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아이 캔 스피크>,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그러나 외치기만 해선 바뀌지 않는다.


*본 글은 '영화의전당 <아이 캔 스피크>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글을 읽으시려면 '서문'까지만 읽어주십시오.


*시사회 정보

제목 : <아이 캔 스피크>(2017)

한국/119분

감독 : 김현석


이 작품은 관할구청에 20년 간 8천 건에 육박하는 민원을 제기해 구청 공무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된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과, 토익 950점, 1호봉 특진의 ‘능력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영어강습을 하며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제목 'I can speak'는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옥분의 ‘굳이 영어를 배워서 말하려는 이유’ 자체는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옥분의 강박적인 행동 하나하나는 얼핏 보기에 연관성이 없다. 그래서 왜 이런 행동들을 하게 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어떤 영화든 이렇게 내러티브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궁금증을 고이 간직할 수 있다는 건 좋은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옥분이 말하려는 '뭔가'는 단지 영화의 장치로 끝나진 않는다. 옥분이 극 후반부에 끝내 영어로 말하게 되는 내용 자체도 의미를 가지지만,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주제는 극의 내용들과 중첩되면서 제목이 이끄는 묘한 힘에 사로잡히게 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가벼운 천만관객용의 유쾌한 휴머니즘 영화라고 생각하고 들어간다면 분명 방심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적절한 유머가 뒤섞여 영화를 보는 내내 웃게 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게 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를 다루면서 또 현재를 다루기도 하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조차도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그야말로 ‘할 말이 많은’ 영화다.     

평생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살아온 옥분 할머니. *사진 : 다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스틸 컷

1.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주인공인 옥분 할머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숨기며 살아왔다. 왜? 그건 그녀가 그런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와 세상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꽤 오래 함께했다.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한 성노예 피해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국가가 힘이 없어서 짓밟힌 소녀들은 해방을 맞아서도 피해자는커녕 여자로서의 인생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이는 실제 피해자들의 회고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방 후에 다시 시작된 지옥 같은 삶들. 도움은커녕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야 했던 세월들.     


혹시 ‘화냥년’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조선 사람들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조를 잃은 여자는 더럽고 수치스럽다 여긴 당시의 풍속 때문에 마침내 그녀들은 ‘절개를 지키지 못한 타락한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상은 조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시선은 여전히 존재했다. 공영방송에서 여성 성폭행 피해자의 자살 소식을 전하면서 ‘치욕을 안고 사느니 죽음을 선택했다’는 단어가 쓰이던 시절이었다.      


성노예 피해자들이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살아온 데는 이 같은 사상도 한몫했다. 광복 직후에 그녀들이 성노예 피해자임을 밝히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역사적 아픔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그들이 일본군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여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겉으로는 피해자들을 위로했지만 가까이에선 모두 멀리했다. 결국 성노예 피해자들도 '환향녀'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녀들에겐 낡은 사상에 의한 차별도 큰 고통이었지만,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오’ 역시 이에 못지 않게 그녀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광복 후 친일 부역자들은 사회의 혼란을 틈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다시 사회의 요직을 차지했다. 자신의 과거지우기에 혈안이 된 그들에게 성노예 피해자니, 강제 징용이니 하는 일은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치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좌우 프레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사상의 감옥에 가뒀다.      


대한민국은 친일잔재를 미처 쓸어내기도 전에 6.25전쟁을 겪으며 지독한 이데올로기의 늪에 빠졌다. 전쟁 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증오, 이 증오 앞에서는 무엇도 제대로 요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너도, 나도 피해자인 상황에서,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들은 더더욱 말할 구실이 없었다. 이 기막힌 때에 나타난 독재자들은 이를 정말로 ‘잘 활용’했다. 일단은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니, ‘그런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국민들은 어땠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이에 적극 ‘동참’했다. 그러니 결국 성노예 피해자들을 비롯한 일본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  


무엇이 됐건 나랏일이 우선이었고, 개개인의 피해쯤은 ‘큰일’에 비해서 무시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것은 고난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일본 전쟁범죄의 죗값을 헐값에 팔아 깔아놓은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리면서 도로위에 쏟아지는 다디단 꿀에만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전후 독재체제 아래 고도성장의 미주를 맛본 이들은 성과주의에 함몰되어 성과에 부합하지 않는 인간을 도태시키는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낳기까지 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 역사 속에서 품어야할 피해자들을 내치도록 만들었다.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그것은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픔들로부터 이미 완성돼있었다.      


옥분 할머니는 이런 시대를 살아온 피해자의 전형이며, 결국 그녀가 민원을 제기하며 싸우는 것도 이익에 혈안이 되어 약자를 위협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보면 8천 건이나 되는 민원을 넣는 옥분 할머니의 강박도 이해가 된다. 그것은 ‘일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극중 옥분 할머니의 민원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귀찮고, 짜증나고, 성가신 것으로 그려진다.     

