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인용 결정 그 후

판결에 승복하고 당당히 받아들이는 데는 좌도 우도 달리 없었습니다. 한편, 자신이 부당하다 여기는 사안에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에도 좌우가 다르지 않았던듯 합니다.


어제 헌재 앞 탄기국 시위는 흡사 그들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던 강성 노조 시위, 광우병 폭력 집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차벽이 파손되고, 사람이 죽고 다치는가 하면 경찰의 해산 통보가 여러 차례 이어지는데도 아랑곳없이 도로를 점거하고 차벽과 간판 위로 오르며 외신 기자들까지 폭행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최루액이 분사되었고, 경찰 차량이 탈취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혁명과 불복을 말하며 폭력을 선동하던 현장 몇몇 인사들은 흡사 이석기 일파의 내란 모의 녹취 음성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한국 국민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며 헌재 결정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탄기국 집회에서 태극기와 함께 흩날리던 성조기는 더이상 그들의 힘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또한 한기총을 비롯한 종교계 역시 탄핵 인용을 수용하는 반응들을 내놓았습니다. 한반도의 역사에 하나님이 관여하심을 역설하던 대통령 대리인단 변호사의 말은 개인 의견에 불과할 뿐이 되었습니다.


정치인들도 탄핵을 수용하는 입장을 어제 하루 종일 내놓았습니다. 자유한국당 및 야4당 모두 결과를 승복하거나 환영했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제하며 국민을 진정시키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총리또한 대국민 담화로 헌재 결정에 승복하라는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오로지 반발하는 건 일부 인사들뿐이었습니다. 박근혜는 침묵했고, 그로 인해 헌재 앞에 모여 분개하는 사람들을 사실상 방치했습니다. 자기보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한다면서, 정작 자신의 파면 결정을 목도하곤 제 한 몸 추스를 생각밖에 못하며 어제 집회의 폭력 사태를 막지 않았습니다. 단 한 마디, 승복한다는 말, 아니 진정하고 일단 발길을 돌리시라는 말 한 마디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탄핵 반대를 외치던 정치인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선고 전, 각 정당에서 의원들을 불러 모아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전 대통령의 자제하란 그 한 마디가 없었기에 사태는 예상대로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도록 발전했고 경찰과 시위대 양측에 강성 노조 집회 못잖은 피해를 안겼습니다.


11일 오늘은 또다시 광장의 집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경찰은 또다시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를 주시할 것입니다.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주시하겠지요. 과연 애국 보수라 자칭했던 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소위 '빨갱이' 좌파 시위꾼과 어떻게 다른지, 과연 애국 보수의 '품격'이란 어떠한 것인지 오늘의 집회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어제의 탄핵 심판과 그 전후 사정은 훗날 역사책에 남을 것입니다. 먼 미래, 우리 후손들이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을때, 혹은 남북한이 어떻게 다른지를 물을때 우리는 두 건의 탄핵 심판 사진과 영상으로 설명을 갈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몇마디쯤 덧붙이겠죠. 우리는 불의라고 여기는 것에 항거할 줄 안다고. 그것이 잘못이건 잘한 일이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뽑은 지도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노라고.


두 번의 탄핵 심판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공산주의 독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까닭입니다. 87년 헌법이 여전히 민주주의 최후의 방파제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사족을 붙이자면, 저는 이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 세대의 낡은 감성으로 만든 법으로 미래 세대를 구속하길 원치 않습니다. 지금 만드는 헌법에 구속받을 세대는 이전까지 우리가 경험치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대입니다. 의무와 권리, 국가와 민족, 정치사회와 과학 기술관에 있어서 지금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대입니다. 그들 몸에 맞는 제도는 마땅히 그들 스스로 만들어야 옳습니다. 현 세대가 과연 그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할 역량과 자격이 충분할까요?


이제 30돌을 맞은 87년 헌법 체제입니다. 향후 100년을 보고 지었을 법이 그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효력을 다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최소한 향후 10여년은, 사회 각계 각층의 요구를 듣고 우리가 세울 새로운 헌법 정신이 무엇인지를 합의한 뒤에야 비로소 새 헌법을 논의해야 마땅합니다. 정치 제도 조금 바꾸겠다고 헌법 개정 운운하기엔 이르다는 말씀입니다.


헌법에 규정되는 건 단순히 정치인들을 구속하는 룰 그 이상의 것입니다. 각종 시민의 권리와 지향,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 되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규정하는 법적 근거의 원천이 바로 헌법입니다. 어떠한 법과 행정도 헌법에 따르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고, 어떠한 권력도 헌법과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법률에 구애받지 않고는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제 헌재의 결정은 바로 그 점을 정확히 짚어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한 헌법이 무엇인지를 온 시민이 함께 논의할 시작점입니다. 바쁘다고 밥도 안 된 생쌀을 씹어먹으려 해서는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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