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밥을 도전했었다.

설 연휴동안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서 그런지 맨날 그지같은 걸로 떼우던 끼니를 간만에 잘 차려진 밥상에서 먹게됐다.

정성스레 부친 전, 갈비찜, 집 김치, 자취할 땐 쉽사리 먹기 힘든 삼색나물들...

그리고 집에서 직접 빚은 만두와 그 만두로 만든 떡만두국까지,

여기저기 이동하고 애(새끼)들 놀아주고 지갑뜯기느라 피곤했지만 '난 지금 식도락 여행을 떠난거다~'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실제로 음식은 남도음식 못지 않았으니까.


근데 이게 사람심리가 묘한게...

이렇게 진수성찬만 먹다보면 또 그냥 대강 만든, 간단하게 끼니 떼울 수 있는 그런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뭔가 빈곤의 아이덴티티가 녹아있으면서 맛도 있는 음식... 한 그릇 꼭 쥐고 허겁지겁 먹을 수 있는 음식...

그거슨 바로 콩나물 밥...!


연휴가 끝나고 자취방에 올라오면서

"아 냉장고에 콩나물 남은게 있으니까 그거 다 때려부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즐겁게 냉장고를 열었으나,

남은 건 거무죽죽한 색으로 변해버린 콩나물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을 봐왔다.


존나 뭔 콩나물을 한됫박을 묶어 파능교... 이거 또 다 남으면 버리는데...

마침 달래도 팔길래 업어왔다. 양념간장에 넣어먹으면 향긋하고 좋을테니깜

근데 요즘이 달래철인가?


일단 아무리 콩나물밥이어도 달랑 콩나물하고 밥만 있는건 너무 내 스스로가 안타까울 것 같았다.

뭔 고난의 행군도 아니고 그렇게 먹어야하나...

그래서 뭔가 익숙한 비쥬얼을 만들어보고자 냉장고의 남은 야채들을 채썰어 때려박았다.

당근과 표고.

이때부터 묘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이가 조금 높은 느낌? 콩나물이 얼마나 들어가려나 싶어졌다.

당근도 미친놈이 개 못썰어가지고 상당히 두껍다.


당근이 참 애매한 채소인게,

솔직히 그닥 식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맛도 없고, 여러모로 별로인 음식인데

막상 빠지면 또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제육볶음이나 닭도리탕, 찜닭같은데에 당근이 안들어가면 무척이나 꽁기꽁기하다.

어차피 잘 먹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나는 초식동물이 아니니까 고기를 좀 넣고 싶었다.

내 기억엔 보통 콩나물밥에는 다진 소고기를 넣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서민의 저렴저려밍인 콩나물쨩이 비싸기만 한 소고기놈과 어울려야 하는가.

이건 서민에 대한 기만이다. 콩나물밥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정과 구빈의 정체성이 자본주의의 상징에게 휘둘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난 그 꼴 못보지. 그 꼴 못봐.


냉동실에 연휴 내내 잠들어 계시던 돼지고기다.

가격도 개저렴한 앞다리살이다.

맘같아선 뒷다리살 사고 싶었지만 마트가서

"뒷다리 냉동 있어요?" 묻는건 솔찌기 쪼끔...창피해서...

쨌든 얘도 한 근 사놨다가 간당간당할때 쯤에 냉동실에 넣어놓은지라

잡내까진 아니지만 뭔가 그 근처의 아슬아슬한 냄새가 난다.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넣었다. 해동이 덜되어서 아주 칼질이 빡세더라.

이 때 비로소 좃됐음을 느꼈다. 이미 밥솥의 반 이상이 차오른 상황.

그리고 냉동육이다보니 다지기가 힘들어 대강 썰어넣었다.

콩나물을 때려 넣었을 때의 예상 비쥬얼은 개밥이 될게 뻔했다.


참고로 이번 요리의 모든 과정은 어떤 레시피도 참고하지 않았다.

어떤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는 것...융복합적 사고를 통한 창의적 인재 육성을 강조하고 있는 현재의 교육 기조에 맞는 행동일까?

우리는 레시피를 답습하며 스스로의 크리에이티브함을 죽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이번요리는 실패의 모성애가 느껴지는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진짜 좃됐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이건 세도정치 급이다.

마트에서 사온 콩나물로 콩나물시루를 그대로 재현했다.

혹자는 콩나물을 조금 빼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겠지만 그건 옳지 못하다.

콩나물은 열을 가하면 숨이 죽을 것이니 밥솥을 꾹 눌러 닫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요,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개밥이 아니라 콩나물밥이니 콩나물이 많은 것이 지당한 일이요,

전기밥솥은 알아서 시간만큼 취사를 할 것이니 성공적으로 밥이 될 것이요.

난 밥솥을 믿는다. 밥솥을 믿는 나를 믿는다. 그렇게 취사버튼을 누르고 왔다.


그 사이에 사온 달래로 양념장을 만들었다.

고춧가루를 더 넣었어야 했는데 부족한 바람에 대강 마무리했다.

역시 별 특별한 재료를 넣지도 않았지만 향긋하니 좋다.

적당히 밥이 되고 있으리란 생각에 밥솥으로 갔지만 놀랍게도 밥솥은 어느새 보온으로 바뀌어있었다.


뭐지?

뚜껑을 열어보니 생 콩나물 그대로다.

다시 닫고 취사를 누른다.

이번엔 3분이 채 되지 않아 '달칵' 소리가 난다.

열어보니 밑의 쌀은 끓고있고 콩나물은 여전히 쌩쌩하다.


진짜 좃됐다.

전기밥솥은 정해놓은 시간 별로 취사를 진행하는게 아니라 내부 압력에 따라 취사를 진행하나보다.

그 때쯤부터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취사를 눌러댔지만

이젠 아예 누르는 즉시 보온으로 바뀌더라.

다급해진 나는 안 익은 콩나물을 일부 건져내고 이리저리 위아래로 뒤섞어 다시 시도했다.

여전히 취사가 먹히지 않는다.

얼핏보면 비쥬얼이 그럴듯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자세히보면 쌀이 투명하지 않고 새햐얗다.

완전히 덜익은 상태.

게다가 밑부분에는 아직도 물이 흥건하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싶어 한 입 먹어본다.

뜻밖의 크리스피함과 퍽퍽함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아 이건 누렁이도 난색을 표할 것만 같다.




문득 인류가 지금의 발전상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생각난다.

문자는 이전까지 구전되거나 유실되던 역사와 지식들을 계승시킴으로써 인류의 지혜를 축적시켰다.

인간은 문자를 통해 내가 겪지 못한 사건을 경험하고 시행착오의 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이게 된다.

우리는 문자 덕분에 과거의 인류를 학습하고 진일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레시피를 보지 않았는가.

왜 위대한 문명의 산물을 부정했는가.

나는 원시인류다...나는 원숭이다...원숭이다...낔

우끾...끽...끼낔...





음식물쓰레기 봉투가 터질것만 같다.

도비는 자유를 원한다. 더러운 자본주의 돼지들에게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직장을 때려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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