그녀가 투쟁하는 대상은 덩치가 크다. *사진 : 다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스틸 컷


여기서 옥분 할머니가 넣는 민원의 정체는 시장의 재개발을 위해 일부러 상가건물을 훼손하는 집단의 부정을 고발하는 것인데,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공무원들은 ‘힘 있는’ 자들의 요구는 들어주지만 옥분 할머니와 같이 ‘힘 없는’ 자들에겐 귀찮음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민재의 계책으로 옥분 할머니의 요청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건설사에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일부러 질 수밖에 없는 행정소송을 당해 마지못해 건설사의 이익을 보존해주는 치밀한 뒤봐주기까지 자행한다.   


한낱 건설사의 이익을 저해하는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일본군 성노예의 일이랴? 한일 간의 정치지형 관계, 상호 경제, 군사적 의존의 차원을 넘어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의 암약까지, 게다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협력강화를 원하는 미국의 압력 같은 것들은 설령 옥분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단지 ‘이익’만을 생각하면 성가실 수밖에 없게 만든다.     


국가가 국민의 비명을 듣고도 힘쓰지 않는다면 필경 그 이면엔 모종의 이익이 있다. 미국이 총기사고로 곤혹을 치르고 후진적인 의료보장제도로 많은 이들이 ‘의료파산’에 이르는데도 법을 쉬이 고치지 못하는 이유엔 로비스트들의 암약이 있었듯이.     


이 작품에서 옥분 할머니가 제기하는 민원의 재료가 건설사의 이익으로 비롯된 것은 이런 정치, 사회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제력을 위시한 힘 있는 자들의 검은 돈을 받아 높은 관직에 오른 자들. 그런 자들이 부리는 아랫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국가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양혜왕에게 ‘하필 이익이십니까?’ 라고 외치던 맹자의 가르침마저 떠오른다.     


고로 옥분 할머니가 생계를 영위하는 시장은 우리나라의 축소판인 셈이다. 이웃들은 혼자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옥분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기는커녕 팍팍한 생계를 더 힘들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구청 직원들은 그녀의 요구를 성가시게 여기고, 그 이면에는 건설사의 이익이 있다.     

카메라의 초점이 옥분 할머니에게 맞춰져있을 뿐, 사실 주인공의 자리에 어떤 약자를 집어넣어도 이 이야기는 어색하지 않다.


<아이 캔 스피크>는 단지 주인공인 옥분 할머니가 외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의 골조를 이루는 옥분의 삶 자체,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피해자가 입을 닫는 세상, 그것은 누가 만들어온 것인가. 우리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둘 모두의 책임인가. 답이 무엇이 되었건 결과는 하나다. 고통 속에서 삶을 빼앗기고 몸부림치는 것은 우리의 이웃들, 약자들이라는 것을.

옥분 할머니에겐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말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 : 다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스틸 컷

2. 외친다, 그러나 외치기만 해선 바뀌지 않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의 한 아픔을 외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는 대체로 ‘당한 것’이 많다. 특히 그 정도가 심했던 일본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갖는 정서는 미움을 초월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묘사되어있지만 일본은 아직까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극중 대사처럼 ‘I am sorry'라는 간단한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를 요청하고 미국 의회에서 H121 결의안까지 발의해 공식적인 사과 요청을 얻어내기까지 했지만 허무할 정도로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 ‘아무 소용없음’이, 이 영화의 메시지를 공염불에 빠뜨린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개봉하고 2천만 관객을 돌파해도 일본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건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가지는 특수성과 국제무대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폴란드에 찾아가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 이 사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사진 : 구글 이미지, 빌리 브란트

일본이 이토록 뻔뻔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길을 걸었던 독일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전후 독일은 지형적 특성상 사방이 적이었으며, 냉전 체제 아래서 국가가 분단되는 총체적 약화를 겪었다. 게다가 냉전의 주인공이자 승전국인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 다시 전화(戰火)의 불씨를 살릴 형편이 못되었다. 


반면, 일본은 섬나라인데다 인접한 국가라곤 한때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약소국 한국뿐이었다. 냉전의 영향이 있었지만 일본은 냉전의 영향으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권의 태평양 진출을 막을 방파제 역할을 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전후에 분열과 약화를 겪은 독일과는 달리 한국전쟁을 통해 빠르게 전쟁피해를 복구할 수도 있었다.     


요약하자면 독일은 전후에 자신을 견제할 국가도 많았고 힘도 약해졌지만, 일본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독일의 겸손함과 일본의 오만함은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그럼 이번엔 사과를 받아야할 처지의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를 비교해보자.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이 세운 국가다. 그런데 미국 내 유대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은 막강해서, 독일 패전 후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또 유대인들은 종전 후에 독일 자동차 구입을 금지하는 등,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 전까지 독일과의 교류를 전면 보류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본을 견제할 만한 ‘뒷줄’이나 힘도 없었고, 해방 후에 전쟁을 겪으며 가뜩이나 약한 국력이 더더욱 허약해졌다. 공산권에 의해 대륙은 막히고, 결국 우리는 일본에게 당했으면서도 미국과 튼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일본에게 다시 도움을 구걸할 처지에 놓였다.     


