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딕 레전드펌] 유괴당했다 살아돌아온 사람의 이야기2

실상 나는 낯선 환경과 묘한 이질감으로 인한 공포를 느꼈지만, 버젓이 살아있었음에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남자의 행동은 다 자란 내가 들었을 때도 무언가 모순적이었다.


그는 엄마에게 어쩐지 내가 죽었다는 듯이 말했으며, 그 흉내는 아주 은밀해서, 오히려 듣는 사람이 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엄마는 경찰에 연락하지 말라는 남자의 말을 따를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남자가 그런 말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파출소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 엄마의 마음에 걸렸다.


엄마는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렇지만 경찰을 대동하지 않은 채였고, 더군다나 현금으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서 단박에 전화가 왔다. 가방은 커녕 봉지 하나 손에 들고 오지 않은 엄마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는지,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때 엄마는 요구했다.

나의 생사를 알아보고 싶으니 긴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엄마, 라는 그 짧은 단어는 엄마를 안심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죽음을 확신하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엄마는 심장이 쾅쾅 뛰었다고 했다. 고작 주부인 내가 그런 일을 겪어봤어야지, 하고 언젠가 엄마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엄마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돈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그런 돈은 당신이나 씹어먹으라며 욕을 지껄였다고 한다. 그 딴 돈 따위 원래부터 필요 없었다면서. 그리고 엄마는 똑똑히 들었다고 한다.


'나의 딸'을 이제 찾지 말라고.


그건 엄마를 분노에 들끓게 하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시켜주는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전화가 끊기고 엄마는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너무 크게 흐느끼며 울자, 건너편 파출소에서 엄마가 술에 취한 사람인 줄 알고 출동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 때까진 난 잘 있었다. 이것저것 먹으며.


그러나 어린 남자와 선글라스를 낀 남자 사이의 기묘함과, 선글라스를 낀 남자와 나의 관게에 대한 의문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린 남자가 나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도 동정심을 느끼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난 어린 남자와 선글라스를 낀 남자 사이의 기묘한 기류는 알았지만, 끝내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네이버에 '후레자식'이라는 웹툰이 있더라.

어쩌면 그들은 그런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얼굴만 아는 공범이든가,

어린 남자 또한 유괴당했던 피해자일 지도.


하지만 모든 것은 내 추측에 지나지 않고 나는 진짜 사실은 알지 못한다.


왜냐면 경찰은 그들을 끝내 잡지 못했다.


일주일의 반이 흘러간 후, 어린 남자는 나에게 적대감도 보였고 동정심도 보였다.


사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랬더라는 희미한 단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덟살, 거의 이십년은 된 이야기니까.


그래도 뚜렷한 기억이 두 가지가 있다.


그는 항상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 날도 그랬다. 내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복 받은 년이라고 경멸하듯이 말했다. 나는 복 받다, 라는 말을 알 정도의 나이였지만,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 남자도 내게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해봤자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것일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 욕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그에게서 동정심이라고 찾아볼 만한 기억도 하나 있다.


어쩌면 나는 어린 남자가 곁에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나를 딸이라고 부르면서도 나를 딸처럼 대하지 않았다.

애완동물처럼 대했고, 나아가 성적 노리개로 썼을 지도 몰랐다.


하루는 그런 일이 있었다.

이 일이 내가 유괴당하고 난 직후에 생긴 일인지, 아니면 한참 후에 생긴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같이 목욕하자고 했다. 아니, 씻겨주겠다고 했던 것도 같다. 그 남자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그가 왜 선글라스를 계속 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셔츠를 벗었다.

나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싫었다.

그가 징그러웠다.

내게 다가오는 담배 냄새 나는 손이 역겨웠다.


그 때 어린 남자가 내 앞을 막았다.


아버지, 라며 뭐라뭐라 한 것 같다.

아마 이 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뭐 그런 것이었을 거다.


선글라스 낀 남자는 어린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그렇지만 어린 남자는 계속 내 앞을 막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계속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삼십분은 그러고 있었을 거다.


그 때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는 욕을 하면서 어린 남자의 뺨을 때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린남자는 나를 복층 위에다 올려주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걱정하지 마.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엄마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돈 따위 필요 없다며 욕을 퍼부어댔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다시 돈을 요구해왔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죽였느냐고 물었다.

만약 나를 죽였다면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남자는 죽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믿을 수 없으니 나와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남자는 몇 번이나 말해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엄마가 말했다.


그럼 내 딸을 죽인 거겠네요?
당신이 내 딸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하는 걸 보니.


남자는 잠깐 말이 없더니 당신 딸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전화를 해줄테니 특정 장소에서 돈을 전달하라고 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경찰들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경찰들은 엄마에게 아줌마 겁도 참 없어요. 라고 말했다.


