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나의 악연을 말하자면 아직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있다고 믿었던 아주 어릴 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4년, 나님 여덟 살. 나의 실제 산타였던 아빠는 당시 'OO 영어'의 모국어 습득 교육법에 빠져 있었다. 조만간 회사를 때려치우고 'OO 영어' 학원을 차릴 기세였지. 창업 전 철저한 조사를 위해 딸내미인 나는 자연스레 'OO 영어' 교육법의 실험체가 되었고, 정신 차려보니 엄마가 끌고 온 동네 아이 다섯이 나와 함께 'OO 영어' 과외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교실에 호전적인 2학년 오빠야가 찾아와 말했다.
"여기서 누가 영어 제일 잘하냐?"
뭐래. 초2병이여? 조숙한 나는 치기 어린 그의 대화에 조금도 끼고 싶지 않았지만 왜인지 나와 같이 'OO 영어' 과외를 받던 아이들이 나를 가리켰다. 왜? 나 왜? 그사이 내 앞에 성큼 다가온 2학년 오빠야는 근엄한 얼굴로 외쳤다.
"스탠덥"
모르는 말이다. 배운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더 기세등등해진 2학년 오빠 새키가 한 번 더 말했다. 스탠덥이라고!
"스탠덥은 아직 몰르는데..."
우물쭈물 모른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어쩐지 함께 과외를 받는 아이들 머리 위에서 푸쉬식 실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미안해. 이 동네에서 'OO 영어'는 이제 끝이야...
"일어나란 뜻도 모르냐? 영어 잘한다더니"
패색이 짙은 내 얼굴을 본 2학년 오빠 새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주뜯고 싶던 그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최초로 영어 때문에 수치스러웠던 기억이다. 그 뒤로도 아빠는 몸소 소파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내게 on이라는 전치사를 설명해준다거나 회사 프린터기로 영어 기사를 잔뜩 뽑아와서 외우게 했지만 나는.
"우리는 행복팀이니까 I am happ라고 쓰자. 나는 행복하다는 뜻이야."
"우와 너 영어 잘한다."
"애나야, 잠깐 선생님 좀 볼까? 사실 여기 y를 붙여야 하거든. 괜찮아. 모를 수도 있어. 부끄러운 거 아니야."
초등학교 3학년, 다시 수치의 역사를 이어갔다.
~영어는 나에게 라면 같은 존재다. 나는 사실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내가 라면을 좋아하는 줄 안다~
그 뒤로도 나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아빠의 갸륵한 정성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능 외국어 영역을 말아 먹고도 어찌어찌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영어를 못 하는 건 나뿐이라는 것을 영강 수업 속에서 깨달았다. 한국인들 누가 영어 모탄대??? 교수님은 음..아이 띵크...만 반복하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장차 피디가 될 사람이고 피디 시험에는 토익 점수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언론고시 기간이 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나는 괴로워졌다. 피디고 뭐고 이제 그만 딴 길로 새고 싶은데 일반 기업에 지원하기엔 내 토익 점수가 턱없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토익 응시료는 매달 적금처럼 붓고 있었지만 점수는 떨어지기만 했다. 혹자는 그냥 학원 가서 요령만 배우면 된다더라. 하지만 그때의 나는 피디 된다고 모아둔 돈이 급속도로 동나는 중이었다. 비싼 토익 학원비까지 내는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열 번쯤 시험만 치다가 '응시료 낼 돈으로 한 달이라도 학원 갈 걸'이라는 후회가 들었을 때는 이미 남은 돈이 없었다. 토익 덕분에 나는 오랜 시간 언론고시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백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결국 나영석 김태호는 되지 못한 나였지만, 다행히 토익 점수를 보지 않고 합격시켜준 일반 기업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한국인이 세운 미국 회사였다. 오피셜 랭귀지는 영어였고, 매주 영어로 전체 회의를 하는 곳이다. 근데 저 왜 뽑...? 끄응. 그다음 이직한 곳은 또 본의 아니게 외국계 회사였다. 팀원이 나 빼고 다 외국인이었다. 나는 왜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데 점심마다 라면을 고르고, 영어를 못 하는데 계속 영어 쓰는 회사에 다니게 되는 걸까. 구글 번역기가 지겨워 앞으로 영어 쓰는 회사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는 운명처럼 뤼이드라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산타토익'
~인생에서 겨우 토익을 스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거슨 경기도 오산. 이번 주부터 매일같이 산타토익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
산타토익
해서 그때의 나와 같은 청춘이 있다면 토익 따위가 발목을 잡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벗어나서 재미있는 많은 것을 하도록 돕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시점에 내가 산타토익이란 서비스를 알리는 일을 맡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번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토익커들에게 이 좋은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내토타(내 토익 타입)'라는 작은 테스트를 준비했다.
몹시 안전한 위의 링크를 클릭하고 최소 6문제에서 최대 10문제만 풀면 인공지능이 당신의 토익 예상 점수를 무료로 진단해준다. 덤으로 당신의 숨겨진 진짜 성격까지 알 수 있다.
위의 점수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토익 점수와 거의 흡사하다. (2014년 기준 675점이었다.) 심지어 뤼이드 입사 전 면접 준비를 하면서 산타토익 진단 고사를 보았을 때도 같은 점수가 나왔다. 인공지능 소오름. 한결같은 나의 영어 실력도 소오름.
[오늘의 리빙 포인트]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것은 토익 점수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내가 성격 테스트 중독자라서 넣어 보았다. 은근 잘 맞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먼 산)
'내토타' 테스트 분석 결과 중에 가장 유용한 부분인데 내가 어떤 유형이 가장 취약한지, 내가 굳이 풀지 않아도 될 문제 수는 몇 개인지 알려준다.
이건 내 토익 예상 점수 결과에 따른 예측이다. 산타토익 유저들 중 나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 사람들은 20시간 학습 시 117점이 상승했다고 한다. 전체 평균으로 봤을 때 산타토익 유저들은 20시간 학습 시 무려 124점이 상승했다. 기획을 위해 실제로 어제부터 써보고 있는데 인공지능 튜터가 집요하게 숟가락으로 떠먹여서 본인이 앱을 꺼버리지 않는 한 그럴만하다.
자정이 넘었다. 이런다고 회사에서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자유 의지가 있고 합리적인 노동자인 내가 이 시간까지 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토익이란 소중한 내 인생에서 정말 빨리 치워 버려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토익 따위가 당신의 마음의 여유를, 자유를 잃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2010년의 나야, 듣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