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명상'에 대해 잠시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의 삶은 길에 비유됩니다.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걸어가야하기 때문이지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 우리의 일상도 걷기의 연속입니다. 우린 길을 걸을 때 많은 것들을 보게 되지만 지나치는 모든 사물에 마음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들이고 지나쳐가는 대부분의 사물이 나와 무관하며 그 순간 나를 자극하지 않는 한 나의 관심를 끌지는 못 합니다. 우린 이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으며 여태껏 그렇게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스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면 채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뇌 신경회로의 활동전류 과부하로 뇌가 다 타버릴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동물의 왕국 저변에 깔려있는 매우 유용한 기술입니다. '나는 마음이 없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외침은 나의 마음이 여기 있음을 반증할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생각, 이어지는 그 생각의 다발을 '마음'으로 보고자 합니다. 느낌이나 감정조차 하나의 사고 틀안에서 발견 가능한 것으로서 생각과 구분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 곳에서도 길을 걸을 때처럼 마음을 스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생각들을 볼 수 있는데 길을 걸어갈 때 지나치는 사물에 무심했던 것과는 달리 우린 그것들을 너무도 신뢰한 나머지 지나친 관심을 가집니다. 때론 눈 앞의 사물보다도 그 사물에 대한 내 생각이 더 실재 같기도 해서 대체로 그 생각들을 무의식적으로 사실처럼 받아들입니다. 사물은 밖에 있지만 생각은 내안에 있는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도 내 것일 때는 다르게 보이고 내 경험이기에 더 소중합니다. 지나치는 모든 생각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워 붙들기도 하며 사라지는 그 뒷모습까지 꼭 봐야합니다. 마치 손으로 사물을 만지듯 실상으로 대합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지나칠 땐 그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이어진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를 거듭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조차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 그런 '사람'이... 자기 정신의 영역을 '나'나 '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인간 정신의 대부분은 관념의 영역에 있고, 그거슨 관념연합이나 관념의 사슬, 즉 셈귀입니다. 그것들은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의 바깥에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린 우리가 격어가고 있는 세상이 낱낱이 이해되고 해명되기를 원하고 그러기위한 우리만의 이해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고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추상이라는 모래위에 지어진 집과도 같습니다. 노을진 하늘이나 붉게 물든 대지위의 풍경이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듯이 그것을 바라보는 느낌들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느낌은 생물학적 역사를 공유하는 한 종으로서 개체간 소통이 가능한 범위안에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혀 다르지는 않습니다. 1 더하기 1에 대한 '생각'이나 노을을 보는 '느낌'이 꼭 누구의 것이어야만 할까요.. 진정, 저들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 사물을 만나는 것과도 같이 그 '생각들'도 서로 상호작용을 거듭하며 자신의 가치를 이어가는, 나름의 영역을 가진 듯 보입니다. ~*~ 사람이 격는 대부분의 어려움은 그 마음이란 걸 '나'나 '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나의 것.. 법이 보장하는 소유권이 있다지만 우리자신이 그 무엇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무릇 내 것이라 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해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지배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린 병들기 싫어도 병들고 맙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길 원하지 않지만 탈모는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약간의 가려움이나 두통 정도만 오더라도 의사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내가 내 몸을 보듯 보지 않고 생물학과 화학, 인체생리학 등 인체에 관한 온갖 지식이 동원된 안목으로 내 소중한 몸을 객관적인 자연으로 대하며 심지어는 내가 보는 내 몸에 대한 생각마저 교정하려 들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몸을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지배하지 못함을 말해줍니다. '마음'도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이라고 자부하는 그것을 단 한 순간이라도 '침묵'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고요함을 불러 올까요.. 말 그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일어난 그 어떤 사소한 마음조차 우리의 의지대로 된 적은 드뭅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입꼬리가 마냥 처져 있을 순 없고 화내기 싫어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에도 화를 내고있는 자신을 볼 때가 수두룩합니다. 그것은 실상 슬프다고 할만한 일들을 만들어놓고 슬퍼하는 것이나 기쁘다고 할만한 일들을 만들어놓고 기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겹고 지칠 때 오는 그 마음 수준에서는 스스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지요. 교회나 절을 찾아나서든지 명상서적이라도 읽어봐야 조금은 진정됩니다. 잠시 다른 것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일 뿐인 건 사실, 그 마음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수련에 관한 그 무수한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그들 세계의 법칙만을 순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 마음에 다가와 힘들게 했다고 여긴, 이 마음에 오가는 것들은 사실은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우린 그것을 볼 수 밖에 없었던 목격자입니다. 우리 자신이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단지 주시자임을 확인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것을 '자각'이라 하며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나라는 '느낌'이나 '생각'은 목격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눈에게 보여진 것으로서 다른 생각들과 동등한 정도의 대상일 뿐입니다. 물론 이 때의 '눈'은 하나의 위치성을 가진 눈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이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을 의식안에서 동시에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가지를 떨어져 바라보는 제 3의 눈이 있다기 보다 그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전체로서의 의식이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의 몸과 글에 대한 느낌, 생각 그리고 핸드폰과 주변을 동시에 느끼지 않습니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린 이 모든 걸 그 의식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전체 의식내의 표층의식으로서의 한 점인 '몸 나'와 '마음 나'가 나머지 부분인 '세상'을 느낀다고 믿고 있습니다. ~*~ 이런 시각으로 보면 진정한 명상에는 '행위자'가 없기 때문에 명상에는 특별한 때와 장소가 필요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은 그 때와 곳을 '지금 여기'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지금'이고 내가 딛고온 모든 궤적이 '여기'라면 '지금 여기'로 가는 '방법'같은 것은 없겠지요. 하지만 개별자는,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벗어나 있다고 믿고 '지금 여기'에 가려고 애를 씁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 I AM THAT I AM> 명상이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린 단 한 번도 그 곳으로부터 떠난 적이 없었기에.. 진정한 명상이란 그러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지 고요속에 머물고자 하는 애씀이 아닙니다. 명상은 기괴한 각종 호흡법이나 유연성을 길러주는 요상한 요가 자세들, 일념으로 집중 훈련 등과 같은 길거리 난잡한 진열대에서 팔고 사는 싸구려 정신수련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중추신경계의 차크라 각성처럼, 무뎌진 육신 및 자율신경계의 정화는 나라는 중심이 제자리를 찾을 때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몸의 정화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화는 그 어떤 종교적 신앙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런 것들을 명상의 목적으로 한다면 말앞에 마차를 세우는 꼴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변형된 의식상태가 신선 만들어주진 않습니다. 다만 무의식내의 원형으로서 신선이나 그리스도상을 볼 수는 있겠지만 초감각적 지각같은 이상한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수행방법이 다 무용한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은 방향을 정확히 조준했다면 본래의 자기모습을 의식적으로 흉내를 내는 가운데 어느 순간 그 본질의 느낌이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흉내와 본래모습 사이에 개연성이 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명상은 주어진 삶의 매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각하는 경건함입니다. 이 애씀없는 자각은 지금도 변함없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고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전체 의식은 늘 그 상태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내 생각, 표층의식이 가리고 있을 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본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보편적인 존재이기보다 개별적이고 특별한 존재여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는 명상을 찾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자신이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보편적 존재로 느껴지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 앞에서 서둘러 돌아서고 맙니다. 단조롭고 별볼일 없는 일상 속에서 내심 엑스타시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의 목적이 명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내 모습을 확인하는 길이 명상이고 그 길을 진지하게 걸어가려는 태도가 명상으로 가는 스위치입니다. 그것은 무의식을 포함한 전체 의식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