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와인이 익는 SOAVE 마을을 가다 (이탈리아)

오전 일을 마치고 온 엘리자베타는 오늘 날 위해 반차를 썼다고 했다.

"까짓것 괜찮아 한번 있는 일이야~" 하며 손가락 하나를 펴지만 내심 미안했다.


엘리자베타의 차에 올라타 가게 된 곳은 어떤 와인 산지였다.

"내가 어렸을 때 부터 갔던 곳인데 알고보니 유명한 와인 산지더라고!"


와인을 개인적으로 너무 많이 좋아해서 언젠간 와인 산지 하나는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엘리자베타 덕분에 이탈리아 와인 산지도 가보게 된다.


이탈리아 와인하면 Chanti(끼안티) 밖에 몰라서 "혹시 끼안티야?" 라고 물었더니

"아니, 소아베 Soave!" 라고 했다.


엥? 소아베는 어떤 곳이지?

마을은 그리 크지 않지만 차로 달리며 이곳저곳 포도밭이 보였다. 포도밭이 펼쳐질때마다 엘리자베타는 저기도 포도밭이고 여기도 포도밭이라고 열심히 알려준다.


이윽고 도착한 소아베는 성곽이 살짝 둘러쌓인, 굉장히 작은 마을이었다.

소아베는 이태리 화이트와인으로 조금은 낮설게 느껴진다. 지역 자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품종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아베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중 하나로 앞서 말한 끼안티와 함께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한다.


베로나의 동쪽에 있는 소아베 지역은 포도밭이 즐비하다. 소아베에서 나온 와인은 고급 풍미보단 가볍고 상쾌해서 깔끔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와인을 살짝 맛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벼본다. "나 우리 아부지한테 와인 사간다고 허락 받았으니까 마셔보고 결정하자고!"


오히려 엘리자베타가 더 신난듯하다.

드디어 마셔보는 와인 시음. 소아베 와인에는 다 클라시코가 붙나보다. 베네토 지방 정부에 의해 처음 설정된 소아베 클라시코 라는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다는 일종의 표식이다. 가격대에 맞는 추천와인을 몇개 받았는데 병이 길쭉한 CARNIGA라는 와인이 아무래도 청량하고 시큼하지 않아 내 입맛에 딱 맞는 것 같았다.

"어떤게 좋았어?" 내가 엘리자베타에게 물었다.

"으음.. " 잔뜩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응 아무래도 나도 CARNIGA 쪽인 것 같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엘리자베타 가족과 하는 식사에서 CARNIGA로 결정했다.

참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렇게 맛있는 와인들이 많은데 하나도 한국에 가져가지 못하다니 분하다. 배낭여행이 길지만 않았다면 당장에 가져가고 싶은 놈들이다.

소아베 마을은 뭔가 중세의 느낌이 진하게 남아있다. 언덕 정상에 세워진 고성 그리고 그걸 감싸는 성벽. 예전에는 방어요새였다고 한다.

베네치아로 연결되는 넓은 평원인 파다나 평원에는 이렇게 포도밭이 멋드러지게 펼쳐져 있다. 이른 아침이면 평원에 살짝 운무가 낄때 그렇게 멋지다고 한다.

"나 꼭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어" 갑자기 엘리자베타가 잡아 끌었다.

성곽 가장 높은 곳에 예쁜 올리브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내려다 보는 풍경이 그렇게 기가 막히다는 것이다.

차로 한 5분 올라가서 주차 후 올라갔더니 바람에 사근사근 나부끼는 올리브나무가 보였다. 보기만 해도 뭔가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아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네~" 나른나른하다.

그곳에서 보는 평원과 마을의 모습도 멋지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엘리자베타 집으로 가는 길. 즐거운 노래 빵빵 틀어놓고 시골길을 달려간다. 아쉽게도 엘리자베타네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한 달 전 까미노를 걸을때 미리 예약해 둔 티켓이 있는데 베로나를 거쳐 빈으로 가는 야간 기차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까지 갈 길이 멀기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타 할아버지가 하루 더 있다가라는 것도 못하고 1박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저녁만 먹고 밤 늦게 기차를 타야한다.


그런데 기차표를 프린트 해야하는 것을 깜빡했다.

"음 기차표 뽑지 못했는데 괜찮을까?"

"글쎄? 역에서 발권할 수 있지 않아?"