엄마는 엄마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아빠가 손만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빠는 회사에 휴직을 하고 -회사도 받아줄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사라진 부근-만화방으로 가는 곳-에서 전단지를 날랐다.

잠도 자지 않았다고 했다.


날 위해서 돌린 전단지가 오백 장은 넘는다고 말했다.


목격한 사람에게 사례금 천 만원을 준다는 말 때문인지,

시시껄렁한 장난전화로 마음을 다치는 것도 아빠의 몫이었다.


그리고

잡혀가는 나를 피해 도망갔던

아줌마가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겁이 너무 많았고 다소 멍청한 감이 없잖아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 사람은 아빠에게 어린 여자애가 선글라스 낀 남자에게 잡혀가는 걸 봤다고 했다.

검은 밴이었다고, 차량 번호는 맨 앞 글자가 '4'로 시작하는 것만 봤다고 했다.


아빠는 화를 냈다.

어째서 바로 신고하지 않으신 겁니까, 하고.


아줌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례금은 필요 없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손길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음험해지면 음험해질 수록,


내 가족들과 어린 남자도 점점 그의 숨통을 죄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내 흐릿한 유괴 사건 중에 가장 뚜렷한 기억은 엄마와 한 통화다.


그 통화는 꽤 길어서 대략 십 분 쯤 이어졌던 것 같은데,

그 때 내 곁에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없었고 어린 남자만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라 엄마와의 이야기를 조합해볼 때,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전화를 준다던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어디가고 어린 남자의 감시 하에서 엄마와 통화를 했던 걸까.

그건 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자꾸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응, 엄마. 응, 괜찮아. 하고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대답했다.


신을 믿느냐고 누가 물으면 차라리 내가 신 노릇을 하겠다는 무신론자인 엄마가 자꾸만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 뒤 엄마는 내가 위험하지 않게 우회적으로 돌려 묻기 시작했다.
(참고로 스피커 폰으로 대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차가 커서 무섭지 않았니? 우리 집 차보다 훨씬 넓었을 텐데.
(벤을 탄 애가 내가 맞는지)
아니 괜찮았어.


거기까지 가는 데 너무 오래 걸렸지? 힘들었지?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말대로 내가 멀리 떨어져 있는지)
힘들긴 했는데 괜찮아.


다른 아저씨가 잘 해주니?
(공범이 있는지)
그냥......


거기 있음 안 무서워? 어둡지 않아?
(내가 있는 장소를 대략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아니. 안 어두운데. 그냥 좀 높아서.


요새 뭐 먹고 있어?
(취사가 가능한 곳인지)
아저씨들이 이것저것 사다도 주고, 저번에는 고기도 구워줬어. 빵도 구워줬고.


(위의 이야기는 엄마가 녹음한 것을 바탕으로 적음.)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니 어린 남자는 통화 종료 합니다, 하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엄마는 안도했다.

엄마는 이 짧은 대화와 스피커 폰이기 때문에 나는 주변의 소음들에 의해서 내가 아파트(혹은 주택)에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자식 잃은 엄마는 어느 누구보다도 절박하고 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빠대로 검은 벤과 4라는 숫자 하나를 가지고 경찰들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것만으로는 힘들다는 경찰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그 차가 동쪽 부근으로 달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서서히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내가 도망쳐 나올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진 않았지만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압박하여 그가 결국에는 폭발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린 남자가 그런 그에게 극심한 반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으면,

나와 달리 가족들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분명히 돈을 놀렸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윗동네에 사는지, 아랫동네에 사는지를 묻지 않았을 것이고, 구천 만원도 요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조건들이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길 위쪽에 살고 있는 나를 굳이 데려온 건,

넉넉한 이들(하지만 갑부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아파트촌 사람들을 그렇게 여긴 이유가 뭘까)은 자식 새끼 하나 없어져도 가난한 이들보다는 덜 아플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만약 그 사실이 맞다면 그는 확실히 틀린 것이지만.

부모는 돈과 차이 없이 똑같다.

그게 내가 그 사건을 회상할 때마다 느끼는 바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내 이름 하나만으로 우리 가족을 알아낸 다음 그 주변을 감시했다고 했다.


cctv에서 우연히 그 남자의 모습이 스치듯이 발견되었고 목격자들도 몇 나왔다.

그런데 그게 모두 우리집 부근이었다.

즉 그가 복층 아파트에서 자리를 비웠던 건 감시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여유롭던 마음이 엉켜버렸을 것이다.


어린 남자의 시선 때문에 주춤거렸던 손이 내 배를 만졌던 것이 그 증거다.

기억에 그는 끝무렵부터 자신의 욕망을 숨기는 일이 없어졌다.

내게도, 어린 남자에게도.


그리고 드디어 사건이 터졌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도 이제 끝을 달려가는 것이다.


그건 내게 가장 확신할 수 없는 일이자 확신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어린 남자와 나는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라면이 굉장히 짰던 것과 어린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노란 고무줄로 묶어줘서 따가웠다.

