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는 결국 의문에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자 사랑입니다. 결국 속박은 실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애(自己愛)의 결여일 뿐입니다. 우상숭배가 유지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우상숭배를 통해야 한다고 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에 자꾸 의지하게끔 사람들한테 노예근성을 자꾸 심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결국은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자꾸 끌어들이고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방편삼고 무엇을 계기 삼았습니다. 그러면 이런 게 무엇이냐 하면 전부 다 노예근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깨우침이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아 내가 모든 것에 대한 주권, 주체였구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내가 주체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있어서 무엇을 통해서 깨우쳤다는 게 말이 될까요? 다시 말해서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어떻게 주권을 되찾을 수 있겠어요? 그럼으로써 자기를 가두고 있던 그 족쇄 같은, 깨닫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되고 깨우치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 아닐까요? 이렇듯 대 자유를 찾는 내가 바로 찾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지성 인류의 진실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육신적인 나만이 나의 전부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 이 문제를 우리가 풀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뭘 거창한 수행을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기라고 하는, 육신적인 나만이 나라고 하는 고집을 자기가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자기 스스로 알면서도 끝없이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육신적인 나가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육신적인 나가 있음으로써 육신적인 나와 비육신적인 나로부터 자유로운, 이 둘로부터도 자유로운 진짜 대 자유 그 자체인 내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명한 나는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나는 그렇게 자유자재 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 자유입니다. 서유당 사색: 대 자유의 나라는 것은 결국 육신의 나를 초월하는 순수한 신의 사랑이다.. 그것을 쫓아서 하루 하루 나를 반성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