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는 없다』세월

● 여자가 혼자 낯선 호텔방을 찾을 때


상처의 시간이건 행복의 시간이건 시간은 흐르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탄력을 잃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직 젊은 나이.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모든 것이 어중간한 그런 나이였다. 호퍼의 그림 「아침 햇살 속의 여인」(1961)은 어떤 이유로 지금까지의 삶으로부터 떠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는 유명한 대사 속의 그 태양, 어제의 내일인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이제는 희망을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을 할 때이다. 여인은 기어코 일어나서 단호하게 과거로부터 등을 돌려 시작의 아침을 향했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의 주인공 로라 브라운은 그림 속 여인처럼 홀로 낯선 호텔에 들었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낯선 호텔에서 남편을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기획한 것도 아니고, 남편의 눈을 피해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다. 로라가 간절히 원한 것은 오직 책을 읽을 수 있는 두세 시간이었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지칠 줄 모르던 책벌레 소녀 로라 지엘스키는 동생의 친구이자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전쟁 영웅 댄 브라운과 결혼해서 로라 브라운이 되었다. 지엘스키라는 특이한 이름에서 브라운이라는 평범한 이름이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내성적인 독서광은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댄은 선량하고 믿음직한 남편이었고 아들 리치는 엄마를 닮은 감수성 예민한 꼬마였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었지만 모두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만 느껴졌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남편과 아들을 사랑했다. 차이는 하나였다. 남편과 아들은 가진 것을 더 가지고 싶어 했다. 그들은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를 원했다. 반면 그녀는 갖지 못한 그것을 원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혼자 두세 시간 책을 읽는 것, 엄마나 아내 이전에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제대로 된 것도 없었다. 로라는 세상에 통용되는 기준으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무표정한 호텔 방에서 홀로 있는 그녀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망적일 만큼 삶을 사랑했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21세기 현대인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다. “삶. 런던. 6월의 이 순간”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곱씹었다. 로라는 그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고, 또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삶에 가해진 폭력,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만 세상의 폭력에 넌더리를 냈다. 버지니아 울프가 원했던 진실한 세계는 폭력적인 남성적 세계에 의해 처절하게 바스라졌다. 원하는 삶이 주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판명된 순간, 버지니아 울프는 삶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갔다. 주머니에 무거운 돌을 잔뜩 담은 채. 그녀는 강으로 걸어 들어갔고, 빠른 물살은 수척하게 여윈 여류 작가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로라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낯선 호텔 방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났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20세기 말 뉴욕 어느 6월의 아침. 이름 때문에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클래리사라는 파티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세 여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아름답게 변주되는 소설인데, 그 마지막 인물이 클래리사이다. 매일매일 지나가는 시간은 사랑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한 시절, 세월이 된다. 로라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이 죽음 앞에 맞닥뜨릴 정도로 절박했지만, 클래리사만은 유독 태평해 보인다. 클래리사가 맞이한 그 아침은 아주 좋았다. 맑은 초여름 아침이었고, “새로운 삶의 확신으로 충만한 그런 아침”이었다.


그날은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리처드를 위한 특별한 파티가 있는 날이다. 리처드와 클래리사, 두 남녀는 젊은 날, 불같이 사랑했으나 그 사랑은 이내 식었다. 나중에는 둘 다 각자의 동성 애인들과의 사랑에 몰두했다. 리처드는 자신의 동성애적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시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중요한 오늘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클래리사 역시 동성 애인과 함께 십팔 년째 평범하고 유복한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이 사랑은 초기만큼의 뜨거움은 없지만 그래도 잘 해 오고 있다고 클래리사는 생각한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 사랑하는 것, 삶에 대해 끊임없이 희망을 갖는 것


그러나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도시 한가운데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이 깃들었다. 사실 리처드는 오래전부터 에이즈로 고통 받고 있었다. 시상식을 몇 시간 앞두고 리처드는 (클래리사가 보는 앞에서) 창문으로 투신자살을 해 버린다.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평가보다 에이즈 투병 중인 작가에 대해 갖는 야릇한 관심사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화려해야 될 그날, 그는 삶의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를 위해 주문했던 음식은 장례식 음식이 되고 말았다.


리처드의 장례식에 ‘그녀’가 왔다. 그녀, 리처드의 시에 자주 등장했던 “방황하던 어머니”, “자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일상을 탈출했던 부인” 로라 브라운이 온다. 전남편의 죽음, 음주 운전으로 인한 둘째 딸의 죽음, 이제 아들 리치의 죽음까지 맞이하게 된 여인. 그 여인은 팔순 노인이 된 로라 브라운이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그림 속의 그녀는 마치 우리가 알몸으로 세상을 나오듯 그렇게 빛을 향해 이끌리듯 섰다. 지리멸렬한 가운데서 살지 않을 수 없고 또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삶은 그다지 빛나는 것도, 그렇게 어두운 것도 아니다. 무수히 많은 명암이 교차하는 가운데 각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옳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삶을 사랑하는 만큼 희망해야 한다. 희망은 삶을 사랑한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니까. 늘 그래 왔듯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그냥 뜬다. 그 태양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이다.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 클래리사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인간은 도시를, 그리고 아침을 마음에 품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희망한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그 어떤 무엇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삶에 대해 끊임없이 희망을 갖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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