고종과 궁인 이씨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시도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덧붙는 야사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자, 아기의 건강 회복을 위해 산삼을 달여 먹도록 지시했는데, 달인 산삼을 먹어봐 민씨의 아들은 얼마 후에 급사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아기를 살해한 것이라 주장, 흥선 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위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게 일단 죽은 명성황후의 아이는 대원군이 독살한 것이 아니라 항문이 막혀서 죽었고, 완화군 이야기도 자손이 귀해진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고종의 첫 아이기이자 귀한 손자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유난히 완화군을 귀여워한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왕권 강화을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책봉해야할 하등의 근거가 없고, 당시 고종이 아직 20도 안된 나이 인 것을 생각해보면 서자를 급히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명분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각설하고 아기가 죽은 후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대 노선에 나선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정치 세력화 하였고, 고종을 부추겨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공동 정치 체제를 부정하는 친정 선언에도 어느 정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명성황후의 개입이 어디까지었냐는 것엔 논란이 많다. 주로 알려진 야사에선 명성 황후가 고종을 조종하다시피 부렸다고 말하며, 명성황후의 막후통치설을 주장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기록된 자료에는 위의 이야기와 달리, 내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낀 고종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민씨의 파벌을 키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나와 있다. 실제로 대원군 실각 이후의 실제 대립은명성황후와 대원군이 아니라 고종과 대원군을 중심으로 문제가 커졌기에 야사에서의 이야기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와중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에 관한 소문 등이 널리 퍼진 것은 확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을미사변 시기 대원군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이 문제 자체도 대원군이 낚인 것에 가깝지, 주도했기는커녕 보조한 흔적도 없다. 차라리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인척관계 외 다른 연결고리가 있었으나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되면서 소원해졌다거나,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지고 고종의 처가인 민씨 일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 역시 대원군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해석이 신빙성이 높다. 또한, 이 둘의 대립이 심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일본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야사로 발전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렇게 추측하는 학자들은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일본이 명성황후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과장해서 퍼뜨린 이야기라고 본다. ◇ 2012년 6월,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이후 청에 잡혀있을 때 고국에 보낸 한글 편지가 명성황후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정말 명성황후가 수신자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위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뉴스 기사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이 정중하다는 걸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편지 내용이 이렇게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되어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 우선 이 사람들은 왕실 사람들이다. 왕실 사람들이 쓴 편지, 그것도 서로 주고 받는 편지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미사여구로 봐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더군다나 이 편지 보낼 당시에는 흥선군이 '을'이고 명성황후가 '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흥선군이, 본인의 귀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명성황후를 상대로 편지를 쓰면서 엎드려 기어도 시원찮을 판에 "너 때문에 이게 뭐야, 개년아!"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니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아무리 나빴다 해도 이러한 편지가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왕실 사람이며 또한 정치인이다.

■ 사치: 사치로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서태후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태후가 차라리 낫다. 서태후는 사치에 들이는 돈을 정하여, 정해진 범위안에서 사치를 했고 다른 예산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비록, 결과는 나빴지만 이화원 건축이나 해군 예산등 나름대로 국력 과시를 목적으로 쓴 지출이었으나 명성황후는 국력 신장 그딴 거 없고 그냥 돈만 보이면 다 써 버렸다. 더구나, 인구가 20배 재정의 차이가 30배 정도인 조선과 청의 사치의 스케일은 비슷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라면 명성황후가 얼마나 사치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여흥 민씨의 수탈까지 더해져서 임오군란 때 민중들이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으며, 황현의 매천야록 서술에 따르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끌어들이고, 원자(순종)가 태어나자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 내탕금을 탕진하고 호조의 예산(즉 국고)까지 까먹는 막장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 살해 이후의 민중들의 반응도 서술하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침입해 국모를 죽였으니 분노해야 할지, 학정과 부패의 대명사인 민씨 일파의 수장이 죽었으니 기뻐해야할지 헷갈려" 웃을까 울을까 망설였다네 했다고... 그 사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접견실의 크고 아름다운 표범가죽 양탄자가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반출된 후 실종되어 그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친인척 비리 그리고 친일파: 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로 가깝든, 멀든 모두 명성황후의 친족들을 말한다. 물론 모든 민씨 척족들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민영환을 들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척족과 연관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권력자였던 민씨 일가는 러시아에게 들이댔다가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나라를 망치고 매국을 하고 결국 친일까지 했다. 자신들의 황후이자 친족을 살해한 자들한테! 민건식 (1879~?)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의 아들이다. 1910년 이 후 남작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민대식 (1882~?)