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다 버리고, 내 손 잡아.

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카운터 앞에 앉았다.


“먹자, 이거.”
“싫어. 안 먹어.”
“그럼 버릴까?”
“……”
“버려? 그래, 버리자.”
“…….”
“버릴게.”



하며 도헌이 기태가 싸 준 김밥이 든 도시락을 쥐었다. 마음이 미어졌다. 버려, 그래 버리자, 버릴게. 하는 도헌의 말에 로라의 마음이 너무도 미어졌다.


아프고 또 슬펐다. 그런 자신이 미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다 버리는 거다.”
“…….”
“고작 이 김밥 따위에 흔들릴 누나 아니었고.”
“……”
“고작 이 김밥에 담겼을 그 새끼의 정성과 마음이.”
“…….”
“소중한 게 아니듯, 지금 누나의 안중에도 없을 것처럼. 아니 없어야 하듯이.”
“……”
“다 버려.”
“…….”
"다 버리고. 내 손 잡아.”
“…구도발.”


그 의미가 무엇일까, 너의 그 말. 무슨 의미일까.

순간 로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난.”
“……”
“누나에겐.”
“……”
“내가 필요해.”
“…뭐?”
“그리고 나에게도.”
“…….”
“오로라, 네가 필요해.”


진지한 녀석이었다. 진지하게 로라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얘기했다. 진지한 눈으로, 진지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면… 내 마음이 이상하게 떨리고 말잖아.


로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둘은 말없이 걸었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도헌이 어김없이 로라를 데리러 왔다.


기태가 로라의 옆에서 병원을 하고 있으니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남자친구’라는 녀석이 여자 친구를 마중 나오지 않은 것을 기태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의식 아닌 의식으로 인해.


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누나 의사… 안 묻고 맘대로 그렇게 말해버려서… 기분 나빴어요?”


도헌이 조심스레 로라를 향해 물었다. 가방 끈을 꾹 쥔 채 말없이 걷던 로라가 휙,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뭘?”


다 알면서. 모른 척 했다. 모른 척 하는 로라였다.


“필요하다고… 옆에 있겠다고 한 말.”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해버리는 도헌이었다. 로라는 그런 도헌을 말없이 응시했다. 이 녀석, 진심일까?


“뭐가… 필요해진 건데?”
“…….”
“너한텐 갑자기 나의 뭐가 필요해진 거냐구.”


로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도헌이 그런 로라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특유의 그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설핏 지어 보였다.


“누나의 전부 다.”
“…뭐?”


분명 녀석은 농담이 반이나 섞인 장난을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로라의 마음은 어쩐지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턱, 턱 걸리었다. 그리곤 그 말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의미가 부여된 그 말을 쥐고 싶어졌다.


“장난 하지 마. 죽어.”


그 말을 딱딱하게 내뱉으며 로라가 도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늦은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그러나 성큼 다가선 가을의 시큰한 바람이 로라의 머리칼을 스쳤다.


“결혼하겠다고.”
“……!”
“했어요.”



도헌이 뒤에서 소리쳤다. 로라의 걸음은 자동으로 멈추고 말았다.


“뭐?”
“결혼할 사람… 생겼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 사람을, 해달라는 거야?”



로라의 동그란 눈이 더더욱 동그래졌다. 로라가 항상 몹시 놀라게 될때면, 저절로 크고 똥그래지던 눈이었다. 도헌은 그런 로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야.”
“별 거 없어요.”
“…….”
“누나가 허니문 컨셉으로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처럼.”
“…….”
“그 정도.”
“…….”
“그 정도면 되니까.”



도헌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 지난 날 먼저 ‘부부’ 연기를 제안한 건 자신 쪽이었으니까. 로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도헌을 응시하다, 이내 ‘결혼’이란 파격적인 단어가 주는 무거움을 조금은 떨쳐낼 수 있었다.


“그 정도.”


하지만, 그 정도란 도헌의 말이 걸렸다. 그러다… 그 정도 이상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이 아이에게 그 정도 이상을 바라게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차기태에게 그랬던 것처럼, 큰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


머뭇거리는 로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도헌은, 여전히 그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미소를 풉, 하고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 이상이 되어도.”
“……?!”
“괜찮아.”
“…….”
“뭐, 나 같은 매력 쟁이 옆에서 그 정도 이상의 감정을”
“……?”
“가지지 않는 게, 더 힘들 테니까.”



희한한 놈. 로라는 도헌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면 민감할 수도 있는 그 말을,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해버리는 것 역시 이 녀석만의 능력이라면 능력일 수 있었다.


도헌이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로라의 어깨에 손을 척, 둘렀다.


“까분다.”


로라는 그런 도헌을 슬쩍 흘겨보며 손을 툭, 풀었다.


“모레나, 그 다음날이나.”
“……?”
“저희 엄마가 누나 가게 찾아갈 수도 있어요.”
“아, 뭐어?! 벌써?! 헐! 나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됐다고!”
“풉.”
“야! 웃어?! 웃을 일이야 이게?! 어? 웃겨?!”