어린 남자는 그 즈음 내게 잘 대해줬다.

그렇지만 그게 익숙하지 않아, 그 배려는 거의 쓸모없었다.


아무튼 그 순간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어째서 그 순간까지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던 걸까.

나를 보내줄 마음따윈 없었을 텐데도 그는 그 순간까지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어린 남자와 난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욕을 하며 내 머리를 잡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그건 정말 순간이었다.


그 때 그의 얼굴은 몹시 붉었다.


정말 그건 순간이었다.

그는 자기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 뒤로 던지더니 내 옷도 벗기려고 달려들었다.


반항할 틈도 없이 사건은 매우 빨리 전개되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남자가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냈다.

어린 남자의 얼굴도 벌겠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린 남자가 내 허벅지를 발

로 차며 빨리 뒤로 빠지라고 했다.

눈 앞이 빙빙 돌았다.


그 때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식칼을 뽑아 어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두 사람은 한참을 엎치락 뒤치락을 했다.

몇 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되는 지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냥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배에 칼이 꽂혀있었다.

배와 칼의 틈새 사이로 피가 흘렀다.


어린 남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보더니 손을 씻었다.

그 때까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살아있었다.


그는 자기 배를 망연히 내려다봤다.


어린 남자는 위로 끌어올라간 옷자락을 내려주고 바지도 끝단이 찢어져 새것으로 갈아 입혀줬다.

그러고 보면 그 집에는 어린애 옷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남자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내가 하려는 건 그를 두둔하려는 말이 아니라, 어쩌면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항상 현관문을 밖에서 꼭 잠그곤 했다.

나를 다락방에 올리는 것은 잊어도 그것만은 잊지 않았다.


어린 남자가 나를 보고 가라고 했다. 아니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내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닐거라고 본다.


어쨌든 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길고 긴 일주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한참을 걸었다.

어른을, 남자를 믿을 수가 없어서 피하며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어른들도 나를 물끄러미 볼 뿐


그냥 자기 갈 길을 갔다.


그런 내게 처음으로 신경을 쓴 사람은 의외겠지만 불량배 무리였다.

지금이야 일진이라 불리지만 그 때는 불량배라고 부르는 남자 무리들이 나를 에워쌌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서 맡았던 담배 냄새가 나서 나는 얼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헤칠 마음이 없었다.


너 엄마아빠 잃어버렸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도 못하고 그냥 울어버리자 한 남자가 괜찮다고 쪼그려앉아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가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다행히 나는 우리 집 번호를 외우고 있었고 그들은 뜻하지 않게 우리 집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아빠가 준다는 보상금마저 거절하고 그냥 멋쩍게 웃으며 돌아섰다고 한다.


그건 내 충격을 누그러뜨려준 큰 요인이었다.

나는 그들 덕분에 남자도, 손가락 사이의 담배 냄새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간 뒤로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기억이 다시 연결되는 지점은 5일이 흐른 후다.

나는 그 후부터 경찰 앞에서 같은 말을 수십번 반복해야 했다.

아마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그 일을 꽤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 어린 남자와 선글라스 낀 남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둘이 몸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밖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성장한 내가 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난 남김없이 털어놓을 게 분명하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이해관계를 저울질하는 것이 능숙하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 때의 나는 치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어린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 때는.


결국 경찰들은 그들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앞만 보고 정처 없이 걸은 내 책임도 있었다.

나는 그 곳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분개하고 또 불안해했지만 딱히 도리는 없었다.

그 사건은 그저 미제로 남았고 우리 가족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급히 이사를 갔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핸드폰을 찾았다는 소식을 거의 일 년이 흐른 뒤에 들을 수 있었다.

등산객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략 몇개월이 지난 뒤에는 중고로 나온 검은 밴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판 사람을 끝끝내 만나지 못했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고 나는 자라 성인이 되었고 평범하게 대학을 나와 광고회사에 취직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씩 내 가슴을 때리는 답답한 이야기들을 여기에다 풀어놓고 싶었다.

난 더이상 괴롭지 않다.

그저 한없이 답답할 뿐.


그래.

그래서 나는 익명이 보장되는 이곳으로 왔다.

나의 악몽을 나라는 사람을 밝히고 말할 용기와 멍청함이 내게는 없어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또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의문이 있다면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의문이 아니면 나는 대답을 해주지 않겠지.


누누히 말했듯이 나에게 이곳은 그저 대나무 숲에 불과하니까.


나에겐 그 일은 귀신을 봤다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자 악몽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동안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해 본다.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를 지켜봐줘서.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 나의 유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출처 스레딕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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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면 볼수록 필력 너무좋으심


광고쪽 일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진짜 필력좋으시네요. 이런 일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 피폐해진다고 하는데 그게 딱 맞는 말인가봐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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