"그게.. 좀 저녁이긴 한데... 뭐 아까 보니까 베로나 역에 OBB라고 있긴 하더라 뭐 괜찮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발권하러 역을 들르지 않고 바로 엘리자베타네 동네로 갔다.

다시 돌아오니 남동생도 있었는데 이것저것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여동생이 통역해줬다) 아주머니가 피자를 시켰다.


아아 이탈리아도 피자를 시켜먹는구나(?) 했다. 이것도 하나하나 만드는게 일이겠지 싶기도 했다.

피자가 올 동안 마침 부엌에 할아버지도 계셨는데 날 보자마자 이탈리아어로 뭐라뭐라 말은 하셨는데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들었다. 대충 까미노에서 스페인어에 익숙해진 짬밥도 무시못할게 몇가지 단어도 들렸다. 엘리자베타에게는 내가 참 좋은 친구같다고 말해주시고, 와인은 어땠는지, 포도는 어떤것이 맛있는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렸을때 할아버지가 생각이나서 할아버지에게 정말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이야기를 엘리자베타를 통해 했다.


"아니 그래도 외국인이 이렇게 우리 할아버지 좋아해주는거 되게 신기하다"

"나도 우리 할아버지 손에서 키워졌거든" 하고 응수했다.

갑자기 우리 할아버지도 보고 싶어지네..


"엘리자베타! 할아버지에게 늘 잘해드려!"

"응 물론이지. 늘 잘하고 있다구!"



드디어 저녁시간이 되고 피자 두판이 도착했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하고 무섭고, 공부못한다고 늘 구박만 한다는 전설의 엘리자베타 아버지도 만났다. 영국에서 하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쫄았는데, 은근 츤데레같은 분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하도 궁금했는지 북한사정도 궁금해하고 통일도 궁금해해서 열심히 말해드렸다. 나는 통일을 바라고 있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엘리자베타는 자기 아버지가 무뚝뚝해서 자기한테는 맘에 안들면 하루 종일 말도 안한다고 할 정도로 대하기 힘든 분이라고 했는데 의외로 나랑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

식사를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한 사람들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가족에게 정식으로 부탁했다. 오늘을 잊고 싶지 않아서 사진 같이 찍자고. 아저씨는 끝까지 안찍으려고 하셨지만 결국 찍혀(?)주셨다. 익숙하지 않으신지 굉장히 멋쩍어하셨다.


마지막으로 짐을 꾸리면서 할아버지와 엘리자베타 어머니와 포옹하고 남동생과 여동생에게는 엘리자베타가 영국에서 정말 열심히 했고 지금 영어도 그래서 많이 늘은거다. 정말 1년간 열심히 공부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며. 엘리자베타를 치켜세워줬다.


물론 이런 행동에는 무뚝뚝하고 딸을 못미더워하는 엘리자베타 아버지 보라고 일부러 한것이기도 하다.


아저씨한테는 엘리자베타 덕분에 영국생활에서 심심하지도 않았고 진짜 친구를 얻은 것 같아 정말 좋았다고 말씀드렸다.


나에게 환대를 해 준 가족을 뒤로하고 엘리자베타의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날 부르더니만 시간 있으면 잠깐 이야기나 하자며 창고로 데려갔다.


엘리자베타도 없이 끌려(?) 갔는데 아저씨는 갑자기 창고에 있는 군화나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자기는 군인이었다는 걸 이야기 하는 듯 하더니 왠 그림책 같은걸 보여주며 엘리자베타가 옛날에 보던 책이라고 하면서 엘리자베타 최고지? 갑자기 그러는거다.


은근 딸 신경쓰고 있었구나 싶기도 했다.

"네 엘리자베타 최고죠!" 하며 엄지척 하니까 어깨를 무심히 두들겨주더라.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서 베로나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엘리자베타가 물었다.

"아까 창고는 왜 끌려갔다 온거야?"

"몰라, 근데 아버지 군인이셨어?"

"응! 군인이셨다가 은퇴하셨지. 내가 말 안했구나."

"그렇구나, 근데 말야 너네 아버지가 너 사사건건 간섭하고 싫어하는 것 같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근데 내가 보기엔 너네 아버지 너 엄청 사랑하시는 것 같아~"

"응? 그래?"


"응 잘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을거야."


엘리자베타는 눈썹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얇은 웃음을 지으며 베로나 역으로 향했다.


다음에 계속.

(전)빙글 관광청장입니다. 청정 클린 여행커뮤니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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