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를 빼고 '액션'을 논하지 말라

[노컷 리뷰] 서사마저 뛰어 넘은 여성 액션의 세계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영화 '악녀'는 액션에 집중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악녀'의 주인공은 배우 김옥빈이다. 김옥빈의 존재 없이 '악녀'는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큰 존재감을 차지한 적이 언제였던가. 배우의 존재감은 결국 편집권을 가진 감독과 배우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김옥빈은 95% 가량에 이르는 액션 분량을 홀로 소화하며 자신의 존재를 거대하게 키워나간다. 권총, 기관총, 장검, 단검, 도끼까지 그가 손에 쥐어보지 않은 무기가 없을 정도다. 어릴 때부터 무술 계통 운동을 연마했다던 김옥빈은 자신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스크린 위에 쏟아낸다. 영화 곳곳에는 정병길 감독이 어떻게 하면 액션의 '신세계'를 펼칠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게임처럼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오프닝 시퀀스와 영화 말미 김옥빈이 복수를 위해 벌이는 추격전은 그 절정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숙희는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층을 하나 하나 '클리어'한다. 어둡고 좁은 복도에서 밝고 넓은 체력단련장까지 확장되는 액션 장면은 감독이 '공간'을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1대 다수와 킬러 숙희(김옥빈 분)의 액션 장면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스크린과 함께 잔혹한 살육 현장으로 관객들을 옮겨 놓는다. 압도적인 몰입감은 이 액션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도 잊게 만든다. 감독의 기지는 국정원 비밀 조직에서 숙희가 탈출하는 장면에 또 한 번 발휘된다. 숙희 시선으로 따라가는 이질적인 공간의 출현이 조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불안정한 숙희의 감정을 전이시킨다. 마지막 시퀀스는 보다 처절하다. 마치 오프닝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수미쌍관 구조로 이뤄져 있지만 이전과 달리 숙희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것 같은 집념을 발휘한다. 차 보닛에 올라 타 핸들을 조정하며 운전하는 숙희의 얼굴은 '악'에 받쳐 있다. 기만과 배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오면서 언제나 피해자였던 그가 진정한 복수를 꿈꾸는 순간이다. 잔혹한 킬러라고는 하지만 숙희를 향한 관객의 감정은 '안쓰러움'에 가깝다. 그의 몸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삶은 단 한 번도 뜻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 평범함을 알 수 없는, 온갖 살의로만 가득 찬 삶.


숙희는 살기 위해 그런 삶을 선택하고, 그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꾹꾹 눌러왔던 숙희의 감정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터지듯 폭발한다.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채 숙희는 달리는 버스에 도끼를 찍어대며 뛰어든다. 날 것으로 몸부림치는 액션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묵직한 고통을 전한다. 기본적으로 숙희는 사연이 많은 캐릭터다. 그가 국정원 비밀 조직의 킬러가 되기까지 과거에 있었던 사연들은 현재와 끊임없이 연결돼 나타난다. 킬러가 되기 이전의 어린 숙희와 괴물로 거듭난 어른 숙희가 번갈아가며 극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수많은 숙희의 사연 중 가장 이질감을 주는 것은 국정원 요원 현수(성준 분)와의 멜로 이야기다. 중상(신하균 분)과 숙희의 관계는 과거 회상 장면부터 치밀하게 쌓여오고,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복수'라는 테마와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현수는 숙희에게 '혼란'을 주는 캐릭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숙희와 관계를 맺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이 반감되고, 이야기의 중심 또한 흐트러진다. 숙희에게 '혼란'을 주는 이들은 중상과 국정원 부장 권숙(김서형 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의미있는 '액션'을 만들기 위해서 드라마는 필요하지만, 양을 조금만 줄였다면 전형성을 완전히 탈피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녀'는 최소한 국내 영화계에서 액션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기에 더해 여성 배우가 단독으로 액션을 연기하며 스크린을 채워나간다는 꿈 같은 이야기를 현실화시켰다. 그것은 기존 남성 배우들이 보여줬던 그 어떤 액션보다 강렬하고 새롭다. 일단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악녀'의 실험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악녀'의 출현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여성 배우들, 또 '서사보다 강한 액션'이라는 장르적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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