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소설 <백의 그림자>

0. 사랑은 사치일까?

“미안해. 지금 내 상황에 사랑은 사치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삶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서야, 그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해야 할 일, 벌어야 할 돈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게 바로 사랑이더라고요.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안, 사랑은 우선순위 저 바깥으로 밀려 나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사랑을 지지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빠 사랑할 시간이 없다’는 이를 만나면, 끝까지 다독여 사랑하게, 사랑하고 싶게 만들고 싶어요.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는 그럴 때, 어쭙잖은 위로나 설득 대신 내밀면 좋은 책입니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에요. 주인공 은교와 무재는 철거 직전의 전자상가에서 일합니다. 은교는 아버지 손에 자랐는데, 젊고 예뻤던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어요. 따돌림을 당해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뒀고, 아버지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봐 준 일자리가 지금의 전자상가 수리실입니다. 무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자식 일곱 명의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난 무재는, 보증을 잘못 선 충격으로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을 떠안고 살아갑니다. 사실만 나열해놓고 보면, 은교와 무재가 처한 환경은 ‘사랑을 할 상황’이 아닌 듯 보여요. 두 사람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듯, 소설 속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비가 내립니다. 여기서 신기한 건, 눅눅한 분위기 속에서도 은교와 무재의 관계가 밝고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거에요. 책을 읽고 나면 어쩐지 사랑을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 됩니다. 오늘도 난폭한 세계를 살아냈을 누군가에게 제가 느꼈던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소설 <백의 그림자>를 소개하겠습니다.


1.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자상가의 단합대회에서 시작됩니다. 이날 은교는 처음으로 자기의 그림자가 일어서는 걸 목격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는 덤불을 헤치며 숲속으로 들어가기에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그림자임을 알아챘어요. 은교를 지켜보고 있던 무재가 뒤따라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림자를 따라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일어서는 경험을 있던 무재는 은교에게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고백해요. 좋아한다고.



무재씨, 하고 내가 말했다.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  (중략) 여기서 나가면 해 볼까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 씨를요.


 소설에서 그림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치입니다. 은교와 무재가 서로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인 동시에, 그들이 사는 세계가 어떤지 보여주는 메타포예요. <백의 그림자>의 세계관에서는, 누군가 아주 슬퍼지거나 힘들어지면 그림자가 스스로 일어서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평생을 일해온 일터가 사라질 위기일 때, 딸이 아빠가 창피하다고 말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림자가 일어서고, 그림자의 주인은 그걸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겪어요. 그림자를 따라간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자를 ‘고민’이라고 해석하더라고요. 고민에 너무 깊이 빠지면,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에 끌려가게 된다는 의미에서요. 그에 따르면 소설의 제목 <백의 그림자>는 ‘백 (명)의 고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나 사실 요즘 그림자가 자꾸 일어서’라는 고백은 ‘나 요즘 힘든 일이 있어’라는 말처럼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져요.


2. 슬럼,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그림자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등장인물들은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어요. 이 소설이 특별한 점 중 하나는,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 이야기 못지않게, 주변 인물들의 사연도 공들여 묘사되어 있다는 겁니다.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음향 기기를 수리하는 여씨 아저씨부터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오래된 전구를 파는 오무사 할아버지까지. 이곳을 떠나면 갈 곳이 없는 이들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들여 이야기해요. 공간적 배경을 ‘철거 직전의 전자상가’로, 평생 일해왔던 일터를 잃고 세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로 간단히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중략)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하며 무재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중략)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태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회사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된 전자상가 근처에 있어서, 철거를 하는 모습을 오며 가며 자주 보았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그냥 별 생각없이 지났쳤을 광경인데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복잡했어요. 여기에 있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기 잠깐 앉았다 갈까요?”

다시 은교와 무재의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단합대회에서 그림자를 따라가다 길을 잃은 은교를 무재가 구해준 것을 계기로, 무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참 좋았어요. 머지않아 일자리를 잃게 될 시기였으므로, 두 사람에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았을 겁니다. 이럴 시간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시작하는 연인들이 으레 기대하는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연락을 하거나, 근사한 곳에서 데이트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일이 바빠 몇 주 동안 따로 만나지 못 하는 일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교와 무재는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며 서로를 밀어내지 않아요. 이미 점심을 먹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함께 먹어 준다거나, 잠을 못 잔다고 하면 밤 아홉 시에 집 앞으로 달려가 함께 배드민턴 쳐주는 식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받습니다.



등나무 잎을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금이 간 부부 사이의 금슬이 다시 좋아진대요. (중략)  언제고 우리 틈에 금이 가면 삶아서 마실까요? 라는 말에 당황에서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닌데,라고 얼버무리자 무재 씨가 우산 속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중략) 금슬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 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네. 그냥 좋네요.  하며 밤을 바라 보면서 앉아 있었다.


4. 이야기 해 주세요

“오늘부터 사귑시다”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깊어집니다. 물론 두 사람의 연애가 마냥 명랑하지만은 않아요. 아름다운 장면 사이사이에 아픈 현실들이 콕콕 박혀 있지요.


정전이 되었을 때, 혼자 있을 은교가 걱정되어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주는 장면은 충분히 로맨틱하지만, 무서워하는 은교를 달래주기 위해 해줄 이야기라고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으며 살고 있다는 얄궂은 소리뿐입니다.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다가도, 상가가 철거되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은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불쑥 솟아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 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5. 노래할까요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두 사람은 섬으로 갑니다.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걸 먹고 싶다는 은교의 말에, 무재가 삼만 원을 주고 중고차를 사 왔어요. 따끈하고 개운한 조개탕을 먹고, 사찰에서 산책하고, 길에서 파는 군밤을 사 먹으며, 은교와 무재는 드물게 보통의 연인들처럼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지고, 이제껏 그들의 인생이 그래왔듯 무언가 꼬이기 시작해요. 일단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마지막 배를 놓쳤습니다. 마침 삼만 원을 주고 사 온 낡은 자동차도 수명을 다해 엔진이 꺼져버렸어요. 허허벌판에 서서 무재는 미안해합니다. 잘 해보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의기소침해졌어요.


상심한 무재가 걱정된 은교는 짐짓 씩씩한 체를 하며, 괜찮다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캄캄한 시골길을 걸어요. 낯선 섬에서 남녀가 길을 잃은 상황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겁니다. “노래할까요” 저는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가 희망적일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자 상가가 전부 철거되고, 일자리를 잃고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더라도, 은교와 무재는 어디선가 사랑을 하고 있을 것 같았어요.


P.S.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사람은 소설을 읽지 않아도 살지만, 소설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린다’고 말했습니다. 주어를 살짝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아도 삽니다. 사랑이 없어도 세계는 있고 자기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사랑은 타인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만들어 줍니다. 그 과정에서 막막한 현실을 조금은 따듯하게 덥혀준다고 믿어요. 은교와 무재가 먹었던 맑고 개운한 국물처럼요. 한때 사랑이 사치라고 생각했던 당신에게도, 사랑을 믿는 행운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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