이처럼 모든 것을 놓고 봤을 때, '오만한 일본'에게 우리나라는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가. 문제는 이런 경향이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축적했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제대국에 올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가 되었지만, 한국이 국제무대에 데뷔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실 말해 아직까지도 한국의 국제적 영향력은 일본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도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 크다. 최근에도 '코리아 패싱'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애치슨 선언 이후로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메시지가 힘을 잃으면 잃을수록,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과연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한다고 그들이 들어줄 것인가?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면 그것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있고, 고노 담화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사과가 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국가 범죄와 그에 대한 청구서를 요구하는 일은 개인들이 주먹다짐하는 일과는 다른 일이다. 냉혹하고, 철저한 계산 아래 있다. 심지어 양심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되는 독일도 그 이면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이 있었다. 설령 일본 내에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일본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언제든 '말 바꾸기'는 반복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 국제 사회에서 유효할 수 있는 것은 힘에 의한 것이다. 가령 살인자에게 칼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요구해야할 일이지만, 독방에 살인자와 나, 단 둘이 있을 때 그 양심의 선언은 얼마나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 순전히 살인자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인자의 덩치를 압도하고 총을 든 채로 그렇게 말하면 살인자는 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더 세계에 중요한 국가가 된다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더 부합하고 또 나아가 동북아의 패권국이 될 만큼의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이 과연 그래도 사과하지 않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일까? 필자의 생각엔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가 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도 ‘일본은 여전히 사죄하지 않았다’ 문구로 그 결과를 뭉개버리는 것은 이런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외쳐도, 외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일본이 정녕 사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게 우리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 영화가 전형성을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는 건 사실이다. *사진 : 다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스틸 컷

3. 벗어나지 못한 전형성의 굴레     


작품의 메시지는 이쯤 마무리하고, 영화로서 이 작품을 본다면 어떨까? <아이 캔 스피크>는 사실 그렇게 참신하지는 않다. 우리가 흔히 ‘전형적이다’라고 하는 영화의 룰을 그대로 따른다. 갈등이 고조되는 방식이나 반전이 폭로되는 방법, 갈등의 해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진부함 그 자체다.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방식도 뻔하다. ‘여기에선 웃으세요.’, ‘여기에선 우세요.’ 이정표 같은 신과 컷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영화라는 비현실적 요소를 감안한다하더라도 납득이 안되는 비현실적 요소(특히 후반부에 집중된)들은 몰입을 방해했다. 요즘 관객은 그런 '어긋남'을 눈감아 줄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영화의 비현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포착할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갈망에 있어야하지, 일관된 내러티브(적어도 이 영화가 전위적인 예술 영화는 아니니까) 까지 부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서사와 내러티브는 솔직히 말해 사포질 되지 않은 나무토막 같은 면이 적잖아 있는데, 그 까닭은 모든 취향을 한 곳에 우겨넣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요즘 들불처럼 번지는 역사물의 유행을 따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많은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요소, 웃음, 감동, 참혹한 역사 세 가지 요소를 구겨넣고 있다. 실로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으니 상업 영화로서 손익분기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근의 ‘역사 유행’을 보고 있노라면 이 ‘상업 영화’의 경계에 함몰되어 언젠가 날것의 역사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욕심이 많으면 분명 탈이 난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그 경계에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이 캔 스피크>가 기존의 역사 영화들과는 다른 강점은 있는데, 기존 역사 영화들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 역사를 재현해내는데 방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는 현재에 존재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현재 속에 끌어온다. 이것 하나만큼은 이 영화가 기존 영화들과는 참신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조금만 흥행성을 내려놓고 이 방식을 더 정밀하게 가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래도 상업 영화니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본다면 <아이 캔 스피크>가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실로 필자도 별 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필자의 이 영화를 보고 장문을 쏟아냈다는 것만 봐도 이 영화는 생각보다 더 괜찮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영화'로서 <아이 캔 스피크>는 기대하지 말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과연 영화의 외침이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사진 : 다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스틸 컷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이 영화는 가볍고 전형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가 않아서 이렇게 영화를 다시 살펴보는데도 큰 사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작품 속 주인공들이 외치는 메시지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서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외침’에도 주목해야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지독한 자기반성을 요구하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비참한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역사를 잊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피해자가 입을 닫고 사는 세상'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 고통받는 이웃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그리고 극중 옥분 할머니의 친구인 성심 할머니가 잘못된 통역에 격분해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그 근원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살피고 배워서, 말로만 그치는게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2017.09.14 원본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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