로라가 펄쩍 뛰었다. 펄쩍 뛰는 로라를 보며 도헌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정해요, 진정. 아! 물론!”
“뭐?!”
“나랑 같이죠.”
“…하아. 너 진짜. 내가 한 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벌써 네 어머니를 뵙게 해?!”
“누나가 안 한다고 해도. 우리 엄마 누나 찾아갈 걸요?”
“에?! 뭐어?!”
“당연. 내가 전 여친이랑 절대, 네버, 다신! 붙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하며.”
“……?”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고 했으니.”
“…….”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엄마는 내 뒷조사를 해댈 거고.”
“…….”
“그럼 버젓이 누나가 그 중심에 떡- 하니 있을 건데.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야아… 하지만!”
“걱정 마. 나랑 같이 누날 찾아가게 할 거니까.”
“…나 어떡해? 물 싸대기 맞으면 어떡해?! 내 멘탈이 또 그런 쪽엔 약하단 말이야.”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울상을 짓는 로라를 도헌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낮에 보니까, 퍼스트 여자 맞닥뜨려도 멘탈이 흔들리는 것 같지도 않더니만?”
“내가 또 내 또래한텐 강해요. 근데 이게 나이 차이가 확 나버리면 어렵단 말이지. 네 어머니신데 더욱 그렇잖어. 안 그래?”
“…긴장 하지 마. 그냥 결혼할 사이입니다. 네에…, 이것만 반복하면 돼.”
“…로보트도 아니고.”
“정말. 그 정도면 돼.”
“그러다 너랑 나, 진짜 날짜라도 잡으라고 하심 어떡하냐?!”


로라가 울컥, 소리 쳤다. 그러자 도헌은 로라의 말에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디잉, 머릿속에 큰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게? 내가 그 생각은 또 못했네? 도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건…”
“뭐, 근데 그럴 일은 없겠지?”


로라가 자문자답을 해버렸다. 그리곤 휙, 돌아섰다. 도헌은 그런 로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날 언제보셨다구, 결혼 날짜 덜컥 잡으라고 하시겠어? 난 또 뭔 걱정을 하는 거냐? 물싸대기를 맞을 것인가, 아닌가를 걱정해도 모자랄 판국에.”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선 궁시렁 거리며 앞서 걷는 로라를 도헌은 한참 바라보았다.


“같이 가요


그리곤 도헌도 이내 로라의 뒤를 바짝 따랐다.


* * *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이 오지 않는 로라. 로라는 끝내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시네…”


술이라도 먹어야 잠이 올까? 냉장고에 든 캔맥주를 생각하며 로라는 양 무릎을 끌어안았다.


‘미안합니다…’


기태의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여자… 정말 더는 날 찾아오지 않을까?”
“…….”
“분에 못 이겨, 날 찾아와서 내 머리채라도 휘어 잡으면 어떡하지?”


내심 걱정도 되었다. 그 껄끄러운 얼굴을 다시 마주하긴 힘에 부칠 것 같았다. 체력적인 문제가 아닌,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를 마주했던 그 순간, 그 여자의 입에서 ‘차기태’라는 이름이 나오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이름과 나를 연관짓던 그 순간.


그 순간들이 다시금 떠오르며 로라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로라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휴대폰을 켰다.


오늘 너무 죄송했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게 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기태였다. 기태의 메신저가 삼십 분 전 와있었다. ‘1’이란 빨간 숫자가 순간 사라졌다.


“당신도… 못 자고 있구나?”


여전히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헤어지려니, 이제 와 자신을 쥐고선 놓지 못하는 이 사람.


이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내가 처음 그 사람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그 고통과 아픔의 딱, 그 정도 일까? 아님 그 이하일까.


- RRRRRRR


“앗, 깜짝이야!”


이 한 밤중의 전화는 뭐야, 로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태인가? 아님 그 수정이라는 여자? 엎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는 로라의 심장이 쿵쾅대고 있었다.


새벽 세 시에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 로라는 죄인이 된 것 마냥, 수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고요한 방안을 가득 메우는 벨소리에 로라는 옆방의 도헌과 로준이 깰 수도 있겠단 생각이 문득 스치자, 조심스레 폰을 쥐었다.


“후아… 후아… 후아”


이내 뚝, 끊겨버린 벨소리. 들 숨, 날 숨을 격정적으로 내뱉으며 로라가 휴대폰을 뒤집었다.


“… 차기태.”


기태였다. 차씨라고 저장된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 박혀 있었다. 술이라도 마신 걸까, 문자에 이어 이 시간에 전화라니.


원망스러웠다. 잘못이란 잘못은 자기가 다 해놓고… 마지막까지 사람 힘들게, 왜 이렇게 자신을 쥐고 놓아주지도 않는 건지.


“세컨드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고. 있을 때 잘해야지, 이제와서 지X이야.”


낮게 욕설을 읊조리며 로라가 방문을 끼익 열었다. 답답한 마음에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숨을 골랐다. 잠은 다 잤네, 말똥말똥한 정신에 로라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곤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가디건을 대충 걸쳐 입으며, 현관을 나섰다.


“나 지금 방황하는 거 아냐. 마음이 어지러워서도 아냐.”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누가 묻지도 않은 걸, 스스로 대답하며 로라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에 열리자 찬 공기가 훅 끼쳤다. 몸을 한껏 웅크리며 로라가 아파트를 나섰다.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환한 가로등이 산책로를 비추고 있었다. 로라는 주머니에서 손을 집어넣은 채,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창 바쁠 시즌에… 신상도 떼러 동대문도 가야하면서… 바보처럼… 남자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난 참… 뭐냐, 머저리냐.”


아팠으니까, 많이 흔들렸으니까. 이젠 그 중심을 잡을 시간이니까.


내일부턴 다시 예전의 로라로 돌아가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로라는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아! 휴대폰!”


순간, 휴대폰을 방 침대 위에 두고 온 것이 퍼뜩 떠올랐다. 로라는 얼굴을 홱 구기며 자신의 주먹으로 머리를 쿵, 내려쳤다.


아무리 아파트 안이래도, 밤은 위험하다고.


휴대폰이 없는 것을 깨달은 로라가 집으로 돌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


한 남자가 자신 앞에 우두커니 섰다.


* * *


오래 기다리셨지요!

기다려주셔서 넘 감사드려요 ^_^

연휴가 끝나기 전 다음 회차를 들고 찾아오도록 할게요!

즐건 추석 연휴되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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