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민병석 (1858~1940)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민상호 (1870~1933)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민영규 (1846~1922)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민영기 (1858~1927)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34]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민영린 (1873~1932)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종의 첫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민영소 (1852~1917)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욱 (?~?)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민영휘 (1852~1935)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 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05년에는 휘문고등학교를 세웠는데 이게 이미지 세탁에 한몫하고 있다.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자들도 현재 그의 후손들.#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고, 결국 환수 불가로 결정됐다.# 민형식 (1875~1947) 민영휘의 양자로 한 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 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민형식 (1859~1931)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민종묵 (1835~1916)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민철훈 (1856~?)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 호칭: 보통 그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명성왕후', '명성황후', '민비' 3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명칭이 '민비'인데, 일단 1983년 이후, '명성왕후 민씨'나 '명성황후 민씨'와 달리 '성+비'로 된 '민비'는 공식명칭이 아니니 호칭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학계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결론을 내렸다. 일단 학계의 입장은, 명성황후보다 더 문제가 많았던 다른 왕비들을 김비, 이비, 박비라는 식으로 부르지는 않는 것처럼 통일성을 두자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은 권장사항이지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기에 명성황후만은 현재까지도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곤 한다. ◇ 사실 공식명칭이 꼭 통칭이 되는 것은 아니며, 법적으로 대중들이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1983년에 나온 결론은 공적인 매체나 공적인 장소에서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왕비의 호칭으로 '성+비'로 된 명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가급적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지, 아예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적인 경우에 그녀를 가리킬 때, 공식명칭을 사용할 것인지 공식명칭이 아닌 '민비'를 사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호불호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명성황후 민씨는 보기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라, '민비'란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해 그녀를 어떻게 보느냐는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하고 있어 계속 논란이 되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대부분은 '민비'로 그녀를 호칭하는 걸 보면 이 논란은 어떤 명칭으로 그녀를 부르는지보다는 그녀를 보는 관점과 더 관련이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명성황후와 마찬가지로 성+비로 된 명칭이 호칭의 하나로 사용되었던 순정효황후 윤씨의 경우는 1983년 이후로 이런 논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논란에는 크게 '민비는 대한민국에서 공식명칭이 아니니 사용하면 안 된다. VS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다. 사적인 곳에서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그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다.'와 '민비는 일제가 만든 명칭이니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선 사용하면 안 된다. VS '성+비'로 된 명칭은 조선에서도 사용한 것이다. 일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의 두 가지 논쟁이 있다. 전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제의 명칭을 누가 만들었느냐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후자는 꽤 중요한 문제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황족들의 칭호를 격하했고 이 당시 일제가 만들어 그들의 호칭으로 쓰인 명칭들은 법적인 처벌을 받는지와 관계없이 대한민국에선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대부분 일제가 만든 조선의 황족들의 명칭들을 호칭으로 사용해야 할지 말지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후자의 논쟁에서 어떤 결론이 나느냐가 전자의 논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민비마저도 일제가 만든 통칭: 생전에 사용된 그녀의 공식 호칭은 결코 '민비'인 적이 없었다. 당대 기록에선 대부분 중전, 중전마마, 왕비, 중궁전하 민씨 정도로 적혀 있다. 폐서인이 되지 않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성+비'로 만들어진 명칭이 잘 알려진 호칭의 하나로 사용된 사람은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뿐인데, 그것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매천야록과 윤희순의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 '민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당대에 '민비'라는 호칭이 쓰였다는 걸 증명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매천야록은 황현의 후손의 필사본으로 1920~30년대에 쓰인 것이고 현재 전해지는 윤희순의 격문은 윤희순 의사 말년(1935년 사망 직전의 회고록)에 재 작성한 해평 윤씨 일성록의 기록이다. 원본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이보다 십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므로 단어 몇 개가 바뀌는 식으로 원본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에서 '성+비'로 된 호칭으로 왕비를 부르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성+비'로 된 명칭이 왕비를 부르는 통칭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는 추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 부정론자들은 조선과 일본의 호칭 체계를 비교해서 이런 명칭이 생겨난 원인을 이렇게 추정한다. 조선의 여성들은 통칭으로 통상적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왕실 여성들도 존호나 지위명이 통칭으로 쓰였고, 후궁은 대부분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호칭 체계는 조선과 다르다. 일본에선 여성에게도 통상적인 '이름'이 있지만, 일본 황실은 성씨가 없다. 그 때문에 황족과 결혼한 여성을 통칭할 때 주로 '이름+비', '이름+황후'가 쓰인다. 호칭 체계에서 두 나라가 같았던 건 군주의 정실 부인에게만 시호를 올렸고 이를 통칭으로 사용했다는 것 정도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조선의 황족들을 집어넣었다. 조선 초기 이후로 왕비는 대비가 되지 않는 한은 존호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본 입장에선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에겐 성씨 외에는 마땅히 '이름'으로 쓸 명칭이 없었다. 당시 명성황후에겐 고종이 준 시호가 있었지만, 조선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황족들의 신분을 격하시킨 상황에서 그 시호를 그녀의 '이름'으로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통칭으로 사용될 호칭으로 '성+비'로 만든 명칭이 생겼고, 그 후로 이 호칭이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통칭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한국 공식 위키피디아 / 나무 위키 외

카드 정리중인데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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