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9. 낮보다는 밤에 더 좋은 당신 (2)

“자요?”



도헌은 냉장고에서 생수 통을 하나 꺼내곤 굳게 닫힌 로라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닫힌 문 틈 사이로 도헌은 얼굴을 바짝 밀착 시켜 ‘자요’하고 물었다. 당연히 닫힌 문 사이로 로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헌은 어깨를 으쓱하곤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아니 아까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많이 속상해보여서 그냥 얘기 안 했지만.”



도헌은 생수 뚜껑을 닫으며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러곤 빙그르르 돌아 굳게 닫힌 로라의 방문을 바라보고 섰다.



“수고…했어요, 오호라 누나.”



도헌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아까 멍하게 정면을 응시하던 로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상처를 많이 받은 얼굴이었다. 그런 로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헌은 못내 마음이 아팠다. 로라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마음 아파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동안 이미 그 사람과의 사랑의 끝을,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단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끝을 홀로 예상하며 사랑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아팠을 일이었을 테니.


도헌은 곤히 잠들었을 로라의 얼굴을 상상하며 팔짱을 꼈다.




“누나의 그 사랑, 마냥 아프지만은 않았길. 그리고 앞으로도 아프지 않길. 바래줄게요.”



도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섰다. 이미 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로준을 한 번 바라보곤 도헌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잠이 오질 않는 지 기지개를 켜며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그때, ‘띵동’ 문자 알림 음이 울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휴대폰 불빛을 보며 이 시간에 누구지, 도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너 때문에 잠 깼잖아. 책임져라.



로라였다. 도헌은 로라의 문자에 피식 웃으며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었다.



- 소곤소곤 얘기했구만? 뭘 나 때문에 잠이 깨여. 얼른 다시 자세요.



하고 도헌은 머리맡에 휴대폰을 놓곤 흠…, 액정이 꺼진 휴대폰만 응시했다. 진짜 나 때문에 깬 건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응시하다 이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시금 반짝, 휴대폰 액정이 빛났다.



- 소곤소곤은 무슨 문을 부술 기세로 얘기해놓고.



“이 누나 또 오바는, 오바는….”



도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방을 나섰다. 조용히 주방의 불을 켜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무거운 눈을 비비며 도헌은 하품을 크게 했다. 그러곤 냉장고에서 우유와 꿀을 꺼내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하여튼…신경 쓰이게 하는 데 뭐있다니까, 이 누나.”



도헌은 냄비에 우유와 꿀을 넣곤 끓이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데운 우유를 먹으면 잠이 온단 말을 들은 적이 있던 도헌이었다. 도헌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팔짱을 끼곤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도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 야, 사람 잠 깨워놓고 읽씹하냐? 죽고 싶어?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이렇게 사람이 깊이가 없어 서야. 쯧쯧.”



도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끓어서 부풀어 오르는 우유 거품을 후후 불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곤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맛을 보았다. 따끈하고 달콤했다. 도헌은 핑크색 머그잔을 꺼내 하얀 우유를 들이부었다.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랐다. 피식, 도헌은 웃음을 내뱉었다.



“제발 좀. 이 우유처럼 부드러워지란 말이다, 오호라.”



미소를 머금은 채 도헌은 머그잔을 쥐고서 로라의 방문 앞에 섰다. 그러곤 노크를 하려 주먹을 쥐었다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잔잔한 미소로 닫힌 로라의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헌은 바닥에 우유를 내려놓았다. 아직 뜨끈한 머그잔을 홀로 내버려둔 채, 도헌은 돌아서 방으로 돌아왔다.



- 어쩌라규. 잠 깼으면 뭐.



그러곤 그렇게 로라에게 문자를 보내곤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며 도헌은 눈만 끔뻑였다. 곧 로라에게서 답장이 왔고.



- 양아치냐? 책임지라고.



양아치냔 로라의 말에 도헌은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곤 휴대폰을 들어 로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방문 열어 보셈. 잘자여.



그렇게 보내고 도헌은 엎드려 누웠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 안의 공기는, 아니 어쩌면 어둠이 내린 이 도시의 공기가 어제보단 조금 더, 데워져 있을 수도 있었다. 여름에 성큼 다가섰으니, 도시 전체가 후덥지근했다.


침대 위에서 누워 자고 있던 로준이 더운 지 이불을 발로 찼다. 도헌은 그런 로준을 힐끔 쳐다보곤 눈을 감았다. 더웠지만, 덥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도헌을 꿉꿉하게 만들었지만 결코 찝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그리고, 방 건너의 로라는 도헌의 문자에 눈을 동그랗게 떠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발밑에 덩그러니 놓인 핑크색 머그잔을 발견한 로라는 도헌이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었다.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머그잔을 꾹 쥐었다. 왠지 도헌의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담아져 있는 것 같아, 뜨거웠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구도발 너는. 쓸데없이 자상한 게…문제야.”



* * *



“점심…같이 드실까요?”



기태였다. 밤잠을 설친 탓에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로라는 갑작스런 기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기태가 미소 지은 채 가게 문을 빼꼼 열고선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 밀 듯이 밀려오던 졸음이 기태 목소리 하나에, 싹 가시고 말았다. 로라는 멋쩍어 어색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안 주무시고 뭐하셨어요?”



기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저벅저벅 로라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로라는 생긋 웃으며 잠을 좀 설쳐서요, 하고 기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프리하게 입은 그였다. 스트라이프 얇은 긴 티셔츠에 까만색 슬렉스를 입은 채. 그리고 발밑으로 보이는 회색 스니커즈. 로라는 안보는 척, 하며 은근 기태를 스캔했다.



“점심 안 드셨죠? 같이…드실래요?”



조금은 경직된 얼굴로 기태가 로라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로라는 그런 기태의 물음에 잠시 수줍은 미소로 기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로라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기태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때, 대답대신 로라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두시까진가요, 선생님?”



로라가 묻자 기태는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 수 있었다. 기태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뭘 먹어야 하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그런 로라를 기태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깔끔한 영문 반팔 티셔츠에 검정색 미니스커트에 하얀색 스니커즈의 로라. 그리고 귀 뒤로 깔끔하게 넘긴 웨이브 진 긴 머리까지. 기태도 로라와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보면 볼수록,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기태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으며 로라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파스타…먹으러 갈까요?”



* * *



“아, 참. 어젯 밤 들어보시라고 링크 걸어주셨던 노래…너무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인디 노래 가끔 듣는데, 어젯 밤에 그 노래 듣는데 로라씨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일상적인 그러나, 둘에겐 생소한 둘만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로라와 기태는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어젯 밤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봐도 달달하고 간지러운 사랑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다니, 로라는 자꾸만 터져나오려는 눈치 없는 웃음을 꾹꾹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로라의 귀여운 반응에 기태 역시, 미소가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 했지만 로라처럼 애써 참았다.



“오늘 비 온다던데. 우산 챙기셨어요?”



기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기태를 올려다보았다.



“아뇨? 비…온댔어요?”
“네. 모르시는 걸 보니 안 챙기셨나보네요.”
“아…네에, 뭐…몰랐네요.”



로라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아직은 맑은 하늘이 눈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태도 로라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다 이내 띵동, 도착한 엘리베이터 소리에 로라의 팔을 슬며시 쥐었다.



“타시죠?”
“아, 네.”
“제가 오늘 세미나가 있어 세시쯤에 병원 퇴근하고 아홉시쯤에 다시 여기로 올 것 같은데.”




로라와 기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그리고 둘을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네?”
“열 시 퇴근이시죠? 맞춰서 올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비가 꽤 많이 온다고 하더군요.”



기태의 말에 로라의 심장이 다시금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요즘 따라 부쩍 적극적이신걸?’ 로라는 내심 싫지 않았다. 싫은 게 무어냐며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손가락을 만지 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로라가 내리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로라가 채 내리기도 전에 한 여자가 성큼성큼 엘리베이터의 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아.”



덕분에 여자의 커다란 핸드백에 달려있던 뾰족한 큐빅에 로라의 팔이 스쳤다. 곧 로라의 살갗엔 빨간 피가 새어나왔다. 로라는 갑작스런 통증에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팔을 감싸쥐었고 기태 역시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로라에게 반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왜 그래, 다쳤어?!”



하지만 정작 로라의 팔에 생채기를 낸 여자는 그런 로라의 사정도 모른 채 전화 통화에 집중을 다하고 있었다. 로라가 여자에게 한 마디로 할 참으로 여자를 돌아보았는데, 그런데.



“구도헌 한국인 것 같아. 나 만나기 싫어서 거짓말 하고 있나봐. 나 오늘 도헌이 부모님 뵐 거야. 지금 뵈러 가는 길이구.”



구도헌이란 익숙한 이름에 로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여자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아 하니…아마도 도헌의 바람났다던, 그런데도 뻔뻔하게 다시금 도헌을 붙잡고 있다던 그 여자인 듯 했다. 로라의 주먹에 순간 힘이 빡 들어갔다. 그리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 잠시만. 안 내려요? 1층인데?”
“…….”
“저 지금 급해서 빨리 올라가봐야 하거든요? 안 내리세요?”



무례하고 건방진 톡 쏘는 말투. 여자는 오히려 로라에게 딱딱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여자는 팔을 감싸 쥔 채 내리지도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로라를 뭐 이런 여자가 다있나,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로라 역시 지지 않고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태는 팔을 쥐고 있는 로라의 손바닥을 슬며시 쥐곤 생채기나 피가 새어나온 로라의 살갗을 발견했다. 그러곤 여자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봐. 사람을 쳐서 상처를 냈음 사과가 우선 아닌가? 바쁘다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우선이 아니라? 그쪽만 바쁜가? 우리도 바쁜 사람인데?”



기태의 말에 여자는 잠시 흠칫하는 듯 했다. 그러곤 로라의 팔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잠시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전화를 끊곤 로라에게 한 발 다가섰다.



“저 때문에 다치신 거예요?”



여자는 로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곤 로라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 로라의 팔을 쥐려는데 로라는 그런 여자의 손을 제지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쪽을 분명 오늘 처음 보았고.”
“…네?”
“여기 이 자리에서 10초 정도 마주한 게 다인데.”
“……?”
“나 왜. 그쪽이 참…싫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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